112화
얼음꽃
“하아… 하아…! 다행히… 왔나…?”
헤르만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면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엘릭이 다급하게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 찮네. 그냥 갑자기 너무 많은 마력을 사용하면서 생긴 일시적인 탈진일 뿐이니까.”
헤르만은 지쳐 보였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랄까?
어딘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비록 체력이나 몸 상태는 아직 옛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입마증을 겪고 자네를 만나서 좋아진 점이 뭔지 아나?”
“무엇입니까?”
“조금 전에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에 한발 다가갔다는 것일세.”
“…?”
엘릭은 헤르만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헤르만의 두 눈은 다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화위복.
그 말이 가장 먼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엘릭이 가르쳐준 치료법이 오히려 마력 순환을 기존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 손실률을 최저로 줄이고, 그와 다방면에서 나눴던 모든 이야기가 새로운 영적 자극으로 남으면서 새로운 시계(視界)를 트이게 해줬으니까.
그렇기에.
그토록 갈망하던 ‘매의 부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니.
‘여기서 남은 ‘날개’와 ‘발톱’, 그리고 ‘눈’까지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첫걸음이 어려울 뿐이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까지도.
‘그런다면 정말 ‘사자의 송곳니’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자의 송곳니.
‘매’를 뛰어넘어 진짜 ‘사자’에 다다르는 것만이,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것만이 그와 의형제들이 바라고 바라던 갈망(渴望)이었으며 비원(悲願)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헤르만은 더더욱 확신을 느꼈다.
그런 사자의 송곳니를 얻는 데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존재가 엘릭이라는 것을.
‘대체 지난 나흘 동안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헤르만은 엘릭을 따라 감도는 날카로운 바람과 차가운 한기를 느끼면서 그가 새로운 벽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그건 단순히 엘릭이 몰고 다니는 한파 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가 은연중에 흘린 기도가 자신의 호승심을 미약하게나마 자극한 것일까.
그건 당장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엘릭은 계속 강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것.
화아아!
그때, 엘릭이 헤르만의 등에다 손을 가져다 대더니 마력을 불어넣었다.
헤르만은 순간 움찔거렸다. 보통 이럴 때 종류가 전혀 다른 마력이 들어올 때 자칫 내상을 잘못 입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엘릭이 부여한 마력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마치 따스한 봄바람처럼 체내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피로를 내쫓고 활력을 불어넣었다.
마투술의 마력 순환법을 응용한 회복이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바깥이 여전히 소란스러운 것 같아서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헤르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릭은 감사하다고 눈인사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 신전으로 향했다.
[엘릭이다!]
[엘릭이 돌아왔어!]
[나도 갈래!]
[나도!]
[같이 가!]
겨울꽃의 신들이 쪼르르 따라왔다.
특히 수선의 신은 엘릭이 돌아온 게 너무 반가웠던지 그의 주변을 쉴 새 없이 계속 뱅글뱅글 맴돌았다.
[동백이도 있어!]
[동백아, 괜찮아?]
[괜찮은 거야?]
[이제 안 졸려?]
여전히 엘릭의 어깨에 앉아있던 동백의 신은 딱 보기에도 저기압이라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 명씩 말씀하세요! 너무 시끄럽게 떠드니까, 뭐라고 하는지 본 녀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요!]
[괜찮아?]
[괜찮은 거지?]
[다친 데 없어?]
[동백이 한 사람씩 말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내가 먼저 말했어!]
[아냐! 내가 말할 차례였어!]
동백의 신은 여전히 달라진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겨울꽃의 신들을 보면서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그래. 천 년이 넘도록 달라지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신들한테 대체 뭘 바랄 수가 있을까.
아이들일 뿐이니 아량이 넓은 자신이 이해해주고 보듬어줘야지, 어쩌겠어.
어쩌면 이것이 팔한과 파로스를 떠나보내고, 꽃의 신으로 다시 태어난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벅.
저벅.
동백의 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릭은 어느새 중앙 신전의 복도 끄트머리에 다다라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츠츠츠-
흉성의 인장이 다시 요요한 빛깔을 뿌려대면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맛난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바라센의 사체를 금세 먹어치우고 천천히 바깥으로 같이 움직였다.
다른 먹잇감들을 찾기 위해.
벌컥!
문을 열어젖힌 너머의 광경으로,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활활 타오르는 화마와 한창 격전 중인 적들이 보였다.
화아아-
엘릭은 냉혹의 인장과 삭풍의 인장을 동시에 발동시키면서 소리쳤다.
“【그쳐라】-!”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신전의 영역을 따라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데는.
휘휘휘휘!
휘이이잉-
한파가 불어닥쳤다. 얼음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화마를 단숨에 잠재우고, 적으로 감지된 이들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꽁꽁 얼렸다.
“이, 이게 무슨!”
“무, 무, 뭐지? 분명히 저기엔 군주님이 들어가셨… 컥!”
그들은 설마 바라센이 당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지, 우왕좌왕하다가 곧 푸른 매와 헤이즈 등의 반격에 줄줄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후, 후퇴해!”
결국 퓨리의 별동대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판단 아래, 재빨리 퇴각을 시도하려 했지만.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여도, 나갈 때는 아니란다. 【솟아라】.”
엘릭은 전혀 그렇게 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허공에다 가볍게 손가락을 짚었다.
손끝에서 물결무늬가 허공을 따라 잔잔하게 퍼져 나가고, 결이 출렁이면서 마력장이 크게 비틀렸다.
쿠쿠쿠…!
동시에 지면이 들썩이면서 신전의 정문 쪽으로 달아나던 별동대 앞으로 커다란 얼음벽이 치솟아 길을 가로막았다.
“이, 이건 뭐야!”
“젠장!”
별동대의 투사들은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치우기 위해 마력을 있는 힘껏 쥐어짜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콰콰쾅!
쩌저적-
덕분에 깨져나간 얼음벽도 있었지만.
문제는 처음부터 워낙에 너무 두껍게 만든 나머지 금이 가는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것을 그들이 재차 부수려 해도, 한파가 불어닥치고 있는 까닭에 금이 금세 메워지면서 헛수고가 되어버렸다는 점이었다.
애당초 엘릭은 처음부터 무리해서 얼음벽을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깨지면 깨지는 대로 내버려 두어도, 주변 환경을 유리하게 만들어두면 얼마든지 복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빠른 수복.
엘릭이 동장군과의 전투를 통해 터득한 싸움 방식이었다.
아주 사소한 변화지만, 결과의 차이는 컸다.
“아아악!”
“치워! 치우란 말이야!”
“【꿰뚫어라】.”
엘릭은 혼란스러워하는 놈들에게 차디찬 냉소를 흘리면서 얼음 화살을 무더기로 소환해 그대로 떨어뜨렸다.
하나같이 웬만한 장정 팔뚝보다도 훨씬 두껍고 끝이 뾰족한 화살들.
거기다 끄트머리에 빙독까지 섞여 있으니.
부딪치는 족족 손발이 떨어져 나가고, 상처 부위에서는 동상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면서 피해자들의 비명과 절규가 신전을 가득 채우는 것은 금방이었다.
“와우! 조카사위가 너무 무서워졌는데?”
“이러다가 우리 중에 몇 명도 밀리는 거 아냐?”
푸른 매는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별동대를 빠른 속도로 제거해나갔다.
스걱!
결국 마지막 남은 별동대원의 머리통이 떨어지자, 신전을 가득 메우던 한파도 금세 뚝 그쳤다.
“허! 대단… 하군.”
헤르만은 숨을 고르고 천천히 중앙 신전을 나왔다가, 성역의 전 영역에 걸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별동대를 처치한 것도 처치한 것이지만,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탁 트이게 만드는 경관.
[와, 예뻐!]
[눈이다, 눈!]
[하얘! 와!]
[도화지 같아!]
[눈꽃이다! 눈꽃도 있어!]
겨울꽃의 신들은 침입자들 때문에 힘들어했던 걸 금세 잊어버리기라도 했던지, 새하얀 설원을 보면서 ‘와! 와!’ 신나게 만세를 불렀다.
특히 수선의 신은 앙상하게 메말라 있던 나뭇가지의 끝에 맺힌 눈꽃을 보면서 눈을 반짝이기까지 했다.
결정들이 아름답게 곳곳에 맺혀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수많은 꽃이 만개한 것처럼 보였으니.
이곳 꽃의 신전에서는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광경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꽃의 신들을 즐겁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이들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
엘릭은 숙소의 지붕에 앉아 여태 이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오거스틴과 눈이 마주칠 수 있었다.
오거스틴은 웃고 있었다.
마치 기특한 손자라도 본 것처럼.
휘이이!
그 순간.
어디선가 향긋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 * *
“여기에 꽃향기를 담을 겁니다.”
별동대의 사체와 화마의 흔적을 전부 정리한 뒤.
엘릭은 겨울꽃의 신들을 비롯해 모든 일행을 모은 자리에서 빙정을 꺼내며 그렇게 말했다.
“꽃향기?”
“그걸로 뭘 하려는 거야?”
길리티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빙정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헤이즈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동백의 신을 포함한 겨울꽃의 신들은 모두 엘릭의 말뜻을 눈치챈 상태였다.
[다른 꽃의 씨앗들도 본 녀와 같은 방식으로 깨우려는 거군요.]
동백의 신이 눈을 반짝이면서 한 말에 겨울꽃의 신들이 일제히 만세삼창을 외쳤다.
[와와! 진짜? 정말이야?
[그럼 이제 우리 전부 다 만날 수 있는 거야?]
[폴리아도?]
[시클라멘도?]
[패랭이도 만날 수 있는 거지? 응응?]
[페퍼민트도?]
[라벤더도 볼 수 있다! 만세!]
다른 겨울꽃들에 이어 봄, 여름, 가을의 꽃들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빙정을 사용해 잠든 씨앗들의 한기를 전부 빼낼 수 있다면, 옛날처럼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놀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뇨. 그건 아니에요.]
동백의 신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자, 겨울꽃의 신들이 전부 울상이 되고 말았다.
[왜?]
[왜 안 되는 거야!]
[그릇에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한계?]
[한계가 뭐야?]
[빙정이 담을 수 있는 한기에는 한계가 있단 뜻이랍니다.]
동백 신의 입가에 씁쓸함이 맺혔다.
[그리고 설사 된다고 해도 동장군을 치우는 게 아닌 한 금세 다시 잠들지 않을까요? 그러니 가장 중요한 건 빨리 겨울을 물리치고, 봄을 가져오는 것밖에는 없어요.]
[그럼 어떻게 꽃향기를 담을 거야?]
[누굴 깨울 거야?]
“우선 겨울꽃부터 전부 깨울 겁니다.”
이번에는 엘릭이 대신 대답하고 나섰다.
겨울꽃의 신들이 일제히 엘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엘릭은 빙정을 들어 보였다.
“여기에는 동백꽃의 향기가 담겼습니다.”
동백꽃만이 아니었다. 안배를 거쳐오면서 찬바람을 비롯한 쌀쌀하고 쓸쓸한 많은 것들이 담겼다.
하나같이 머나먼 과거에 화원에서 잠들고 말았던 ‘여왕’을 구성하던 요소들.
“똑같은 방식으로 여러분들을 포함해 다른 겨울꽃의 향기들을 모두 담아 빙정을 ‘얼음꽃’으로 틔울 수 있다면….”
엘릭의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끝내 동장군도 여기에 강제로 담아서 ‘봄’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왕이 눈을 감으면서 흑의 설원 곳곳에 흩뿌렸던 모든 것들을 이곳에 담는다. 그것이 바로 ‘겨울’을 이룰 마지막 요소일지니. 엘릭은 그런 빙정을 ‘얼음꽃’이라고 불렀다.
그런다면.
자연스레 잊힌 ‘봄’도 되돌아올 터였다.
얼음꽃이 진 자리에는 항상 봄의 따스한 봄바람과 봄꽃 향기가 찾아오는 법이니까.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