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율호왕(律虎王)
“그러니까 여기 있단 게 맞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미 척후들까지 확인을 마친 상태입니다. 오늘 아침 자에 율호왕을 비롯한 상당수의 친위대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흐흐흐! 이 뒤에 들이닥쳤을 때, 놈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가 참 궁금하군.”
부족 ‘퓨리’의 제2군장(軍長), 네워드는 곧 벌어질 사태에 기분이 너무 좋아 클클 웃어댔다.
요 며칠 전 안트로모프에 심어둔 첩자로부터 받았던 보고는 퓨리를 아주 크게 들썩이게 했다.
부족 안트로모프가 데스웜의 군락지를 공략하기 위해 화식환의 재료를 모으고 있다던 보고.
이미 준비도 거의 끝마쳐서 공략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네워드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무르팍을 치고 말았다.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지지부진하기만 하던 안트로모프와의 전세를 확 뒤집을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다른 군장 놈들은 가만히 있는 율호왕을 괜히 자극하는 꼴이 아니냐고 하지만… 흥! 같잖은 소리. 오히려 놈들이 정말 정착지를 만들어 도시라도 일군다면, 장기적으로 우리 퓨리가 몰락하게 될 거란 걸 왜 모르는 건지.’
퓨리는 모두 6명의 군장으로 이뤄져 있는 연맹 체제.
그들 개개인이 하나의 군(軍)을 이끌고 있기에 안트로모프처럼 어느 한 사람이 결정권을 독점하지 못했다.
네워드는 항상 그 점이 불만이었다.
퓨리가 이만한 성세와 규모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넓게 확장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군장들의 멍청하고 안일한 태도 때문이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율호왕의 머리를 잘라 당당히 들고 간다면, 다른 군장들도 이제 호락호락하게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겠지.’
네워드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였다.
퓨리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나아가 모든 수인족의 왕이 되는 것!
안트로모프가 내세우는 것과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그가 추구하는 건 단순히 권력욕이라는 점에서 달랐다.
‘이제 그 첫걸음도 곧 이뤄지게 된다.’
네워드가 두 눈을 단단하게 뜨면서 수하들과 함께 기척을 최대한 죽이면서 가까이 접근했을 무렵.
‘있다!’
네워드와 투사들은 율호왕과 안트로모프가 자랑한다는 친위대가 데스웜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콰콰쾅!
쿠르르르-
‘미친… 실력이긴 하군.’
네워드는 율호왕이 주먹을 뻗을 때마다 데스웜의 머리통이 박살 나고 땅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언제나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율호왕에게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다른 투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얼굴이 잔뜩 굳어진 것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준비해.”
“존명.”
“존명.”
네워드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수화를 준비하면서 저마다 챙겨왔던 마도구를 발동시키려 했다. 하나 같이 노예 사냥꾼들을 잡아 획득했던 전리품들.
전부 살상용으로 이뤄져 있어, 신호가 떨어지면 곧장 율호왕에게로 퍼부을 예정이었다.
율호왕이 아무리 재빠르다고 해도, 데스웜들에게 발이 묶여서야 쉽사리 그러기도 힘들겠지.
그리고 율호왕을 처치하고 나면 단숨에 남은 친위대까지 제거한다는 것이 제2군단의 작전 목표였다.
“시…!”
그렇게 네워드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이쪽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꿉꿉한 탄내가 섞인 냄새.
뒤끝이 씁쓸한 것이 마기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네워드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안트로모프에서 주로 사용하는 화식환을 태우는 냄새라는 것을 깨닫고 함정이라며 달아나라고 하려 했지만.
콰콰쾅!
이미 제2군단이 딛고 있던 땅거죽은 뒤집히고 있었다.
키에에엑-
캬아아악!
화식환의 냄새에 완전히 홀리고만 데스웜이 떼거지로 나타나 제2군단을 휩쓸기 시작했다.
* * *
“푸하핫! 이렇게 쉽게 저놈들을 쓸어버리는 게 가능할 줄이야.”
율호왕은 엘릭이 여태껏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엘릭을 바라봤다.
“마법이란 거… 아주 신기하군.”
엘릭이 율호왕에게 내민 작전은 아주 간단했다.
제2군단이 군락지 근처까지 오도록 유도했다가, 마법을 사용해 화식환의 냄새를 그쪽으로 흘려버리자.
그리고 마지막에 어부지리를 취하자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간단한 술책이었지만, 마법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작전이었다.
제2군단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데스웜에게 휘말리지 않기 위해 바람을 등진 곳으로 접근하고 있었으니까.
“저도 독학으로 배운 거라 수준이 그리 높지는 못합니다. 다만, 수인족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 무작정 배척할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이다. 다른 동족들이 들으면 아주 까무러치겠지만.”
수인족은 마법이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하여 아주 불길한 학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율호왕은 그런 의견에 예전부터 반대를 해오곤 했다.
인간이 적이라면, 적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닌가?
“어쨌거나 이제 힘이 좀 빠졌다 싶으니 전리품을 수확해보도록 하지.”
율호왕은 양쪽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네워드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저들을 생포하시는 게 좋습니다.”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율호왕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면서 지면을 박찼다.
콰아앙!
쐐애애액-
“유, 율호왕이 이쪽으로 온다!”
“젠장…!”
네워드를 비롯한 퓨리의 제2군단은 하나 같이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들 모두 끊임없이 쏟아지는 데스웜으로 인해 대부분 진이 다 빠진 상태. 사망자도 적지 않게 있었다. 가져온 마도구도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그런 상황에서 저들을 상대하라는 것은 죽으라는 의미와 똑같았지만,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었다.
퍼어엉!
율호왕이 휘두른 일격에 가장 먼저 죽어 나간 건 네워드였다. 이미 네 마리나 되는 데스웜을 잡으면서 한쪽 팔이 날아갔던 그가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릭과 랄프 4인방을 포함한 친위대가 난입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가뜩이나 손발이 어지러운 판국에 친위대까지 휩쓸고 지나가니, 2군단은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엘릭은 굳이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슬렁슬렁 수인들을 상대하면서, 두 눈은 율호왕을 좇기 바빴다.
그가 펼치는 강체술은 엘릭이 익힌 강체술의 원형… 아니, 정확하게는 모태(母胎)가 된다.
그러니 되도록 많이 눈에 넣어둘수록 좋았다.
‘호왕가의 비술인 강체술이 탄생한 건, 율호왕이 각지에 있는 모든 강체술을 섭렵하고 체계를 일통했을 때. 그러니 지금 이 시기에 그걸 알 방법은 없어.’
엘릭의 심안이 요요히 빛났다.
‘하지만 뼈대라 할 수 있을 만한 건 있을 테니… 지금 저걸 숙지해둔다면 복구에 큰 도움이 되겠지.’
실제로 엘릭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결여되었던 부분이 상당수 채워지고 있었다. 잘못 해석한 부분도 꽤 있어서 수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율호왕의 옆에서 가장 크게 날뛰고 있는 랄프의 싸움도 지켜볼 수 있었다.
쿠르르-
주먹을 뻗을 때마다 대기가 터져 나갔다. 체술이 율호왕과 사뭇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저놈도 강체술 전승자였나?’
어쩐지 다른 똥개들이 랄프의 뒤만 유달리 쫓아다니더니. 아무래도 흑랑족 수장의 직계 혈족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팟!
어디선가 날아온 독침이 랄프의 목덜미에 꽂혔다.
“컥!”
난전 중에 미처 그걸 파악하지 못한 랄프가 도중에 헛바람을 들이키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죽어라!”
“랄프 님!”
“조심해, 랄프!”
뒤늦게 랄프의 위험을 눈치챈 똥개 3인방이 그쪽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적은 랄프 앞까지 다다라 있는 상태였다.
랄프도 이대로 죽는 건가 싶던 그때.
“…너?”
랄프는 자신과 적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그림자의 얼굴을 본 순간 눈이 커지고 말았다.
그동안 자신이 적대시했던 엘릭이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까!
강체술.
맹호출현.
엘릭이 펼친 동작은 아주 단순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를 따라 휘몰아친 광풍이 적을 단번에 찢어버렸으니까.
그러고 난 뒤에 엘릭은 재빨리 숨을 헐떡이고 있던 랄프의 상태를 확인했다.
“【나아라】.”
엘릭이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을 보고 몇몇 수인이 움찔거렸지만, 지금은 동료를 구하는 게 급선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창백했던 랄프의 안색이 겨우 온전하게 돌아오고.
“고맙….”
녀석은 그 말만 내뱉으면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잠깐 기절한 것뿐이니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 숙영지로 데려가서 휴식부터 취하게 하십시오.”
“그, 그러지!”
똥개 3인방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랄프를 업고 군락지를 벗어났다.
[그대가 왜 도와주는지 모르겠다면서 너무 당황해하는 것 같은데요?]
[흑랑족은 은혜를 잘 갚는다고 알려진 일족이니 투사로 인정받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엘릭은 가볍게 웃는 동백의 신을 뒤로 하고, 어느새 제압을 마친 율호왕을 바라봤다.
데스웜의 토벌도 거의 끝났는지, 전장이 많이 잠잠해져 있었다.
수십 마리나 되는 데스웜의 사체가 내뿜는 악취로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퓨리에서 사실을 알기 전에 바로 다음 작전, 들어가시죠.”
“그러지. 그리고 랄프를 도와줘서 고맙다.”
엘릭은 어쩐지 자신을 보는 율호왕의 시선이 많이 달라졌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율호왕은 이미 투항한 제2군단에게 일갈했다.
“지금부터 이들을 따라 우리는 퓨리의 본진으로 진격한다!”
* * *
제압한 제2군단의 포로로 위장, 퓨리의 심처까지 깊숙하게 들어간 뒤에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는 작전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진행되었다.
자칫 상대의 본진에 갇혀 자멸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율호왕은 이것이 평소 성벽 때문에 공략하기가 힘들었던 퓨리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거기서 엘릭은 뒷정리를 하겠다며 뒤로 빠졌다.
“작전을 입안한 건 너인데, 같이 가지 않겠다고?”
“제가 가봐야 인간이 끼어있다고 뒷말만 나올 뿐이잖습니까? 그리고 사실 이곳의 사체에서 새어 나오는 독극물이며 마기를 정화할 수 있는 것도 저밖에 없습니다.”
“그건 그렇다만….”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율호왕은 그래도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공을 고스란히 자신들이 가져가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괜찮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안 그래도 랄프의 상태도 계속 체크해야 합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금방 다녀오마.”
결국 율호왕는 계속되는 채근을 이기지 못하고 친위대와 함께 퓨리로 움직였다.
[다른 수인족들도 그대에게 적잖게 감격한 눈치던데…. 단 이틀 만에 평가를 송두리째 바꿔버리는군요. 실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 건데.]
[이런 걸 보고 일석이조라고 하는 겁니다. 꿩 먹고 알 먹고.]
엘릭은 동백의 신에게 한껏 웃어 보이고는 흉성의 인장을 발동시켰다.
율호왕 등 덕분에.
이제 폭렙을 할 시간이었다.
“【먹어치워라】.”
츠츠츠-
그림자가 지면을 따라 넓게 움직이면서 데스웜의 사체가 흘려댄 마기를 빠른 속도로 삼켜대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마치 목마른 사람이 허겁지겁 물을 마셔대듯이, 톱니 이빨은 빠른 속도로 마기를 빨아댔다.
나중에는 그걸로도 부족했던지, 톱니 이빨까지 나타나면서 데스웜의 사체들까지 갈가리 찢어먹고 있었다.
‘한 번 진화를 겪어서 그런가. 식탐도 장난이 아닌데?’
엘릭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먹어치우겠다는 흉성 인장의 탐욕에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물론, 그로서는 그만큼 마정석의 용해율이 올라가는 셈이니 좋았지만.
그리고.
화아아!
삭풍의 인장도 그만큼 차례로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물결무늬가 좀 더 선명해지고 많아지면서 소용돌이 형상이 그려졌다.
4성에 다다랐다는 증거였다.
그러다 그 많던 사체들이 전부 사라졌을 때.
꺼억.
그림자는 흡족하다는 듯 길게 트림을 하면서 다시 원래 있던 엘릭의 자리로 돌아왔다.
[군락지가 가진 마기도 적잖은 데다가, 데스웜만 수십 마리이니… 전부 소화하는 데만 한 세월이겠군요.]
동백의 신이 엘릭의 인장들을 신기한 눈으로 살피는 동안.
엘릭은 비교적 정화가 잘 이뤄진 땅에다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혹시 또 되감기가 이뤄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
.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뒤에도 되감기는 이뤄지지 않았고.
뾱!
오히려 엘릭에게 인사하려는 듯이, 새싹이 올라와 빛을 받았다.
[이제야 겨우 첫 번째 걸음을 뗐네요. 축하해요.]
‘됐다!’
엘릭은 드디어 모든 노력을 끝냈단 생각에 주먹을 꽉 쥐었다.
때마침 석판도 빛나고 있었다.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세 번째 제약이 해제됩니다.]
[염원 이해.]
화아악!
환한 빛무리가 엘릭의 동공 위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엘릭은 천천히 눈을 뜨면서 동백의 신을 바라봤다.
동백의 신이 왜 그러느냐는 얼굴로 보는데.
엘릭이 인상을 굳히면서 물었다.
“삭풍의 인장, 원래 동백 님의 것이었습니까?”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