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율호왕(律虎王)
요르가 안내한 곳은 무릎까지 올 정도로 큰 화초와 잡초 따위가 온통 넝쿨처럼 뒤섞인 채로 무성하게 자라나 있는 곳이었다.
“보다시피 여기에는 잡초든 약초든 종류를 알 수 없는 것들까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네. 그래서 이걸 일일이 고르려면 좀 힘들…!”
요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지금부터 해야 할 ‘노가다’에 대해서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엘릭이 갑자기 잡초 더미 쪽으로 불쑥 들어가 풀숲을 이리저리 해치더니, 뭔가를 아무렇게나 쑥 뽑아버리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걸 자세히 보니… 아낙수나문의 화초였다.
그것도 뿌리째 뽑힌!
‘저, 저게 저렇게 쉽게 뽑을 수 있는 거였나?’
요르는 한순간 자신이 잘 노출되어 있던 아낙수나문의 화초를 발견하지 못했던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건 아니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건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뭐해?”
“으응? 나, 나…?”
“이거 안 받고.”
엘릭의 시선을 받은 흑랑족은 얼결에 챙겨왔던 소쿠리를 내밀었고, 엘릭은 아주 당연하게 거기다 아낙수나문의 화초를 던져 넣었다.
“따라와.”
그러면서 훌쩍 풀숲으로 들어 가버리는데….
이번에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에 흑랑족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따라가.”
곧 정신을 차린 요르의 명령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뒤따라야만 했다.
그 뒤부터.
그는 짐꾼 노릇을 톡톡히 치르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엘릭이 풀숲을 뒤지다 몸을 일으킬 때마다 손에는 아낙수나문의 화초가 한 다발로 들려 있었으니.
이끼에 불과해서 이런 풀숲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걸 어떻게 그리 귀신같이 찾아내는지도 신기했지만, 전혀 다친 곳 없이 뿌리째 캐내는 건 더 요상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소쿠리는 금세 아낙수나문의 화초로 가득 차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거기 셋도 이리 와.”
엘릭은 요르가 말했던 빙열초나 아타락시아 풀, 그리고 타라반 따위도 아무렇지 않게 골라냈다.
결국 랄프를 포함한 흑랑족 모두가 죄다 차례로 불려가면서 짐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엘릭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지만.
“가야지?”
“….”
“….”
“….”
요르가 싱긋 웃으면서 어서 뒤따르라고 협박하는 통에 어떻게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요르를 비롯한 대원들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엘릭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이렇게 가능한 거지…?”
그들도 수인족답게 대부분 예민한 후각을 보유하고 있어 약초를 잘 찾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감각이 금세 무뎌지고 말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었고, 이따금 다른 약초들과 헷갈릴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엘릭은 전혀 그런 것이 보이질 않았으니.
손을 뻗는 족족 너무 쉽게 약초를 골라내는데, 오히려 저게 당연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엘릭이 심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초능을 가졌다는 것을 모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그들의 경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챙겨온 소쿠리가 수북하게 쌓인 쌓이자, 이번에는 건초로 쓸 수 있는 억새 풀을 모으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건 또 왜 모으나?”
“…음? 훈연하려면 당연히 재료 준비해야죠.”
“여, 여기서 바로 연단술을 시작하겠다고?”
“예.”
“…!”
“어이! 거기 똥개1, 이거 저쪽으로 날라. 똥개2, 너는 한쪽에서 불씨 붙일 준비하고. 똥개3은 이거 한데 모아서 재료 손질해.”
이제 엘릭은 흑랑족을 부리는 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검은 털을 가졌다면서 ‘똥개’라고 불러대기까지 했으니. 짐꾼에서 일꾼으로 업종 변경(?)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제발 도와달라는 얼굴로 요르를 바라봤지만.
“뭐 하냐, 이것들아! 어서 엘릭 형제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날래날래 움직여!”
“…!”
“…!”
“…!”
오히려 요르는 지금이 기회다 싶어 엉덩이를 발로 까버리기까지 했다.
‘이놈은 복덩이다! 우리 부족의 복덩이가 될 게 틀림없어!’
엘릭을 바라보는 요르의 두 눈에는 어느새 하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결국.
‘똥개’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엘릭의 진두지휘 아래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불을 붙이고, 직접 손질한 약초들을 끓여서 서서히 졸이는 귀찮고 힘든 작업을 손수 다 해야만 했다.
“어? 어어? 손질이 이게 뭐야! 너희 집 애한테 칼 쥐여줘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뿌리는 다 상하고, 이파리는 다 쓰게 되어버렸잖아! 다시!”
“그것도 못 옮겨? 투사 맞아? 그러고 밤에 힘이나 쓸 수 있겠어?”
“게을러 터져 갖고는! 빨리빨리 안 저어? 1분에 300회씩 저으라고 했잖아! 너 때문에 이거 망쳐서 다른 사람들까지 고생하게 할 거냐?”
더욱 미칠 노릇은 그들이 뭔가 실수를 할 때마다 엘릭의 잔소리가 폭탄처럼 계속 연달아 쏟아진다는 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파업을 하거나, 아니면 네가 직접 해보라며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요르의 눈치가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호가호위.
엘릭은 랄프와 흑랑족들의 체력은 물론, 정신력까지 박박 긁어내는 데 성공했다.
[불쌍한 아이들…. 그러게 왜 하필 메르빙거를 건드려서.]
오직 동백의 신만이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정작 본인들에게 그 마음은 전달되지 못했지만.
[하여간 옛날부터 메르빙거에게 찍혀서 꼴좋았던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죠. 참 다행이에요. 우리 신전은 저들과 관계가 좋아서.]
그러다 환단이 마무리되었을 때쯤에는.
“으어어… 죽… 여… 줘…!”
전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대다가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몇몇은 눈동자가 아예 뱅글뱅글 돌아가고,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대원들은 하나 같이 결과물을 보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우와!”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화식환이잖아?”
“아냐. 우리 쪽 아저씨들이 만든 것보다 더 순도가 맑아 보이는데? 방법은 크게 다를 게 없는 거 같은데 뭐가 달라진 거지?”
“데스웜이 아주 환장하겠는데.”
만족해하는 건 엘릭도 마찬가지였다.
‘청연의 미궁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질이 좋아.’
적게는 대략 1.5배에서 많게는 2.4배.
엘릭은 청연의 미궁에서 만들었던 화식환보다 이번 것이 그 정도로 효과가 더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태생이 개라서 그런가, 시키는 대로 일도 척척 잘하고. 이거 뽑아먹을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뽑아먹어야겠는데?’
그 순간, 랄프를 비롯한 흑랑족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한에 허리를 쭈뼛 세워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엘릭이 요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대장.”
“그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엘릭을 보는 요르의 시선은 이제 애정으로 가득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질이 좋게 나온 것 같은데, 이참에 대량생산 가시죠?”
“오, 그럴까?”
“예. 때마침 흑랑족이 후각도 이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제가 방법도 옆에서 계속 가르쳐줬으니 이제는 크게 가르칠 것도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럼 그러도록 하지.”
랄프와 흑랑족을 자신들을 앞에다 두고 갈아 넣네, 마네를 결정하는 엘릭과 요르를 보면서 순식간에 얼굴이 샛노랗게 지새고 말았다.
이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또 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뭐하니, 얘들아?”
수하들을 보는 요르의 눈가에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어서 안 움직이고.”
“….”
“….”
“…흑, 흐흑!”
그들의 항의와 의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
동백의 신만이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 * *
둘째 날 이후로.
율호왕은 엘릭이 올린 결과물을 보고 크게 만족해하면서 화식환과 관련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주었다.
물론, 감시역이자 협조자로 요르를 붙여준 건 당연했다.
덕분에 랄프를 비롯한 ‘똥개 4인방’은 아예 엘릭 아래에 배속되어 근방에 있는 용혈이란 용혈을 죄다 누비고 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해야만 했으니.
그들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우면 드리울수록, 안트로모프 부족에 쌓이는 화식환의 양도 나날이 늘어났다.
“음? 이 중 1할만 너에게 달라?”
“예. 쓸 곳이 있어서 그럽니다.”
율호왕은 데스웜의 군락지를 공략하기에 앞서 갑자기 엘릭이 던진 요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역하기만 하고, 맛도 없는 것을 대체 어디다 쓴다는 건지. 마기만 가득해서 영약으로도 못 쓰일 텐데.
“뭐, 어차피 네가 아니었다면 이만큼 양산하지도 못했을 테니 맘대로 해라.”
“고맙습니다.”
엘릭은 순간 입술 끝이 씰룩대려는 것을 겨우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지난 4일 동안 ‘똥개 4인방’을 영혼까지 갈아서 만든 화식환은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
그중 일부만 가져온다고 해도 남은 벌모세수를 완성하는 건 물론, 용해율도 아주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다 드디어 텃밭까지 일굴 테니까.’
엘릭이 데스웜의 군락지를 보면서 눈빛을 요요하게 빛내는 가운데.
“질러라.”
율호왕의 명령에 따라, 친위대들은 일제히 화식환이 가득 담겨 있던 통에 횃불을 집어넣고 군락지 위에다가 아무렇게나 던져댔다.
화르륵!
곧 화식환이 거칠게 타오르면서 검은 매연과 함께 역한 냄새가 사방을 진동하고, 군락지 일대가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쿠쿠쿠…!
지반이 크게 요동치면서.
쿠에에엑!
쿠어어어!
수십 마리에 달하는 데스웜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전원 전투 대기.”
하나라도 더 많은 화식환을 먹기 위해 서로 뒤엉키면서 다투는 데스웜을 보면서도, 율호왕이나 친위대는 모두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그 속에 섞인 엘릭도 마찬가지였다.
“공격 개…!”
“족장님, 큰일입니다.”
율호왕이 마지막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갑자기 척후병으로 보냈던 투사가 다급히 옆으로 달려왔다.
“뭐냐? 별거 아니면 죽는다?”
“우리 부족이 데스웜을 사냥한다는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저희가 공략을 시도하는 동안 뒤를 치려 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뭐?”
율호왕을 비롯한 친위대의 얼굴이 모두 일그러졌다.
퓨리는 최근 들어 안트로모프 부족과 가장 많이 날을 세우고 있는 부족이었다.
이전에 율호왕을 만나기 위해 고의로 들쑤시고 다녔던 부족들이 줄을 대고 있기도 한 곳.
수인 통합을 기치로 내세우는 안트로모프와는 정반대되는 길을 걷기도 했는데.
놈들이 감히 뒤통수를 치려 한다?
“하, 이놈들 봐라. 어떻게 요리하지?”
율호왕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살의를 드러내던 그때, 엘릭이 나섰다.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뭐지?”
“저희도 똑같이 뒤통수를 치는 겁니다.”
“호오?”
더 자세히 말해보라는 율호왕에게 엘릭은 설명을 늘어 놓았고.
“…그렇게 하신다면 퓨리를 손쉽게 잡아먹을 수도 있을 겁니다.”
곧 율호왕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씨익!
입꼬리가 크게 말려 올라갔다.
[어째 두 사람의 미소가 닮아 보이는 건 제 착각일까요.]
동백의 신이 엘릭과 율호왕을 번갈아 보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수천 년의 삶을 살면서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인성은 전염이 되는 것인가?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