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동장군
동장군은 마치 시커먼 누더기로 잔뜩 기운 헝겊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눈으로 생각되는 부분은 흐리멍덩했고 풍기는 기질도 하나 같이 악의적이었다.
특히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냉풍과 눈발은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이대로 얼어붙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했으니.
퍼퍼퍼펑!
그런 면에서 동장군과 직접 맞부딪치는 율호왕의 신위는 보면 볼수록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젠장! 뭐가 이렇게 단단해! 겁나게 안 깨지네!”
율호왕은 주먹을 휘두르는 족족, 발톱을 내려치는 족족, 부서지기는커녕 얼음 가루만 날리고 강풍을 채찍처럼 후려치는 동장군의 반격에 짜증이 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를 따라 어둠을 물리치고 나온 다른 투사들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워낙에 일정한 흐름 없이 중구난방으로 뿌려지는 설풍이 너무 거센 데다가, 율호왕이 움직이는 반경이 생각보다 너무 넓어 오히려 그의 움직임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었다.
아니, 사실 그들도 바빴다.
“제기랄! 대체 저건 뭐야!”
“눈발을 따라 별 이상한 것들이 나타난다더니… 아무래도 저거 얘기인 것 같은데?”
동장군이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갖가지 기괴한 형태를 자랑하는 마물들이 걸어왔다.
하나 같이 동장군처럼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입을 제외한 이목구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얼음 괴물.
키아아악!
크륵!
크아아!
그것들은 기괴한 울음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수인족들에게 달려들었다. 투사들은 저것이 피난민들이 말했던 ‘눈 속의 괴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놈들을 막아서는 데 집중했으니.
콰콰쾅!
퍼퍼펑-
그것은 마치 어디선가 옛날 그림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가르고】, 또 【갈라라】!”
엘릭은 삭풍의 인장에다 있는 힘껏 마력을 쏟아부으면서 칼바람의 날을 잔뜩 세웠다.
마치 잘 벼린 명검처럼 날카로워진 칼날은 잇달아 얼음 괴물을 두들겼다.
처음에는 워낙에 단단한 내구도를 자랑하고 있어 잠시 움찔하고 밀려나는 것이 전부였지만, 결을 따라 같은 지점에만 연거푸 칼바람이 작렬하니 결국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속출했다.
“허!”
“이게… 마법이라고?”
엘릭은 투사들의 탄식을 뒤로 하고, 바로 그런 괴물들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한창 격전이 치열해지고 있던 율호왕과 동장군 사이로 난입했다.
강체술.
흑호좌동 – 경(勁).
콰아아앙!
엘릭은 심안이 가르쳐준 대로 동장군의 좌측 다리 밑에 있던 결의 응집 지점을 가격했다.
마치 망치로 거세게 후려갈긴 것처럼 동장군의 다리 부근에 주먹 자국이 남으면서 균열이 주변으로 퍼졌고.
강체술.
맹호출현 – 파(波).
엘릭은 거기서 그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반 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면서 왼손으로 녀석의 몸뚱이를 후려갈겼다.
다섯 개의 손톱이 마치 맹수의 발톱처럼 균열을 휘젓고 지나가면서 깊이를 한층 더 깊숙하게 만들었으니.
여기에 삭풍의 인장이 예기를 한껏 더하고, 흉성의 인장이 포악한 성질을 가미하니 파괴력이 대단했다.
콰콰콰!
결국 균열은 삽시간에 허벅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착!
마치 높이 뛰어올랐던 맹수가 지면에 착지하는 것처럼, 엘릭도 설원 위로 가볍게 안착했다.
“내가 가르쳐줬던 요결의 종장을 가미했군.”
바로 옆에 있던 율호왕이 재미난다는 듯한 얼굴로 엘릭을 바라봤다.
엘릭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배운 건 써먹어야죠. 안 그럼 어따 씁니까?”
“흐흐. 그래도 이렇게 쉽게 섞지는 못할 텐데. 줄곧 느꼈던 거지만, 너의 그 동작들은 마치 내 강체술이 가야 할 길을 미리 모방한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엘릭은 대답 없이 웃었다.
여기선 무슨 말을 해도 그는 믿지 않을 테니까.
“역시 꿍꿍이가 많은 놈이 분명해. 하여간 끼어드는 건 상관없지만, 방해는 하지 마라.”
“열심히 베끼겠습니다.”
“그것도 맘대로… 해!”
콰아앙!
율호왕이 지면을 세게 박차면서 다시 동장군에게로 달려들었다. 엘릭은 그가 앞서 나간 것이 자신에게 ‘진짜’ 제대로 된 강체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처음 가르쳐준 요결을 제대로 써먹으란 뜻이겠지.
엘릭은 율호왕을 쫓았다.
[필요조건이 조금씩 충족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제약의 해제가 이뤄지는 중입니다.]
그럴수록 품속의 석판도 시린 빛을 뿌려댔다.
* * *
“강체술이라는 건 원래 정형화된 초식이란 게 없다. 오로지 감각과 본능에만 집중해서 싸우는 방식을 추구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건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소리! 그래서는 때때로 쓸데없는 사념이 섞여서 동작에 간결함이 사라질 때가 많다.”
콰콰쾅!
율호왕은 동장군을 상대로 폭격(爆擊)을 맹렬하게 가하면서도, 입으로는 강체술에 대한 강론을 시작했다.
엘릭은 그를 도와서 동장군을 상대하랴, 율호왕의 동작을 쫓으랴, 그것을 동작에 섞어보랴 정신이 없었지만.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재미나게 느껴졌다. 춥기만 해야 할 바람이 왜 이토록 시원하게 느껴지는 건지.
“일정한 기본 틀을 갖추고, 거기에 무수히 많은 변수를 가미하여 적재적소에 맞는 초식을 펼쳐낸다면… 보다 효율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끌어낼 수가 있다. 장벽 아래에서 인간들이 우리 수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건 바로 그런 체계가 잘 잡혔기 때문이다!”
엘릭은 어쩐지 율호왕이 보이는 모습 하나하나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 사람은 왜 나에게 이토록 친절한 걸까? 아무리 ‘형제’라고 부른다고 해도, 같은 혈통도 아닌 나에게 이런 걸 가르쳐줄 이유는 전혀 없을 텐데.’
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달라붙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결들이 그를 중심으로 꺾이고 또 꺾이면서 괴이한 형태를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만든 강체술은 기본 형태인 전5식, 이것을 보좌하는 후3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요결이 따로 붙으면서 전8식을 다양한 형태로 응용시킬 수 있게 한다.”
쿠쿠쿠쿠!
율호왕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축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사냥에 나서는 범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으니. 그 앞에 오롯이 노출된 동장군은 마치 위태로운 인형으로만 보였다.
엘릭은 그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머릿속에 구겨 넣고자 했다.
비록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이미 형태를 조금씩 갖추기 시작한 율호왕의 강체술을 볼 때마다 엘릭의 동작도 보다 더 깔끔해지고, 정확해졌다.
맹호출현, 아호심양, 흑호좌동, 백호난아, 마호천계(魔虎千界)로 이어지는 전5식에서부터.
여태껏 율호왕과 함께 하면서 형태만 조금씩 잡아가고 있던 후3식까지.
여기에 요결이 뒤섞인 순간, 엘릭은 자신이 흩뿌리는 세 개의 인장들도 서로 같이 맞물리면서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음이 잔뜩 쏟아지고, 바람이 이것을 실으며, 그림자가 덧대어진다. 중구난방이었던 강체술이 일정한 흐름에 따라 하나로 통합되듯이, 인장 마법도 서서히 그렇게 규합되는 중이었다.
“지금부터 보여줄 마지막 요결 3개는 너만의 강체술을 확립하기 위해 반드시 필수로 익혀야 할 중심 요체가 될 것이다.”
엘릭은 어느새 율호왕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라. 전5식은 야수의 발걸음이다. 후3식은 맹수의 발톱이며, 요결은….”
동화(同化).
이미 두 사람은 하나나 마찬가지였다.
“백수의 왕이 가진 이빨이다.”
-심(尋).
“깊고 깊게 파고들어라. 한 번 문 맹수의 이빨은 절대 놓치는 법이 없음이니.”
-황(荒).
“그렇게 물어버린 대상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모든 것을 뜯어버리고, 삼켜라.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지 않는다면, 그 다음의 너에게 기회는 없다.”
-화(禍).
“그리하여 상대에게 있어 재앙이 되어라. 어느 누구도 너에게 해를 끼칠 수 없도록, 아니, 그럴 엄두조차 낼 수 없도록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보여라.”
율호왕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동장군의 팔다리가 터져나가고, 몸뚱이가 부서지면서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금 이 순간.
율호왕은 전장을 지배하는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런 율호왕에게 완전히 몰입해 있는 엘릭도 똑같이 몰아(沒我)의 상태에 젖어 있었다.
무의식의 지평을 열어 심안을 획득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의식의 수평이 확장되면서 다섯 감각의 너머에 존재한다는 ‘육감(六感)’이 활짝 열렸다.
심안과 육감, 두 가지가 하나로 맞물리면서 빚어내는 세상은 너무나 어지러우면서도 황홀했다.
인장의 마법도 그 세상에서 어우러지고 있었다.
냉혹의 차갑고 혹독함이 느껴졌고.
삭풍의 쓸쓸하며 에이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며.
흉성의 조급하고 포악한 성질을 맘껏 부려먹을 수 있었다.
콰콰콰!
그렇게 율호왕의 도움을 빌어 뜯어낸 얼음 파편 속에는 녀석이 동백의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뒤로 쌓은 업들도 가득 들어있었다.
아무런 이성이나 사고도 없이, 그저 부유령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녀야만 했던 모습.
그러면서 수도 없이 보고 들으며 쌓인 사념들이 있었지만, 어쩐지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해서 정확하게 어떤 형태인지 잘 보이지는 않았다.
콰직!
콰직!
그림자는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그런 파편들을 씹어 먹으면서 삭풍의 인장을 계속 더해나갔고, 끝끝내 그것이 5성에 다다랐을 때.
콰아앙!
엘릭은 동장군의 가슴팍에다가 커다란 바람구멍을 낼 수 있었다.
스스스-
물론, 동장군의 그런 상처는 곧 다시 눈발이 달라붙으면서 금세 채워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엘릭은 크게 만족해하고 있었다.
“어떠냐?”
“예. 재밌네요.”
사실이었다.
마정석이 너무 미친 듯이 마력을 쏟아내는 판국에 오히려 마나 로드가 잔뜩 과열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동장군으로부터 끌어당긴 차가운 마기가 마나 로드를 식혀 주면서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흐흐! 죽을지도 모르는 사선에서 웃다니. 역시. 넌 절대 정상이 아니야.”
“그러는 족장님이야말로 웃고 계시는데요?”
“말 안 했나? 나는 원래 정상이 아니라고.”
율호왕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포악하게 웃었다.
엘릭은 심안과 육감을 통해 그에게서 여태 보이지 않던 다른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마치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저것은… 업을 탄탄히 쌓고 쌓아 인간이 닿을 수 있는 한계에 다다랐고, 그마저도 조금씩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강자들만이 가진다던 헤일로(Halo, 광륜光輪)가 분명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막혔던 벽 하나를 넘었다.
아마 지금 자신이 가진 수준을 가늠하자면 6써클의 마지막, 혹은 7써클의 초반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안배에서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던 건, 율호왕의 도움이 가장 컸기 때문에 묻고 싶었다.
“절 도와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글쎄.”
율호왕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나랑 같은 과라서?”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왜? 불만이라도 있니?”
엘릭은 자신의 얼굴 앞에 아른거리는 주먹을 보고는 재빨리 굽혔다.
“헤헤헤! 쇤네 같은 소인배가 어찌 위대하신 율호왕 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요? 그래서 드린 말씀입니다요.”
“그렇지?”
“옙. 그러고 말굽쇼.”
“난 한 번 ‘형제’라고 인정한 사람은 끝까지 믿는다. 설사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해도. 형제가 형제에게 도움을 주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랴?”
엘릭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형제라.”
그 역시 혈육이 있긴 하다지만, 이렇게 피가 섞이지 않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를 계속 의심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이게 그릇의 차이라는 걸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 역시 친구인 동백의 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뛰어다니겠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어쩌면 율호왕이 말한 ‘같은 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휘휘휘!
엘릭은 세 개의 인장을 있는 힘껏 돌렸다. 눈보라가 회오리를 그리면서 퍼져나갔다.
다시 부딪칠 때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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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제약이 해제되었습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