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얼음꽃
파바밧-
바라센은 불길을 가로지르면서 단숨에 중앙 신전에 다다랐다.
종족 특성상 후각이 예민한 그는 이미 엘릭의 마력향이 며칠 전에 중앙 신전에 닿았다는 것을 파악해둔 상태.
아니나 다를까.
수많은 조각상으로 채워진 복도를 가로질러 중앙부까지 다다르자, 그의 앞을 여러 꽃의 신들이 가로막았다.
[불청객!]
[왜 온 거야!]
[우린 너 부른 적 없어!]
[여긴 신의 터전이야!]
[불신자는 올 수 없어!]
겨울꽃의 신들은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아무리 쇠락하고 말았다고 해도 엄연히 신격을 이룬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로서는 감히 신전을 훼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들을 존경하고 숭배하기는커녕 위엄에 손상을 입히는 존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바라센 역시 메르빙거를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오긴 했다지만, 그래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반 수인들과 다를 바 없이 신을 깊이 공경하던 수인.
그는 겨울꽃의 신들이 조금이라도 화가 가라앉을 수 있도록 재빨리 예를 갖췄다.
“뜻하지 않게 신님들의 휴식을 방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번에 저지르게 된 불경죄는 자청하여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사라져!]
[사라져!]
[더 이상 들어오지 마!]
겨울꽃의 신들은 잔뜩 화를 냈지만, 바라센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저희 측에서 쫓는 공적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는 제보를 받았던지라, 부디 신님들의 이해와 아량을 바라겠습니다.”
[없어!]
[여긴 아무도 없어!]
[우리밖에 없어!]
“저희가 감히 신님들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신빙성 있는 제보인 터라.”
[안 돼!]
[신전은 허락 없이 함부로 못 뒤져!]
“죄송합니다.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라센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겨울꽃의 신들을 강제로 밀치고 중앙부로 들어섰다.
[안 되는데!]
[우리 없이 들어오면 안 되는데!]
겨울꽃의 신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백 년 전… 아니, 우스던 메르빙거가 찾아왔던 40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불청객쯤은 별반 어렵지 않게 내쫓을 수 있었을 텐데!
신전은 일종의 성역(聖域)이었고, 여기서 신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신격은 그야말로 모든 섭리를 지배하는 절대자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찾아오면서 꽃들이 하나둘씩 동면에 빠지고, 겨울꽃마저도 대부분 시들어버린 지금.
방문하는 신도들도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신성도 바닥이 난 그들은 이제 한낱 수인 한 명조차 막을 수 없을 만큼 약해져 버린 상태였다.
[동백도 아직 안 깼는데!]
[진짜 어쩌지?]
더 큰 문제는 그들의 리더라 할 수 있는 동백의 신도 엘릭의 안배를 도와주기 위해서 잠시 부재중이라는 점이었다.
엘릭은 현재 중앙 신전의 옆에 위치한 작은 밀실에서 메르빙거의 안배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
동백의 신은 분명히 그들에게 신신당부했었다.
안배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절대 외부의 방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해하셨나요? 만약 심상 세계가 망가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메르빙거의 후손도, 저도 똑같이 그곳에 갇힐 수 있답니다. 부디 방해꾼들이 없게 여러분들이 막아주셔야 해요.
어째서 심상 세계에 갇힌다는 건지 이해를 한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 바라센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휘휘휘!
대리석 바닥을 뚫고 꽃의 넝쿨이 튀어나와 바라센의 발목을 잡아갔다. 하늘에서부터 꽃잎이 떨어지면서 시야를 가득 가렸다.
하지만.
촤촤촤촤-
바라센은 손톱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면서 넝쿨을 자르고, 꽃잎을 갈랐다.
“이런 것으로는 저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어찌 모르십니까!”
그의 종족은 사사족(沙獅族).
‘사사’란, ‘모래 사자’라는 뜻으로, 원래 사막 지대를 터전으로 살아가던 종족이었다.
수인족 내 종족 서열만 따지자면 한때 호왕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던 명문이었으니.
비록 지금은 혈미왕과 영호족에게 충성을 바치고는 있다지만, 그는 자신의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대단했다.
사자의 걸음을 이깟 풀떼기 따위로 막으려 하다니.
사실 코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물며 그는 퓨리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투사.
이런 것에 발목이 잡혀서야 어찌 군주를 자처할 수 있을까!
[이이잇!]
[거기 서!]
하지만 그럴수록 꽃의 신들이 가지는 초조함만 커져서 어떻게든 붙잡아보려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바라센은 자신의 예측에 확신이 생겼다.
“킁킁! 분명히 냄새는 이쪽으로 이어지는데…! 저긴가?”
바라센은 코끝을 씰룩이다 말고, 중앙부로 연결되는 다른 통로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아, 안 돼!]
겨울꽃의 신, 특히 수선의 신이 다급하게 그쪽으로 날갯짓을 하려는데,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또르르!
[으아아아! 어지러어어!]
수선의 신은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고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돌다 말고,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면서 바라센이 있는 쪽을 재빨리 봤다.
매서운 바람이 닿은 곳.
헤르만이 매서운 사자처럼 푸른 오러를 뽑아 올리면서 바라센과 충돌하고 있었다.
콰르르릉-
“안트로모프에서 봤던 그 귀찮은 인간이로군. 꺼져라!”
바라센은 공성전 때 수하들이 큰 피해를 보았던 것을 떠올리고, 재빨리 수화(獸化)를 전개했다. 덩치가 2미터 넘게 커지고, 목 주변으로 갈기가 길게 자라났다.
어흐응!
발톱을 길게 뽑으면서 헤르만을 옆으로 밀쳐내려 했지만, 헤르만은 일절 꿈쩍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밀어내기까지 했다.
모래 사자와 청사자.
두 사자가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 * *
바로 그 시각.
엘릭은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여전히 안배의 후반부를 진행하고 있었다.
콰쾅, 콰콰쾅-
쿠쿠쿠쿠!
율호왕이 압도적으로 동장군을 몰아붙이고, 엘릭이 계속 옆에서 보좌하는 전투.
둘의 연수 합격은 정말이지 자로 잰 듯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럴 때마다 동장군은 계속 손발이 부서지면서 한없이 튕겨 나갔다.
엘릭의 강체술도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해졌다. 율호왕도 엘릭이 가진 ‘미래’의 강체술을 보면서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돼.’
엘릭은 언제부턴가 승기가 어쩌면 저쪽으로 넘어갈지도 모르겠다는 위협을 받고 있었다.
[동장군을 너무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에요.]
동백의 신은 이번에도 그런 엘릭의 생각을 읽은 듯,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찌 되었건 간에 저것은 본 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홀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념(邪念)이란 사념을 계속 쌓아대고, 악의란 악의는 계속 끌어모았던 것이니까.]
동장군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언제부턴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이제는 정말 별개라고 치부하는 것일까.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엘릭은 동백 신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강해지고 있어.’
동장군은 도대체가 무한한 마력이라도 품고 있는 건지, 부서져도 계속 재생을 해대는 판국이니 도무지 끝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재생한 부위는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지고, 단순했던 동작도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정교해져만 갔다.
지금도 마찬가지.
츠츠츠-
분명히 몸뚱이의 절반이 날아갔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불어오는 눈발에 몸이 빠른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동작도 훨씬 이전보다 민첩했다.
겉보기엔 헝겊 인형처럼 보이는 이 녀석이, 학습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뜻.
“…이러면 나가린데.”
그때, 율호왕이 어이없다는 투로 동장군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 엘릭을 홱 하고 돌아봤다.
“안 되겠지?”
“…예. 아마도요.”
엘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놈들도 지쳐가는 게 보이고.”
동장군만 상대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동장군이 부리는 얼음 괴물들까지 계속 숫자가 불어나면서 탐사대가 점차 위험해지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상자도 속출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애당초 우리 목표야 정확하게 이 빌어먹을 동장군이 뭔지만 알아내면 되는 것이었으니, 임무는 완수한 셈이긴 하겠지만.”
율호왕은 미간을 팍 찡그렸다.
“저 빌어먹을 새끼들이 우리를 순순히 놔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쯧! 어쩔 수 없네. 야.”
“안 합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꼭 직접 말씀하셔야 압니까? 딱 들으면 알지.”
“누가 보면 관심법이라도 부리는 줄 알겠다?”
율호왕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엘릭을 바라봤지만, 엘릭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율호왕은 지금 자신이 남아 시간을 끄는 사이, 엘릭더러 탐사대를 이끌고 이곳을 탈출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 혼자라면 모를까, 이대로 있다간 탐사대는 전멸하게 생겼으니. 그들을 잃어서야 수인족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릭으로서는 들을 가치도 없는 작전이었다.
율호왕을 버리라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된단 말인가?
하지만.
율호왕은 이내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탐사대, 데리고 떠나. 저놈들을 무사히 끌고 탈출할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서는 너밖에 없다.”
“제 말을 듣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남겠습니다. 족장이 데리고 가십시오.”
엘릭으로서는 이게 당연한 거였다.
이곳은 안배 속이었고, 이번 회차도 만약 실패한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동장군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결국 안배의 최종 난관은 바로 동장군일 테니까.
하지만.
“요결 값, 해야지?”
“….”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데,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율호왕이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면서 주먹을 쓱 들어 올렸다.
“싫으면 여기서 항명죄로 바닥에 눕는 수도 있는데. 뭐 할래?”
“…젠장! 할게요! 하면 되잖습니까!”
아무 소득도 없이 회차를 새로 반복하는 것보단 낫겠지.
엘릭은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래도 금방 돌아올 겁니다. 그사이에 뒈지지나 마십쇼.”
“흥! 뒈진다고? 누가?”
율호왕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엘릭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직감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번 회차가 슬슬 마지막에 다다른 것 같다는 느낌.
‘어쩌면 이 사람을 보게 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네.’
물론, 회차를 반복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번’ 율호왕은 그러지 못할 거란 사실이 엘릭으로서는 씁쓸하게 다가왔다.
자신을 가장 많이 배려해주고 친근하게 다가와 준 사람이었으니.
안트로모프의 다른 수인들도 마찬가지.
랄프를 비롯한 똥개 4인방이며 여러 부족원 모두가 알게 모르게 그동안 엘릭에게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엘릭은 조금 속이 쓰리면서도,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했다.
비록 자신이 죽으면 새롭게 시작될 가상 세계라고는 하나, 그들이 허망하게 이런 설원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위해서라도, 탐사대를 안트로모프까지 탈출시키고 난 뒤에 어떻게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럼 갑니다.”
“그래. 잔말 말고 어서 가.”
율호왕은 등지고 돌아서는 엘릭을 배웅하면서 재차 동장군에게로 달려들었다.
엘릭이 목소리에 마력을 잔뜩 쏟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후퇴! 탐사대는 전원 안트로모프까지 후퇴한다!”
* * *
엘릭은 탐사대를 이끌고, 가까스로 동장군의 영역을 탈출할 수 있었다.
얼음 괴물들이 끝까지 따라붙으려 했지만, 율호왕의 계속된 제지와 엘릭의 마법으로 어떻게든 그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헉, 헉… 살았나?”
“젠장… 죽는 줄 알았네.”
“대체 그 괴물들은 뭐야…? 그것들, 전부 이길 수 있을까?”
탐사대원들은 겨우 살아남았단 사실에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로는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만들던 동장군. 그것이 곧 안트로모프까지 밀고 들어온다면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막막하게만 다가왔다.
한편.
랄프를 비롯한 똥개 4인방은 조급한 표정으로 엘릭에게 다가왔다.
“엘릭, 어서 족장을 구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
“같이 가자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네가 처음 보여줬던 그 마법, 우리에게도 가르쳐줘!”
친위대는 당장 다시 동장군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안트로모프 내 투사란 투사는 모두 동원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엘릭? 엘릭!”
하지만 엘릭은 좀처럼 랄프의 애타는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
지난 100일 동안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던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치 핏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아주 선명한 새빨간 꽃을.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