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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05화 (105/405)

105화

동장군

“저만치 먼 곳에서부터… 새카만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살이 에일 듯한 추위와 눈보라도 몰려오고… 거기에 휩쓸린 모든 게 다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소리가 났습니다! 벌 떼가 몰려오는 소음들 하며…! 앞도 보이질 않았어요!”

“도망쳤습니다. 그냥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피난민의 증언은 하나 같이 공통적이었다.

어둠.

추위.

눈보라.

그리고 공포(恐怖).

그들은 하나 같이 ‘그것’을 마주한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거기에 사색이 되어 움직이질 못하면, ‘그것’이 주는 추위에 갇혀 금세 얼어붙고 말았노라고.

현재 안트로모프에 몰렸고, 몰려들고 있는 피난민들은 모두 그런 피해를 피해 달아난 자들이었다.

선조 때부터 정착해서 자리 잡았던 터전을 등져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가족과 친지들을 잃어야만 했다.

때문에 율호왕의 대 막사에 모인 부족장들은 하나 같이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이따금 ‘그것’이 다시 이곳으로도 불어닥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동장군이 저렇게 무서운 겁니까?]

엘릭이 현시대에서 겪은 동장군이라고 해 봐야, 심안으로 결을 짚으면서 통과하거나, 벨렌체 왕이 일러준 대로 길을 잡아서 이렇다 할 피해를 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본 건 아주 사소한 일부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현시대에서야 다들 그동안 동장군에 익숙해진 것도 있어서 여러 대응책도 생기고 위력도 많이 약해졌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때만 해도 동장군은 정말 불가사의, 그 자체였답니다.]

동백의 신은 팔짱을 낀 채로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절대 거스를 수 없을 재해였으니… 그런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수인족들을 규합해 영웅으로 떠올랐던 것이 율호왕이었구요. 하지만 그런 율호왕도 그러는 데 한참이나 걸렸어요.]

동백의 신은 가만히 엘릭을 응시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냐는 의미.

엘릭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예. 하겠습니다.”

그 말은 율호왕과 동백의 신, 둘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율호왕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여기 있는 족장들과 투사들을 모아 탐사대를 만들 예정이다. 출발은 내일 정오에 할 것이니 준비하고 있어라.”

[….]

반면에.

동백의 신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 * *

이튿날.

율호왕이 말한 대로, 탐사대가 안트로모프를 떠났다.

거기엔 각 부족에서 내로라하는 투사들이 잔뜩 섞여 있었다.

부족 간의 갈등에 따라 대부분 원한 관계가 복잡하게 얼룩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족이 아니라 종족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위기 상황이 아닌가.

하나 같이 바짝 긴장한 채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사소한 잡담조차 없었다.

선두에는 탐사대의 수장 격인 율호왕과 길잡이 역할을 맡은 엘릭이 서 있었다.

“【빛나라】. 그리고【떠올라라】.”

엘릭은 허공에다 광구(光球)를 높이 띄웠다.

동장군의 영역에 가까워질수록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지고, 하늘이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도시를 떠날 때부터 방한복은 단단히 껴입은 상태였지만, 시야 확보는 턱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확보해야만 했다.

그리고 뒤따라 오는 이들도 주변을 살필 수 있게 추가로 몇 개를 더 배치해뒀다.

‘서치 라이트(Search Light)’. 유사시에는 등대로도 주로 쓰이는 기초 마법이었다. 다만, 마력량과 순도에 따라 밝기와 지속시간에 차이가 있었다.

“그 마법이란 건,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율호왕은 광구를 보면서 흥미롭다며 턱을 쓰다듬었다.

광구를 보자마자 질색하는 다른 수인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족장도 배워보시렵니까? 기초 정도는 쉽게 익히실 것 같은데.”

“큭! 굳이? 형제가 있는데 왜?”

“부려먹겠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십니다.”

“꼬우면 네가 족장하던가.”

“….”

엘릭은 자신만만한 율호왕의 태도를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석 달 넘게 겪는 거지만, 율호왕은 참 막무가내였다.

[이번 기회에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동백의 신이 낄낄대는 건 그냥 무시했다.

“하여간 형제, 너를 만나고 나서 우리 부족이 많이 변하긴 했다. 나는 진짜 한 번씩 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복덩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라니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엘릭은 정말 자신이 이곳의 기준으로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거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러니 선물을 하나 주마.”

선물?

동장군을 조사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엘릭은 분위기와 너무 안 어울리지 않냐고 물으려 했지만.

“발(發), 암(暗), 도(渡), 경(勁). 파(波), 장(場), 집(集), 해(解), 폭(爆).”

갑자기 율호왕이 줄줄이 내뱉는 단어들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뭔가… 알 것 같은데 알기가 힘들다.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이게… 뭡니까?”

“기억했냐?”

“쏘고, 조용히, 건너서, 때린다? 흩뜨리고, 고정시키고, 모으고, 풀고, 터뜨린다… 맞죠?”

“역시. 늘 느끼는 거지만 형제는 참 머리가 좋단 말이지? 바로 이해를 해버리고.”

“그러니까 이게 뭐냐구요.”

“요결의 종장(終章).”

“…!”

엘릭은 앞으로 잘 걷다 말고 도중에 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요결.

애당초 엘릭이 율호왕에게 접근했던 이유였다.

그런데 그걸 거론한다고?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호오.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동백의 신이 묘한 시선으로 엘릭과 율호왕을 번갈아 보는 가운데.

엘릭의 그런 반응이 재미났던지, 율호왕의 미소가 더 익살맞게 변했다.

“흐!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어,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처음부터.”

“…!”

“고아 출신으로 은거한 고수에게 강체술을 배운다? 여기서부터 미심쩍은 구석은 있지만, 그럴 수도 있다 치자. 하지만 마법은 그렇지 못하지. 다른 수인들은 마법을 경시해서 잘 모르지만, 나는 다르거든. 그거, 독학으로는 거의 불가능하잖아?”

“….”

“거기다 일부러 안트로모프와 적대 관계였던 부족들만 들쑤시고 다녔던 건, 애당초 날 보기 위해서였던 거지. 그게 재미있겠다 싶어서 놔뒀던 것뿐이다.”

엘릭은 계면쩍은 나머지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사실 자신이 생각해봐도 그가 저지른 짓들은 하나 같이 막무가내에 억지 투성이었으니.

“그러다 어울리다 보니 내 강체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거고.”

“…그럼 저를 왜 가만히 내버려 두셨습니까? 제게 요결을 가르쳐주신 이유는 무엇이구요?”

“속내는 엉큼하긴 했어도, 네가 우리 부족에 충실했던 건 사실이니까. 원래 다 그렇잖아? 인간이고 수인이고 간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건. 난 내 이익이 되었으니까 널 내버려 뒀을 뿐이다. 뭐, 구경하는 재미도 삼삼하니 재미있었고.”

엘릭은 여태 율호왕의 손바닥 위에 있었단 소리에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그래도 요결의 종장을 가르쳐주신 이유는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만.”

“살아남으라고.”

“…?”

“동장군, 그 안에 들어가면 여기서 몇이나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니까 주는 거다. 기껏 개고생해서 요결 알아냈는데,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잖아?”

엘릭은 이것이 율호왕의 배려라는 것을 알았다.

동장군에 들어가서 무슨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요결을 바탕으로 극복해내라는 배려.

되감기를 모르기에 그런 것일 테지만.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물론, 이게 마지막은 아니다. 종장은 총 2개로 나뉘거든. 뒷부분은 살아 돌아오면 주마.”

그 말에 엘릭은 어떻게든 이번에 되감기를 해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종장의 마지막 부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율호왕의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정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닌 것 같은데.]

[…제 감동 함부로 깨지 마십시오.]

엘릭은 동백의 신이 던진 핀잔을 무시하고, 도중에 걸음을 뚝 멈췄다.

저 멀리.

츠츠츠-

끼아아아!

어둠이 해일처럼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거기서 불어닥치는 추위와 칼바람이 빚어내는 바람 소리가 마치 귀곡성처럼 음산하게 들렸다.

* * *

엘릭이 처음 동장군의 실체를 보고 나서 느낀 감상평은 아주 단순했다.

마(魔).

저건 명실상부한 ‘마’였다.

다른 무엇으로도 정의할 수 없을 ‘마’, 그 자체.

그 속에 담긴 건 온통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악의와 사념(邪念)으로 가득했으며, 단순히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거기에 물들어 사그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업에서 봤던 동백의 신이 풍기던 것과 똑같은 기질이야. 다른 점이 있다면… 중심이 없다고 봐야 하나.’

엘릭은 얼음 왕좌의 여인에게서 동백의 신이라는 중심 요소를 빼버리면 남는 게 바로 저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동백의 신이 잃어버린 껍데기… 허물… 뭐, 그런 거라고 보면 되나? 대체 동백의 신은 뭘 하던 마왕인 거지? 저만한 힘이면 거의 전설에나 나올 대마왕의 수준일 텐데?’

어쩌면 동백의 신이 잃어버린 허물이 세월이 흐르면서 홀로 진화를 겪었거나, 혹은 마신의 저주라는 것을 만나면서 변질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메르빙거의 당대 가주인 엘릭으로서는 저걸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아주 피부가 따가워 죽겠는데.’

아귀감이 몇 번이나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떻게든 저기서 도망쳐야 한다고!

하지만 엘릭으로서는 오히려 호승심만 느껴졌다.

“우리의 목표는 저 시커먼 것의 내부로 들어가 정확한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주의하고… 돌입한다.”

그리고 작전을 강행하는 율호왕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가장 먼저 앞서면서 머뭇거리는 탐사대원들을 강제로 끌었다.

그렇게 하나둘씩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서.

화아아-

외부에서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추위가 불어닥치고, 눈보라로 시야를 빼곡하게 가려버렸다.

“제, 젠장!”

“안 보여! 아무것도…!”

수인들은 하나같이 적잖게 당혹해하고 있었다.

추위야 마력을 돌려서 어떻게든 내쫓는다 치더라도, 그들 대부분이 시각보다 다른 감각에 더 의존하는 경향이 짙은바.

그런데 동장군의 어둠이 그런 감각들을 모조리 교란하고 있었으니, 손발을 묶은 것처럼 갑갑해질 지경이었다.

그나마 엘릭은 사정이 괜찮았다.

심안이 비춰주는 길목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물론, 그마저도 결이 실타래처럼 마구 헝클어졌다가, 실시간으로 위치를 자꾸만 바꿔대니 아차 하는 순간 길을 잃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엘릭은 심안에 더더욱 집중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뒤늦게 언제부턴가 주변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심지어 계속 같이 있던 동백의 신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들 어딜 간 거지?’

엘릭은 섬뜩한 오한에 등골을 쭈뼛 세워야만 했다.

온통 어둠만 가득한 세계에 홀로 갇혀 주변은 눈보라만 휘몰아친다. 마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체력과 정신력이 무한하지 않은 한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다.

소지한 식량도 한계가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자신도, 율호왕을 비롯한 탐사대 전부가 전멸할 수밖에 없었다!

‘심안을 넘어서는 다른 방법을 써야만 더 중심부로 갈 수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이 미치자, 엘릭은 자연스레 삭풍의 인장으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삭풍의 인장도 동장군처럼 동백의 신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

아니, 정확하게 따지자면, 동장군은 단순히 허물인데 반면에, 삭풍의 인장은 뿌리라 할 수 있었다.

이것을 활용한다면 어떻게든 길을 개척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엘릭은 삭풍의 인장이 가진 업을 일부 엿봤을 뿐, 아직 전부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트리거를 완성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인장을 아직 발동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제약이 풀리기만을 여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건만.

‘트리거가 없다면 내가 직접 만들 수밖에 없어.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힌트라도 있다면…!’

순간, 엘릭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동장군을 가져가는 방법을 배우게 것이다.

오토 한이 했던 말.

‘가져… 간다?’

엘릭은 어떤 생각이 미치자 재빨리 허공에다 손을 뻗었다.

“【흡수하라】.”

엘릭의 언령에 따라, 냉혹의 인장과 흉성의 인장이 동시에 시린 빛을 토해냈다.

어둠에 잠식되어 보이질 않던 그림자가 어떻게든 지면을 타고 움직이려 하면서 짐승처럼 아가리를 쩍 벌렸다.

콰직!

콰직!

아가리가 움직일 때마다 동장군의 어둠이 아주 작게나마 뜯겨나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속에는 마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주 순도 높은 옛 마왕의 마기가!

키키키킥!

흉성의 인장은 주변이 온통 먹을 것 투성이라 기뻤던 건지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속에는 냉혹의 인장도 같이 있어 맹렬한 속도로 동장군의 추위를 빨아당겼으니.

‘나는 그동안 냉혹의 인장을 밖으로 분출시키는 용도로만 썼었지, 안으로 끌어당긴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어.’

냉혹의 인장이 가진 속성은 빙(氷)과 냉(冷).

당연히 동장군의 추위도 같은 연장선에 놓인 것이었으니. 마정석의 마력으로 뒷받침을 한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흉성의 인장과 같이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가져갈’ 수도 있었다!

동장군의 추위와 마기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냉혹의 인장이 내뿜는 시린 빛도 계속 커졌다. 선이 좀 더 선명해지고, 모양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다.

쩌어어엉!

냉혹의 인장은 끝내 맑은 소리를 내면서 완전한 형태를 갖췄다.

10성.

성취도가 ‘완성(完成)’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꿈틀!

냉혹의 인장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자연스레 삭풍의 인장과 연결되면서.

처음으로, 삭풍의 인장이 반응을 보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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