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얼음꽃
청사자 헤르만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자꾸만 자신 앞에서 우왕좌왕하기 바쁜 딸을 어색하게 바라봤다.
“딸아, 이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단다. 그러니 조금 진정하는 게 어떻겠느냐?”
“….”
하지만 이사벨은 아무 대답 없이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무언가를 고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헤르만은 몇 번이나 내뱉었는지 모를 한숨을 다시 내뱉어야만 했다.
“우리 조카님,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자기 아버지가 입마증에 빠져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던 아이가 저런 모습이라니. 사람이 뭔가에 깊게 빠지면 저렇게 되나 봐?”
“저러니 자식 아무리 키워봤자 정 주면 안 된다고 하지.”
다른 5명의 의형제들, 푸른 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진짜 벌써 며칠째지?”
“나흘 정도 되지 않았나?”
“참 오래도 박혀 있었구만. 나 같았으면 진짜 좀이 쑤실 것 같은데. 진짜 대체 그 ‘신탁’이라는 게 뭐기에 이렇게 오래 박혀 있는 거지?”
푸른 매는 하나 같이 창밖으로 보이는 중앙 신전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엘릭이 말없이 중앙 신전으로 홀로 들어가고 나오지 않은 지 나흘째.
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신탁(神託)을 치르는 중입니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답변이 전부였다.
꽃의 신전에 관련된 엘릭의 개인적인 용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동행 조건이었기에 여태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길어지다 보니, 푸른 매는 약속을 어기는 게 되더라도 신전의 문을 강제로 열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동안 식량이며 식수조차도 들어가는 걸 보지 못했으니까.
꽃의 신들이 머문다는 곳에 사람을 위한 식량이 비축되어 있을 리 없으니 분명 엘릭은 그동안 굶었을 게 분명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신체 조절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초인이라 하여도 식수 없이 1주일 이상을 버티는 건 아주 힘들다.
하물며 아직 마도사 급, 혹은 그 아래로 판단되는 엘릭이라면 나흘 이상을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사벨이 손톱을 질겅질겅 물어뜯으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헤르만과 푸른 매는 이사벨이 원한다면 즉각 나설 용의도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저쪽이 아무 반응도 없는 데서야, 우리가 나서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지.”
“흠! 그게 또 문제란 말이지.”
둘째 라셀의 말에 다른 의형제들도 모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거스틴 등이 있을 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신들이야 타인이라 치더라도, 이해 당사자인 저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태 가만히 있기만 했다.
특히 혈육이라던 헤이즈 메르빙거는 푸른 매의 우려를 단칼에 잘라버렸으니.
-본 가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중입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번 일은 오거스틴 님께도 개입하시지 말라 말씀드렸으니 자중해주시기 바랄게요.
헤이즈는 단아하고 청순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오히려 가문의 일에 이 이상 끼어드는 것은 탐탁지 않다는 눈치마저 주었으니.
결국 이사벨과 푸른 매가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기로 결심한 것도 전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말 조카사위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하얀 밤과 야수왕… 그 두 미친 영감탱이들이 벌써 몇 번이나 뒤집어 놨을 테니까 계속 지켜보자고.”
결국 일행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저마다 병장기는 손에 꽉 쥐고 있었다.
* * *
도시국가, ‘퓨리’.
제2군 군영소(軍營所).
퓨리가 자랑하는 위대한 투사였지만, 정작 안트로모프를 정복하지는 못했다는 불명예를 안고야 말았던 수인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신전을… 말씀이십니까?”
그들은 군주(軍主)가 방금 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을 믿는 수인들에게 있어, 신전을 불태워버리겠다는 군주의 선언은 아주 끔찍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아예 놀란 나머지 물을 마시다 말고 딸꾹질까지 해댈 정도였다.
하지만 말을 꺼낸 바라센의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하기 싫다면 빠져도 좋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다른 제재는 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약속하지.”
“….”
“….”
투사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기 바빴다.
그들 역시 안트로모프를 정복하지 못한 채로 물러난 것에 내심 적잖게 불만을 품고 있었고, 하루라도 빨리 재공략하라는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에 그들을 가로막았던 인간 무리를 해친다고 해도, 신전을 직접 부순다는 건 그들로서도 상당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하늘, 그들이 ‘텡그리’라고 부르는 천신 숭배 사상은 수인족의 문화 곳곳에 깊숙하게 남아있었다. 때문에 어느 지성체들보다도 미신과 점복을 가장 크게 믿었고, 신을 해친다는 건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꽃의 신전은 대대로 모든 수인 부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던 곳.
안트로모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퓨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곳을 해치겠다니.
아무리 동장군 때문에 문이 굳게 닫혔다고 해도, 그들은 내심 조금 전에 들었던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제재도 하지 않겠다는 저 말을 덜컥 믿고 그러겠다고 말한다면….’
‘나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먹히고 말겠지.’
‘위대한 혈미왕의 간식거리가 되고 말 거야.’
그들은 자신들의 군주가 어떤 존재인지, 바라센이 저런 말을 꺼냈을 때는 군주와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내뺀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 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바라센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그래. 너희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줄 알았다.”
“다만, 이 일을 완수한 후에 저희가 짊어져야 하는 정치적 책임감이 너무 큽니다. 부디 마지막까지 비밀로 안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연하지. 나도 너희들을 수렁으로 빠뜨리고 싶지 않다.”
투사들은 그제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들의 군주는 잔혹할지언정, 그래도 한 번 내뱉은 약속을 절대 어기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수하가 용기를 갖고 던진 질문에.
바라센은 아주 당연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밤.”
* * *
바라센의 명령에 따라, 제2군에서 조직된 별동대는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동장군의 설풍은 시야를 계속 가렸지만, 다행히 ‘꼬리의 가호’가 주는 보호가 있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꽃의 신전이 있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신호가 떨어지는 즉시 방화를 개시한다.]
바라센이 은밀하게 명령에 별동대원들은 하나 같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리 알려주었던 대로, 몰래 잠입하여 혼란을 유도하고 암살을 시도한다고 하여도, 절대 다른 인간들과 부딪치지 마라.]
대원들은 이왕에 신전을 불 지르는 김에 왜 학살은 저지르지 말라고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이었지만, 몇몇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트로모프 공성전 때 활약했던 인간 중에는 바라센으로서도 승부를 장담하기가 어렵거나, 도저히 깊이를 측정하기가 힘들었던 마법사들도 있었으니.
다행히 대원들은 자신들이 반드시 처치해야 하는 두 명은 헷갈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 명은 벨렌체 왕.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금발에 녹안을 가진 마법사.
공성전 때 그들을 숱하게 괴롭혔던 인간이었으니, 얼굴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움직여!]
팟!
파밧!
그렇게 대원들이 각자 배정받은 위치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동안.
파아아!
부서진 대리석 기둥이 있는 자리로 ‘문’이 강제로 열리기 시작했다.
퓨리, 정확하게는 혈미왕이 가지고 있는 ‘권능’을 활용한 강제 개방이었으니…!
화르륵!
그 순간, 혈미왕이 내어준 ‘숨결’이 불길이 되면서 단숨에 문 너머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콰콰콰-
쿠쿠쿠!
가뜩이나 습기 없이 메말라 있어 화마는 단숨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나갔다.
* * *
댕댕댕댕-!
“이게 무슨 소리야?”
“불? 불 난 거 같은데?”
푸른 매는 신전을 울리는 경종 소리에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몇몇은 창밖을 보다가 화마가 치솟는 걸 보고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방문객 하나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불이 일어났다고?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헤르만과 이사벨도 눈이 마주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다급히 의논을 나누려는데.
갑자기 그들이 있던 객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조경사가 다급하게 안쪽으로 뛰어왔다.
“침입자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침입자? 신전을 공격한 무리가 있단 말씀이신가요?”
이사벨의 질문에 조경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는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놀란 건, 이사벨 등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에서 신전을 공격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간주 되어 천벌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신적인 존재가 직접 벼락이라도 내려준다는 게 아니라, 직접 피해를 본 신전을 포함한 신교 동맹에 포함된 모든 종교가 가해자와 그가 소속된 조직에게까지 공세를 퍼붓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종교의 권위가 살아난다나?
‘십자군’이라는 기치 아래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그들은 사면령을 내리기 때문에 결과는 항상 끔찍하게 종결되기로 유명했다.
사자공가와 마탑이 신교 동맹이 하는 행위들을 아니꼽게 여기면서도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 게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민중에게 종교가 가지는 무게감을 고려해본다면 함부로 건드리기가 어려운 편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수인족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을 것이다.
아니, 이사벨은 더 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인족은 전쟁에 나서기 전에 아직도 점성술로 승패를 미리 점쳐본다는 관습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했으니까.
‘그런데도 건드렸다는 건, 꽃의 신전이 휴지기를 가질 만큼 쇠락했으니 별 탈이 없다고 여긴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그만한 정치적인 압박을 감내할 만큼 이번 임무가 중요하다고 여겼거나.
‘그럼 습격자들은 퓨리 쪽 인사들일 가능성이 크고… 그들이 노릴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벨렌체 왕?’
이사벨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콰아아앙!
갑자기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면서 건물이 통째로 흔들렸다.
부서진 천장 잔해 사이로.
야수왕 길리티가 짜증을 내면서 앞으로 튀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감히 누굴 건드려!”
콰콰콰콰!
퍼퍼퍼펑-
동시에 헤이즈와 션, 카를 등도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으니.
기습을 가한 퓨리 측 인사들의 숫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기세도 제법 사나워서 당장 꽃의 신전이며 일행들까지 전부 죽일 듯이 보였으니.
“저것들, 더 이상 살기 싫어서 집단 자살이라도 하러 왔나?”
하지만 정작 위기에 노출된 푸른 매는 하나 같이 태연자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퓨리가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저들의 수장이라는 혈미왕이 직접 오지 않고서야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길리티는 물론이거니와, 저쪽에는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인 ‘하얀 밤’이 있지 않은가!
단순히 의지를 가진 것만으로도, 새카만 밤을 물리칠 만큼 뛰어난 이적을 발휘할 수 있다던 그가 나선다면 사실 저들을 물리치는 것쯤이야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정작 본인은 제3자로서 웬만해서는 세상사를 구경하고 싶어 하지, 직접 개입하고 싶지는 않은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일단 피해가 커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후딱 끝내도록 하죠?”
그렇게 푸른 매가 하나둘씩 일어나 침입자들을 막으러 가려는데.
“위험해요!”
이사벨이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셋째인 하만이 피식 웃었다.
“응? 아, 조카님은 우리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드려서 잘 모르겠구나. 이것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게 아니라, 엘릭이 위험하다구요!”
“…!”
“…!”
“…!”
푸른 매도 그제야 이사벨의 말뜻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저들은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미끼라구요! 정황상 저들이 노리는 건…!”
파앗!
그 순간, 여태껏 가만히 있던 헤르만이 다급하게 중앙 신전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