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동장군
그 순간.
엘릭은 다시 동백의 신이 남겼던 업을 훔쳐볼 수 있었다.
* * *
-심심하군요.
동백의 신… 아니, 엘릭으로서는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왕’은 고독한 존재였다.
겨울 궁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궁궐 속에서 홀로 눈을 감고 뜨며, 홀로 업무를 보고, 홀로 정원을 거닐며, 홀로 온통 새하얗기만 한 자신의 영지를 굽어다 보면서 홀로 살폈다.
그 모든 일과에는 그녀 혼자만이 있었다.
많은 업무를 혼자서 보는 게 아니었다. 그냥 궁전 내에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넓은 영지에 살아가는 영지민도 그녀밖엔 없었다.
그녀만이 여왕이었고, 신하였으며, 백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절대 아니었다.
겨울 궁전은 언제나 수많은 존재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댔고, 신하들은 각지에서 쏟아지는 업무량 때문에 제발 인력을 충원해달라며 우는소리를 해 댔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언제나 입가에 웃음을 달고 살았다. 이렇게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건 전부 여왕님의 배려 덕분이라며 침이 튀도록 칭찬을 해댔고, 그녀는 그때마다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머나먼 과거의 일일 뿐.
엘릭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백성들은 모두 눈을 감았고, 신하들은 먼 길을 떠났다.
이 넓디넓은 궁전과 더 커다란 영지에는 이제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았다.
흔히 볼 수 있었던 강아지도 더 이상 뛰어놀지 않는 황량하고 쓸쓸한 이곳에서 보이는 건 온통 새하얀 눈밖에 없었다.
-심심하군요. 너무나.
그래서 여왕은 제 딴에는 바쁜 일과를 소화하면서도, 말 상대가 없으니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졌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말하는 방법도 잊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따금 일과를 집어치우고 그동안 바쁜 일상 때문에 한없이 미뤄두기만 했던 잠이나 실컷 자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동면인지 뭔지를 하고 나면 시간이 꽤 많이 흐를 것 같았으니까.
아니, 그냥 이대로 계속 영면에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여왕은 언제나 고개를 세게 털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여기서 자신마저 잠에 들면, 자신의 소중한 백성과 신하들을 기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잖은가….
그건 너무 끔찍했다.
-그래도 심심하군요. 이번에는 무슨 업무를 봐야 할… 음?
그래서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하루 업무를 똑같이 소화하고 있었다.
궁전 구석구석을 거닐면서 망가진 곳은 없나, 수리해야 할 것은 없나, 추가해야 할 게 있으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평상시와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리석처럼 말끔하게 깎인 투명한 얼음 타일 사이로 나 있는 새싹… 하나.
-호오?
여왕은 그것을 보고 아주 짧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동안 아무리 궁전과 영지를 떠돌아다녀도,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항상 똑같았다.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정지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정적과 적막 속에 갇혀 있었다.
망가진 곳을 찾고자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늘 똑같기만 했던 그녀의 세계에, 아주 작지만, 처음으로 변화가 생긴 셈이니.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군요.
얼음장처럼 차갑던 여왕의 얼굴에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엷은 미소가 맺혔다.
* * *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네 번째 제약이 해제되고 있습니다.]
[이번 제약은 잠금장치가 큰 관계로, 해제에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파아아!
석판이 잘게 떨리고, 손등이 환한 빛을 뿌렸다.
투둑, 투두둑-
엘릭은 완성된 냉혹의 인장에서 삭풍의 인장으로 마기가 연거푸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삭풍의 인장은 뭐가 그리도 다급한지 마기를 쉴 새 없이 먹어치웠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도 부족한지 냉혹의 인장에게 좀 더 마기를 달라고 보챘다. 마치 엄마 새에게 먹이를 달라고 졸라대는 아기 새라도 보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냉혹의 인장은 조급해하는 삭풍의 인장을 잘 달래가면서 모든 것을 조금씩 바꿔나갔다.
삭풍의 인장을 꽁꽁 묶고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부터였다.
휘이이!
어딘가에서부터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엘릭의 머리카락 역시 속절없이 나부꼈다.
* * *
그렇지 않아도 바빴던 여왕의 하루 일과에 한 가지 업무가 추가되었다.
바로 새싹을 키우는 것이었다.
새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주변 얼음 타일을 교체하고, 어디서 어렵게 구한 흙으로 주변을 보충해주었다.
혹시 추워서 싹이 얼어 죽을까 봐 온도 조절을 해주고, 눈발이 불지 않도록 주변에다 차단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
-그대는 알아야 할 것이에요. 본 녀는 원래 이런 사소한 것에 절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그대가 얼마나 큰 은총을 받고 있는지를 항상 명심해두세요.
사실 여왕은 이 싹의 종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전에 정원을 가득 채우던 꽃들도 모두 신하와 백성들이 알아서 가꾸어주었으니까. 이렇게 손수 무언가를 직접 키워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여왕의 손길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싹이 제대로 자라지 않을까 봐. 수백 년 만에 만난 말 상대를 그리 쉽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어도, 나가는 건 마음대로가 아니랍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싹은 계속 쑥쑥 자랐다. 몇 번씩 위험할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하니 조금씩 잘 자랐다.
싹은 묘목이 되고, 묘목은 점차 위로 커지면서 가지를 뻗어 잎사귀를 틔워냈다. 그러다 하나둘씩 꽃봉오리가 맺히면서 활짝 피기 시작했다.
꽃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아름다워서 여왕은 한참동안이나 꽃을 바라봐야만 했다. 매일같이 빠지지 않고 반복하던 업무를 봐야 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뒤부터 여왕은 꽃이 진 자리에서 난 열매를 따다가 옆자리에다 심어두었다. 혹시 같은 나무가 더 자랄 수 있을까 싶어서.
다행히 그녀의 생각은 정확했다. 정원은 곧 수많은 나무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무 사이로 이름 모를 꽃도 하나둘씩 피기 시작하면서… 정원은 정말 화원이 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록 바깥은 여전히 눈발이 날리는 추운 세계였지만, 이곳은 매 계절 순차적으로 꽃들이 피고 졌다. 여왕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항상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점차 그녀 안에 쌓여있던 힘이 새어나가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분들은 모두 독… 이로군요.
여왕은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얼음과 눈을 다스리는 여왕이었고, 그런 만큼 항상 가슴 속에 추운 겨울을 품고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겨울이 봄눈처럼 사르르 녹는 순간, 그녀를 이루던 모든 사념도 같이 녹아내리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왕은 자신이 손수 가꾸었던 화원을 망가뜨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마지막까지 이곳을 아름답게 키우고 싶었다.
자신이 녹아서야 떠나고 말았던 신하와 백성들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므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이 화원에 있는 동안 지난 옛 추억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기에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곳은 신하와 백성들이 그녀와 가장 해맑게 웃었던, 깊은 추억이 남아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뚝!
뚝!
그렇게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여왕은 점차 야위어갔다. 꽃향기가 짙게 풍기는 화원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도도하게 흐르면서 꽃잎들을 촉촉하게 적셨다.
[이 언니 누구지?]
[누구야?]
[예쁘다.]
[예뻐!]
꺄르르-
조용하기만 하던 화원에서 참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여왕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낮잠을 자는 것처럼 꽃들이 주는 따스함을 가만히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겨울’이 저물고, ‘봄’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 이런 것이 있었군.
저벅!
그런 화원으로, 낯선 새카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 * *
‘저건…?’
엘릭은 한순간 자신이 업에서 마지막에 본 그림자의 주인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신!’
언젠가 처음 안배를 열었을 때, 시조로 보이던 마법사와 대적하던 거대한 마신과 똑같은 기질을 품고 있는 자였다.
비록 수십 미터나 되던 체구나 생김새와는 아주 많이 달랐지만.
엘릭은 그것이 마신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그림자의 주인은 이후에 화원에 남은 여왕의 사체를 주워 숨결을 불어넣었으니까.
그것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절대 해낼 수 없을 이적이었다.
-겨울은 겨울로만 남아야 하지 않겠나?
사체는 흩어지고, 그 속에 남아있던 사념(邪念)들이 풀풀 풍기면서 새로운 불가사의로 거듭났다. 그것은 어둠을 잔뜩 품으면서 점차 뻗쳐 나가다가 흑의 설원에서 외변 부로, 능선을 따라 1천(泉)으로 조금씩 내려갔다.
동장군의 탄생이었다.
파아앗!
바로 거기에서 엘릭은 정신을 차렸다. 차갑지만 따뜻했고, 외로웠지만 행복했던 여왕의 업이 생생하게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화원을 망가뜨리고, 영지를 짓밟으려던 이들에게는 한없이 쌀쌀한 혹독한 바람이었기에 ‘삭풍(朔風)’일지니.
투두둑!
쩌어어엉-
엘릭은 삭풍의 인장을 강제로 속박하고 있던 얼음 끈이 완전히 깨지면서 냉혹의 인장과 확실하게 연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찰칵!
확실했다.
‘겨울’을 완성하는 데에 있어 냉혹의 인장과 삭풍의 인장은 하나로 같이 움직이는 톱니바퀴였다.
[모든 제약이 해제되었습니다!]
[본질 개방.]
엘릭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비치는 광경은 어둡고 쌀쌀한 세상이었다.
여기서 엘릭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냉혹의 인장은 더 이상 추위를 삼키지 않았다. 대신에 이번에는 삼켰던 것들을 도로 토해냈다.
삭풍의 인장과 함께.
“【쓸쓸해서 에어오리라】.”
완성된 트리거를 잡아당긴 순간, 삭풍의 인장이 돌개바람을 거칠게 일으켰다.
콰콰콰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설풍(雪風)이 엘릭을 둘러싸던 어둠을 갈가리 할퀴고, 찢어놓았다. 시야와 감각을 흩뜨리던 눈보라마저 물리쳤다.
쿠쿠쿠-
마치 장막을 걷어치운 것처럼, 그 너머에 숨겨져 있던 ‘진짜’ 풍경이 나타났다.
[…결국 깼군요.]
동백의 신은 여전히 그대로 엘릭의 왼쪽 어깨 위에 올라타 있었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 맺힌 감정은 아주 복잡 미묘했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엘릭에게 들킨 셈이니. 부끄럽기도, 조금 못마땅하기도 할 테지.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앞선 감정이 있었으니.
“화원, 제가 어떻게든 원래대로 되돌려 놓겠습니다.”
엘릭은 그런 속마음을 읽으며 동백의 신에게 말했다.
[당신…!]
“화원에 피었던 아름다운 꽃들을 다시 보는 것. 그게 당신이 마지막까지 품고 싶었고, 동백의 신으로 다시 태어나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광경이잖습니까?”
동백의 신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엘릭의 말마따나, 그녀가 키웠던 화원은 현재 꽃의 신전이라 부르던 곳이었으니.
그녀는 겨울꽃이기 이전에 꽃의 신전을 가꿨던 주신으로서, 그곳이 처음에 가졌던 아름다움을 되찾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우스던이 말했던 ‘봄’이란, 바로 마신이 저주로 막아버렸던 따스함이었다.
[부탁… 해도 될까요?]
동백의 신은 업에서 보았던 여왕과 똑같은 얼굴을 한 채로, 엘릭에게 간절히 소망했다.
“부탁이라는 그런 딱딱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
“친구 사이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잖습니까?”
[…!]
엘릭은 그런 말을 하면서 앞으로 몸을 날렸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냉혹의 인장과 삭풍의 인장이 뒤섞이면서 눈보라와 얼음 조각이 거칠게 튀어 올랐다.
[친구라.]
그런 엘릭을 보면서, 동백의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하시네요. 어렵게 그어 둔 선을 그렇게 쉽게 넘어 버리고 말이죠.]
그러면서도.
말끝에는 웃음소리가 살짝 섞여 있었다.
저 멀리.
어두운 그림자로 똘똘 뭉친 옛 허물이 보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