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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04화 (104/405)

104화

율호왕(律虎王)

동백의 신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엷게 미소를 띠면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업(業)을 보았습니다.”

설산왕 때도 그랬다.

냉혹의 인장을 획득하고 난 뒤, 설산왕의 업을 엿보면서 진명을 더 깊게 이해하고 지금과 같은 힘을 얻었다.

엘릭은 조금 전에 자신이 본 것이 바로 그런 업이라고 생각했다.

삭풍의 인장에 남아있는 업.

업에 비친 광경은 북풍한설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툰드라 지대에 놓인 어느 얼음 궁전이었다.

그 중심에는.

한 여인이 권태로우면서도 외로움에 잔뜩 찌든 얼굴로 얼음 옥좌에 앉아있었다.

엘릭에게도 아주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엘릭은 얼음 옥좌에 앉아있던 여인의 얼굴과 동백의 신의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겹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요?]

“거기에 동백 님이 앉아계셨습니다.”

하지만 엘릭은 환상에서 봤던 존재가 동백의 신이면서도, 그녀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동백의 신은 분명 동백꽃의 향기를 풍기는 꽃의 신이다.

하지만 얼음 옥좌에 앉아있던 동백의 신은 분명….

‘마왕이었어.’

그것도 상당한 힘을 가졌을 게 분명한 마왕이었으니.

그 도도함과 냉철함은 동백의 신을 닮았으면서도, 얼음장처럼 차갑던 분위기는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 정도로 매서웠다.

그것이 아마도 삭풍의 인장이 가지고 있던 원래 모습이겠지.

‘삭풍’은 그 북풍한설 중에서 일부를 떼와다 빚은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엘릭은 동백의 신과 얼음 옥좌의 여인을 같은 사람이라고 매칭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둘은 같은 존재다.’

신과 악마가 양립할 수 있냐는 문제도 있었지만, 어쩐지 엘릭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외로워 보이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궁전에 홀로 계시더군요.”

분위기는 너무 상반되어도.

동백의 신과 얼음 옥좌의 여인은 너무나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권태.

고독.

슬픔.

“삭풍의 인장과 비슷한 기질이 거기서 느껴졌었습니다. 그래서 여쭌 겁니다.”

동백의 신은 빤히 엘릭을 바라봤다.

엘릭도 그런 동백의 신을 응시했다. 얼음 옥좌의 여인은 서슬 퍼런 기세를 풍겨댔지만, 여기 있는 동백의 신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아주 작은 체구를 지녔을 뿐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 못 하는 머나먼 과거의 일일 뿐이에요.]

동백의 신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엘릭은 그것이 긍정이라 받아들였고.

곧 이번 안배의 목적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흑의 설원에 흩어진 추위와 황량함… 그게 전부 원래는 동백 님의 것이었던 겁니까?”

삭풍은 북쪽 지대를 휩쓰는 황량한 바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엘릭은 마물을 잡을 때마다 인장의 조각을 조금씩 수집했다.

즉, 동백의 신이 마왕이던 시절에 갖고 있던 힘이 지금은 흑의 설원에 흩어졌단 뜻이었다.

[…이럴 때는 메르빙거의 영민한 머리가 너무 얄밉단 말이죠. 눈치채더라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면 될 것을.]

동백의 신은 조금 못마땅하다는 눈치로 엘릭을 노려보면서도, 이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넘어가고 싶어요. 그것들은 더 이상 본 녀의 것이 아니에요. 본 녀는 어디까지나 동백나무이며, 꽃의 화신일 뿐일지니.]

엘릭의 두 눈이 요요하게 빛났다.

“그럼 이 안배의 목적은 동백 님이 갖고 계셨던 흔적들을 수습하는 겁니까?”

[글쎄요. 말했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나무를 키우는 데 조언을 줄 수 있을 뿐이랍니다. 그대는 오토 한이 말했던 것만 잘 기억해두세요.]

엘릭은 안배가 시작되기 전에 오토 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동장군을 가져가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나무를 오롯이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백의 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추위를 전부 가져가야만 한다.

동장군은 그런 동백 신의 옛 분신이자, 허물이었다.

‘그럼 마신의 저주라는 게 그걸 깨운 건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있지만, 그래도 엘릭은 이제 머릿속이 확 맑아지는 기분을 볼 수 있었다.

[동장군을 가장 조심하세요. 안배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당신의 발목을 붙잡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테니까.]

경고를 던지는 동백 신의 입가에는 씁쓸함이 맺혀 있었다.

* * *

그때부터 엘릭은 싹이 나기 시작한 동백나무를 키우는 데 집중했다.

동백의 신이 조언해주는 대로 퇴비를 만들어 꼼꼼히 주변에다 둘러주고, 마물들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벽을 쌓고 작은 결계를 세워두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과연 남은 시간 동안 나무가 잘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듯, 동백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계속 쑥쑥 자라났다.

그리고 그동안 ‘부족’ 안트로모프도 점차 ‘도시’ 안트로모프로 탈바꿈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 착수했다.

당장 부족원은 많지 않았지만, 차후 규모가 커질 걸 대비해서 엘릭의 조언에 따라 성벽을 쌓고 작게나마 오두막집을 지었다.

그러면서 정복 전쟁도 활발하게 벌여나갔으니.

이미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퓨리가 율호왕에게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수인 연합’의 탄생은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 셈이었다.

‘원래 무왕이 흑의 설원을 일통했을 때보다 10년 정도 빠른 셈이지?’

물론, 그런다고 해서 모든 부족을 하나로 엮는 작업이 하루아침에 뚝딱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엘릭은 최소한 자신이 있는 동안에는 더 이상 안트로모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나무를 키우는데 좀 더 많이 신경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34회차 도전을 한 지 91일째에 접어들 수 있었다.

동백나무에서 처음으로 연분홍색 꽃봉오리가 튼 순간이었다.

* * *

“소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랄프를 구해주었다면서?”

“저도 부족원인데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

“그래? 그럼 패스.”

“스, 스토오옵! 아니, 왕이 되셨으면서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르십니까요? 헤헤헤.”

“그래서 원하는 건?”

“대련! 대련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대화를 기점으로.

엘릭은 매일 같이 율호왕과 대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몸소 그의 강체술을 겪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냥 옆에서 훔쳐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체험해보는 게 백 배는 나은 셈이었다.

그리고.

‘…젠장! 이제는 좀 봐주면서 해도 되지 않냐고!’

그때마다 실컷 두들겨 맞았다.

엘릭이 달걀로 시퍼렇게 멍든 양쪽 눈덩이를 문대는데, 동백의 신이 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도 이제는 어엿한 수인이군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팬더 인간이 되셨다는 뜻이랍니다.]

“…동백 님, 요즘은 자러 잘 안 가십니다?”

[힘이 제법 많이 돌아와서요. 그리고 이렇게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있는데 굳이 자리를 비울 필요도 없잖아요?]

엘릭은 타인의 불행을 행복으로 여기는 이 못된(?) 신에게 어떻게 응징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곧 뿌듯함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그래도… 이제 이걸로 전초식은 완전히 원형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어. 요결(要訣)도 절반은 훔친 셈이고.’

요결은 강체술을 관통하는 중심축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완전히 습득할 수 있다면, 후초식과 오의, 그리고 비기로 가는 관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은 기간으로는 요결을 완성하지 못할 것 같은데. 리셋을 한 번 더 할까?’

엘릭이 그런 고민을 할 무렵.

[조금 더 이곳에 머물러 볼까, 고민하고 있나 보군요.]

동백의 신이 엘릭의 속마음을 귀신같이 읽고 물어왔다.

엘릭이 볼을 긁적이는데, 동백의 신이 갑자기 인상을 딱 굳혔다.

[아직 잊은 건 아니죠? 그대가 세 번째 제약을 해제하고 난 뒤에 제가 했던 말을요.]

“동장군을 조심하라던 말씀이죠?”

[맞아요. 아직 이 안배의 하이라이트는 시작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 말에 엘릭은 궁금해졌다.

대체.

현시대의 수인족부터 여기 있는 동백의 신이며 오토 한까지 말하는 ‘동장군’이란 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여태까지 불가사의한 자연재해라고만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말로도 형용이 어려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려는데.

[…이런. 범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결국, 왔나 보군요.]

엘릭은 동백의 신이 시선을 돌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랄프가 다급히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엘릭에게서 구명을 받은 이후로도 틱틱거리기 바빴던 녀석이었기에 엘릭도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족장님께서 부르신다. 아무래도 큰일이 난 것 같다.”

* * *

엘릭이 랄프를 따라간 자리에는 수천 명이나 되는 피난민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그보다 많은 수인족들이 몰려오고 있었으니.

하나 같이 크게 다쳤거나, 무언가에 잔뜩 겁이 질린 기색이었다.

“이건…?”

[역시. 시작되었군요. 하긴 이 무렵부터였죠.]

동백의 신은 무언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듯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엘릭은 그 ‘시작’이란 게 동장군이라는 것을 알고,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어쩐지… 도시를 따라 부는 바람이 어제보다 훨씬 차갑고 따가워진 것 같았다.

“족장님은 안에서 기다리신다.”

“너는 안 들어가고?”

“부르신 건 너뿐이니 나는 여기서 기다린다.”

랄프는 뒷짐을 쥐면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 막사의 앞을 지켰다.

엘릭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천으로 된 문을 거두며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 그리고….”

“…?”

“받아.”

엘릭은 엉겁결에 랄프가 던진 걸 받아야 했다.

“무, 뭐 큰 건 아니고! 그냥 오다 주운 거니까 바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이게 뭐냐는 얼굴로 바라보니, 랄프는 혼자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서는 한참 동안 횡설수설을 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제 딴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귀 끝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백연고로군요.]

동백의 신은 슬쩍 엘릭의 손에 들린 걸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유명한 겁니까?]

[그 정도가 아니죠. 최소 백 년 묵은 귀한 약초로만 모아서 만든 것이니까. 회복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소량의 마력까지 품고 있어요. 아마 흑랑족 내에서도 아주 소량으로만 내려오는 보물일걸요?]

엘릭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게 귀한 걸 나한테 줬다고?

호호호. 동백의 신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최근 들어 그대가 율호왕에게 얻어맞기만 하니 걱정이 되어서 준 모양이군요. 그러면서 오다 주운 거라니. 저 아이에게 저런 귀여운 면이 있었었나?]

엘릭은 백연고를 품에 넣으면서 랄프의 옆을 홱 하고 지나쳤다.

“고맙다.”

가볍게 웃음기 섞인 한마디를 던지면서.

바로 그 뒤에 랄프가 다급하게 뭐라고 말한 것 같지만, 엘릭은 막사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 들을 수가 없었다.

대신에 엘릭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과 마주해야만 했다.

평소 정복 전쟁을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율호왕과 같이 앉아있던 회의실 탁상에는 못 보던 얼굴들이 아주 많이 앉아있었다.

엘릭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여러 수인 부족들의 족장들.’

[평소에는 그렇게 얼굴 맞대기 싫다고 싸워대기 바쁘던 분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보니 참 뿌듯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래도 동장군을 기승을 부리면서 피해를 입은 수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모양이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엘릭의 인사에 율호왕이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엘릭, 너 마법 좀 쓸 줄 알지?”

“예. 조금은.”

“엄살은. 네 마법이 결코 얕은 수준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부탁 하나만 하자.”

율호왕의 두 눈이 빛났다.

“지금부터 우리는 저 빌어먹을 동장군인지 뭔지 하는 걸 찾으러 갈 거다. 그러니 어렵겠지만, 거기 가는 길 좀 비춰다오.”

그 순간, 엘릭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번 안배가 품고 있던 진짜 미션이라는 사실을.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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