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얼음꽃
그 순간,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방금 전에 율호왕도 잡지 못한 게 동장군이라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오토 한은 그게 무슨 문제가 있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만?”
“조부님도 실패하셨기 때문에 업데이트를 하신 거라고 하셨구요.”
“그랬지.”
“근데 그런 동장군을 저더러 잡으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만?”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40년 전의 우스던 메르빙거라면 한창 ‘별의 마도사’로서 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잡지 못한 게 동장군이라면, 당장 엘릭이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엘릭이 판단했을 때, 자신의 현재 실력은 상급 마도사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그것만 해도 그의 나이와 본격적으로 마도 입문 시기를 고려해본다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동장군에 비빌 바는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오토 한이 웃는 미소가 너무 불길해 보였다.
“음? 그거야 고생은 네 몫이지, 내 몫은 아니지 않느냐.”
“…!”
엘릭은 순간 목 언저리까지 치밀어 오른 욕지기를 참느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순간, 오토 한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방금 속으로 욕했군.”
“안 했습니…!”
“그럼 고생하고 오너라.”
그 말을 끝으로.
퍽!
엘릭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제기랄! 또 이 짓이야! 좀 정상적인 방법으로 보내 달라고! 아니, 그보다 다음 안배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힌트라도 줘야 할 것 아냐!
엘릭은 그런 말들을 내뱉고 싶었지만, 입가를 맴돌다가 허망하게 흩어져 사라졌다.
* * *
한편, 현실에서는.
콰콰콰!
헤르만과 바라센의 충돌이 벌어질 때마다 부서진 대리석 조각이 위로 튀어 오르고, 튕겨 난 오러 조각 때문에 기둥에 매달려 있던 꽃의 조각상이 줄줄이 떨어졌다.
[안 돼!]
[신전 무너져!]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겨울꽃의 신들은 가뜩이나 옛 모습이 얼마 남지 않은 신전이 계속 망가지는 광경에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녀들을 더욱 애타게 만드는 건, 어느새 중앙 신전 부근까지 다가온 화마였다.
이대로 신전이 화마에 노출된다면… 잠들어있는 다른 꽃의 신들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불길을 잡기 위해 신력을 방출하고, 넝쿨도 불러 보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불길은 더 거칠게 활활 타올랐다.
[동백이!]
[동백이가 일어나야 하는데!]
[근데 동백이 같이 자고 있어!]
[어쩌지?]
[어쩌면 좋지?]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헤르만도 마찬가지였다.
‘하얀 밤… 노괴, 당신은 대체 뭘 하는 거요!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고 있는데!’
헤르만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아직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오거스틴을 떠올리면서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하나뿐인 제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도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트로모프 공성전 때도 그랬다.
전장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엘릭과 다르게, 그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지 않았나.
아무리 그와는 별 상관없는 일에 무심한 성격이라고 해도, 이건 정도가 너무 심각했다.
단순히 엘릭을 ‘시험한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관심한 게 아닌가?
하지만 그동안 엘릭을 싸고돌던 걸 봐서는 절대 그런 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러나 당장 헤르만에게 있어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이 작자를 빨리 옆으로 치워버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도…!’
바라센은 당장 헤르만이 꺾을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전성기 시절의 그라면 충분히 단칼에 목을 쳐버렸을 테지만, 그는 아직 몸을 회복 중일 뿐 힘이 다 돌아온 건 아니지 않은가.
특히 바라센의 싸움 방식은 여태 그가 겪었던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이전부터 느끼긴 했다지만, 수인족의 싸움 방식은 인간들보다 훨씬 저돌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가까웠으니.
그 때문에 정형화되고 올바른 검식(劍式)을 추구하는 헤르만으로서는 여러모로 낯설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여기서 ‘매의 부리’를 보인다면…?’
헤르만은 언젠가 자신에게 아주 큰 깨달음을 주었지만, 반대로 입마증이라는 절벽을 가져다주었던 비기(祕技)를 떠올렸다.
당장 이 육체로 펼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해도는 깊으니 어떻게든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안배에서 깨어나지 못한 엘릭을 위해서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던 그때.
‘웃는… 다?’
헤르만은 뒤늦게 바라센이 조급해하기는커녕 차갑게 웃고 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다 허리를 쭈뼛 세웠다. 한때는 예민했지만, 지금은 둔해진 감각 사이로 아주 은밀하게 파고드는 ‘고양이 걸음’이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사자가 왜 백수의 왕인지 아느냐? 강하면서도 절대 만용을 부리지 않고, 무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바라센의 말에 헤르만은 재빨리 마력을 세게 끌어올렸다.
쩌어어엉!
맑은 검명(劍鳴)이 울렸다.
동시에 칼끝에서부터 푸른 오러가 마치 새처럼 날개를 활짝 펼치며 사방으로 푸른 깃털이 흩날렸다.
끼에에엑-
검이 마치 매와 같은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바라센을 휩쓸어갔다.
매의 부리.
눈앞에 있는 작자를 빠르게 치워버리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 속에 품어두고만 있던 비기를 꺼낸 순간이었다.
쉬쉬쉬쉭!
* * *
흑묘족(黑猫族), 가타리니는 어둠을 틈타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엘릭이 있는 밀실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아주 쉽네, 쉬워.’
다른 별동대가 미끼가 되어주고, 여기에 바라센까지 자객인 ‘척’하면서 방해가 될 만한 인간 강자들은 골라내지 않았나.
덕분에 가타리니는 너무나 수월하게 엘릭 앞에 다다를 수 있었으니.
걸음걸이가 조용하고 기민한 흑묘족은 원래 태생적으로 암살자에 가까운 종족. 가타리니는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실력이 뛰어난 투사였다.
헤르만의 감각이 아무리 둔해졌다고 해도, 그것을 속이고 이렇게 엘릭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게 바로 그 증거였다.
“후후후.”
엘릭은 가부좌를 튼 채로 가만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한쪽 어깨에는 퓨리의 투사들조차 만나기가 그리 어렵다던 겨울꽃의 여왕, 동백의 신이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대체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죽으면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이잖아?’
정말 이렇게 너무 쉬워도 되는 것인가. 계속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호오! 너무 아름답게 빛나는 목걸이인데. 거기다 박혀 있는 보석들도 아주 비싸 보이고. 이건 수고비로 가져가야겠어.’
가타리니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묘인족답게 마도경식에 군침을 흘리면서 품에서 천천히 단검을 뽑았다.
화아아!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다이아몬드가 차례로 박혀 있는 ‘만(卍)’자 형태의 마도경식은 화려한 빛을 뿜어대고 있어서, 어느 누가 보더라도 눈이 멀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주 좋은 걸 선물해주니 아프지 않게, 아주 깔끔하게 보내줄게. 저기 가서 너무 고맙다며 눈물이나 흘리지 말라고.”
그렇게 가타리니의 단검이 엘릭의 목젖에 박히려는데.
“음?”
갑자기 마도경식을 감싸던 빛무리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으로 눈길을 주는데.
쩌저적!
“무, 뭐…!”
가타리니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단검에서부터 어깨까지, 오른팔 전체가 바짝 얼어붙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얼음을 털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밀실을 따라 찬바람이 크게 돌면서 빙독은 어느새 턱관절까지 다다라버렸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내뱉는 입김이 얼마 가지 못하고 얼어붙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가타리니는 흐릿한 시야로 멍청하게 앞을 볼 수밖에 없었고.
어느새 눈을 뜬 엘릭이 이쪽을 보면서 차갑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뭐긴 뭐야. 너 엿 된 거지.”
스스스!
엘릭을 둘러싼 그림자가 먹물처럼 바닥을 따라 퍼졌다.
“아까 네가 그랬지? 너무 고맙다며 눈물이나 흘리지 말라고.”
엘릭이 히죽 웃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아, 안 돼…! 가타리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림자는 어느새 벽면을 타고 올라와 흉악한 이빨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휼, 배고프지? 먹어.”
아가리가 한입에 가타리니를 꿀꺽 먹어치웠다.
콰드득, 콰드득!
아가리가 꿈틀거릴 때마다 살점과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아아아악. 어디선가 가타리니의 비명이 들린 것 같았지만, 금세 뚝 그쳤다.
츄릅.
아가리 사이로 검은 혓바닥이 튀어나오면서 입술을 핥았다.
이건 이것대로 나름 괜찮은 맛이로군.
“미친 놈.”
크크크! 이런 걸 던져준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흉성의 인장은 그런 웃음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림자가 다시 고스란히 엘릭에게로 돌아왔다.
“이 새끼는 어째 볼 때마다 더 포악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엘릭은 흉성의 인장을 보면서 툴툴거렸다.
안배를 한 번 거치고 왔더니, 휼의 사념은 이전보다 훨씬 또렷해져 있었다. 안배 속에서 강해진 건 냉혹의 인장과 삭풍의 인장만이 아니었다. 흉성의 인장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엘릭도 인장 마법에만 올인할 생각은 절대 없었지만.
『삭풍이로군.』
그리고 옆에 다가온 메피스토가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얼음에 이어 이제는 찬바람이라…. 여기다 눈이나 구름만 더 추가하면 딱 ‘겨울’이로군. 큭! 이렇게 허섭스레기들로 모아다가 저만한 걸 만드는 것도 참 재주란 말이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인간… 아니지, 이 마족은 내가 무슨 인장을 얻을 때마다 괜찮다고 한 적이 없단 말이지?’
엘릭이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메피스토가 팔짱을 낀 채로 콧방귀를 꼈다.
『무엇이냐? 불만이라 있나?』
엘릭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불쑥 두 사람 사이로 동백의 신이 몸을 일으켰다.
[불만? 당연히 있고말고요. 입에서 시궁창 냄새가 너무 지독하게 나니 옆으로 좀 치워주시겠어요?]
『시궁창? 말이면 다 될…!』
[냄새가 너무 심해서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어요. 이 좀 닦아주세요.]
메피스토가 또 발끈하며 길길이 날뛰는 사이.
엘릭은 괜히 둘 사이에 끼어봤자 정신만 사납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이란 말이지.’
메피스토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었던 말들. 그 속에서 엘릭은 오토 한이 말해주지 않았던 ‘겨울’의 남은 요소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빙정.’
엘릭의 눈이 반짝였다.
‘동백의 신을 얼어붙게 했던 한기를 흡수하니까 빙정이 변했었지. 눈의 결정과 비슷한 형태로.’
물론, 어디까지나 단순한 추론일 뿐이었지만.
엘릭은 절대 오토 한이나 조부님이 자신에게 불가능한 일을 맡길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안배에 해답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다른 씨앗들도 그런 방식으로 깨울 수 있다면…! 동장군까지도 가둘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눈’이라면.
거기까지 사고가 닿은 순간, 엘릭은 지체하지 않고 밀실의 문을 벌컥 열고 나섰다.
그곳에는.
푸화악!
목이 절반쯤 잘린 채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고 있는 모래 사자, 바라센이 서 있었다.
그를 멋들어지게 장식하던 갈기는 온통 피로 흠뻑 젖어있었고, 전신은 자잘한 상처로 가득해 흉측했다. 특히 한쪽 팔은 이미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으니.
그의 앞에는 헤르만이 살벌한 투기를 흘리면서 서 있었다.
파직, 파지직!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을 뿜어댄 건지, 발끝에서 오러의 파편이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너… 는… 인간 중에서도… 최고인… 가?”
바라센은 숨을 헐떡이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지탱했다. 자신이 살아날 가망성 따윈 전무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묻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인간이 수준은 얼마나 되는지.
그는 사자.
백수의 왕일지니.
인간 중에서도 최강자가 아니고서야, 평상시 하등 종족이라고 취급했던 인간에게 이렇게 허망하게 당한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가볍게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허튼소리. 검을 든 자들 중에서만 나와 견줄 자가 일곱이었고, 위로는 나를 한 칼에 베고도 남을 작자가 있었지. 마법, 신성, 흑마술… 그런 쪽으로 경계를 넓히면 최소 수십은 될 것이다.”
대마전쟁 이후, 제국의 국력은 하락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급상승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열린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으니.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대륙의 다른 국가들도 무력을 전면적으로 양성하면서 세계는 이미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열린 지 오래였다.
“왜… 이렇… 게 인… 간들은…!”
그 사실이 충격적이었기에, 바라센은 너무 놀란 나머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던 목의 상처가 더 크게 벌어지면서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데구르르-
모래 사자의 얼굴은 온통 고통과 절규로 가득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들의 위대한 왕이신 혈미왕께서 장벽 아래의 인간들을 쓸어버리실 것이란 믿음이 산산이 무너지면서 남은 비통함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