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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100화 (100/405)

100화

율호왕(律虎王)

션이 오래전 엘릭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네가 하는 도발은 참 신기해.

-뭘?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존심을 팍팍 긁어 대서 결국 빡치게 된단 말이지. 참 그것도 재주야?

지금 랄프가 딱 그랬다.

“이 개새끼가!”

“개는 너지. 아냐? 왈왈.”

“죽여버리겠다아!”

쾅!

타고난 투사인 랄프도 사실 그 정도의 자극으로는 크게 반응하지 않아야 정상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고 평상시 하류로 취급하던 ‘인간’이 저런 표정을 지으니 정말 화가 났던 것이다.

물론, 엘릭도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라, 마력을 한껏 개방하면서 녀석에게 맞부딪치려는데.

“이것들이 감히 족장이 허락지도 않았는데, 부족원들끼리 싸우려 들어?”

엘릭은 별안간 옆에서 불어닥치는 광풍에 위기를 느끼고 몸을 한껏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콰르르릉!

콰르르-

랄프도 본능적으로 물러난 자리로 엄청난 높이의 모래 기둥이 치솟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똑같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율호왕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앞으로 쭉 뻗은 주먹에서 연기가 풀풀 휘날렸다.

엘릭과 랄프의 시선이 동시에 굳었다.

자신의 권위를 중요시하는 율호왕이라면, 분노가 당장 자신들에게로 쏠린다고 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랄프!”

“…예!”

“묻겠다. 너는 인간 형제….”

“엘릭입니다.”

“…엘릭의 제안에 따라 이번 싸움의 승패에 승복할 생각이 있느냐?”

엘릭은 율호왕이 아직 자신의 이름을 모르고 있단 생각에 재빨리 말해주었고, 율호왕은 거기에 맞춰 랄프의 동의를 끌어내고자 했다.

랄프는 허리를 쭈뼛 세우면서 대답했다.

“있습니다.”

“엘릭이 이긴다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셈이니 흔쾌히 형제로 받아들이겠다, 이 말이지?”

“예.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엘릭을 노려보는 랄프의 두 눈은 여전히 예리하기만 했다.

율호왕의 한쪽 입술 끝이 크게 비틀렸다.

“그거야 지금부터 싸워보면 알겠지. 인간 형제, 엘릭. 너 역시 스스로 이번 제안을 내걸었다. 혹시 이번 승부에서 패배하고, 설사 다친다고 하더라도 승복하겠나?”

“하늘 앞에, 스승님의 명예와 제 이름을 걸고 그러겠노라고 맹세하겠습니다.”

하늘은 수인족이 모두 공통적으로 믿는 신앙의 대상. 여기에 존경하는 스승까지 내걸겠다고 하자, 율호왕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지금부터… 싸워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쾅!

콰앙!

엘릭과 랄프가 재차 지면을 박찼다.

“【무장 개방】.”

화아아-

엘릭이 마력을 일제히 돌리기 시작하자, 마투술과 강체술이 강제로 깨어나면서 날카롭게 벼린 아귀감이 전신을 꽉 채우는 듯한 느낌이 났다.

냉혹의 인장과 흉성의 인장도 언제든 자신을 사용해달라며 환한 빛무리를 토해냈으니.

마력장이 만들어낸 기풍(氣風)이 파문을 그리면서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오오!”

“족장이 구해왔다고 하기에 그냥 별거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세만 봐서는 제법인 것 같지?”

“그래도 명색이 강체술을 배웠다잖아! 그럼 한 가락 하겠단 거겠지.”

“랄프는 몇 가락 하잖아?”

“그러니 더 재미있는 거지.”

강자를 숭상하는 전통을 가진 수인족답게, 그들은 일견 엘릭의 기세가 제법이다 싶자 흥미롭게 눈빛을 반짝였다.

그전에는 단순히 그의 사정이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라면, 지금 그들의 눈은 동지를 바라보는 것에 가까웠다.

“흥! 괴상한 짓거리를 잘도 하려 드는군!”

하지만 랄프는 엘릭이 단순히 허장성세를 부린다고 여기면서 코웃음을 쳤다.

“괴상한 짓인지 아닌지는.”

그럴수록 엘릭의 비웃음은 한껏 커졌지만.

“보면 알겠지.”

파락!

“…?!”

랄프는 엘릭과 부딪치기 직전, 갑자기 그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무, 뭐야?”

“어디 간 거지?”

다른 부족원들도 똑같이 놀란 눈이 되었다. 자신들의 예민한 동체 시력을 속이고 엘릭이 신기한 기술을 선보인 셈이니.

몇몇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감각이 아주 예민한 투사는 곧장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엘릭의 기척을 읽을 수 있었다.

“뒤!”

랄프가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한 박자가 늦은 뒤였다.

쐐애액-

엘릭이 이미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파고들면서 일격을 내뻗고 있었으니까.

강체술.

맹호출현.

“…컥!”

랄프는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양팔을 교차하려 했지만, 이미 엘릭의 정권은 그의 옆구리를 거세게 후려치고 있었다.

퍼어엉!

공기가 크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랄프의 몸뚱이가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강체술.

아호심양.

엘릭은 녀석이 반격을 가할 수 없게 연속으로 공격을 퍼부어댔다.

단, 인장이나 다른 마법은 아직까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쾅, 쾅, 콰아앙!

콰르르르-

“크허억!”

결국 랄프가 변변찮은 반격도 하지 못한 채로 실컷 얻어맞다가, 피까지 토하자 부족원들은 난리가 나고 말았다.

“오우야. 참교육 한번 제대로 들어가네.”

“저거 진짜 랄프 맞아?”

“캬! 동네북이네, 동네북이야.”

“너무 얻어맞기만 해서 나중에 얼굴 찐빵 되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런데 저 인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세잖아?”

“강체술도 그저 그런 모방형이 아니야. 초식이 아주 정교하게 이뤄져 있어. 연계도 자연스럽고. 저거, 물려준 사부라는 분이 대체 누구지? 저만한 급의 강체술을 익히고 계셨다면 수인 사회에서 이름이 유명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들은 평상시 자신이 힘 좀 쓴다며 거들먹대던 랄프가 곤혹을 느끼고 있는 것에 속이 시원하다 하면서도, 엘릭의 강체술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육체로 잘 맞지도 않았을 강체술을 어떻게 개량시킨 건지, 메커니즘을 궁금해하는 수인도 있었다.

콰아아앙!

그사이 엘릭이 재차 날린 일격이 랄프의 가슴팍에 작렬하면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고 있던 상의가 갈가리 찢기면서 곳곳에 자잘한 상처와 그을음이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랄프, 이만하면 엘릭 형제의 자격 증명은 충분하…!”

율호왕은 이 이상 전투를 계속해봤자 부족의 사기 진작에 좋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대련을 멈추게 하려 했다.

흑랑족의 얼굴도 계속된 부족원들의 조롱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죽여버린다아아!”

“이런.”

랄프는 이미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렸던지, 두 눈에 핏줄이 잔뜩 선 상태로 재차 달려들고 있었다.

어느새 수화까지 마쳐 2미터가 훌쩍 넘는 검은 갈기의 늑대인간으로 변한 상태.

율호왕은 그걸 보고 녀석을 막으려 들었다.

광화(Berserk)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엘릭은 여전히 태연했다.

[수인족은 아인종 중에서도 가장 야생에 가까운 성향이니만큼, 이따금 분노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면 본능만 남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럴 때는 피아도 구분하질 못하며 힘도 몇 배로 증폭해 제압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 주의해야만 한다.]

「마물 도감」에서 봤던 내용을 토대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이미 계획을 정립해둔 상태였다.

“【얼어붙어라】.”

엘릭이 손으로 땅을 짚는 순간, 그와 율호왕 사이로 빙판이 단단하게 깔렸다.

“마, 마법?”

“뭐야! 저 형제, 마법사였어?”

“강체술사라며! 저게 가능해?”

“마법사는 인간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고 들었는데? 워메이지? 뭐, 그런 건가?”

부족원들도 화들짝 놀라 웅성대는 가운데, 랄프는 달려오다 말고 얼음 위에 그대로 벌러덩 나자빠지고 말았다.

케케켕!

개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그런 소리가 났다.

“…와우.”

“우리 랄프, 동네북 맞네?”

랄프는 어떻게든 얼음 위에서 일어서기 위해 허우적댔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몇 번씩 미끄러져야만 했다.

이성을 되찾고 조심조심해서 자세를 잡아도 모자랄 판국에, 억지로 움직이려 하니 그게 잘 될 턱이 있나.

결국 랄프는 누가 봐도 마치 땅 위에서 물에 빠진 듯한 것 같은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고 말았다.

같은 흑랑족들도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두둔해주기 어려웠던지, 시선을 슬그머니 대련장에서 딴 곳으로 시선을 옮기고 말았고.

엘릭은 부족원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빙판 위를 조용히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느새 빙판에서 치솟은 냉혹의 사슬까지 랄프의 팔다리를 묶고 있어, 녀석은 엘릭을 보면서 ‘그르릉’하는 가래 끓는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시끄러, 새꺄.”

엘릭은 당수로 그런 녀석의 정수리를 세게 내리쳤다.

빠아악!

깨개갱, 깨갱!

랄프는 그대로 빙판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츠츠츠-

몸뚱이 위로 김이 솔솔 새어 나오면서 커졌던 체구도 다시 쪼그라들어 인간으로 변했다. 혓바닥을 길게 물고 있는 꼴이 영락없는 지친 개였다.

“기절만 시켰으니까 그냥 데려가.”

흑랑족은 엘릭의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달려와 랄프를 업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저들끼리 투덜거리는 걸 봐서는 종족의 수치가 되어버린 랄프를 온종일 갈궈댈 것 같았다.

“푸하하! 뭔 이런 싸움 아닌 개싸움이 다 있는 건지.”

율호왕은 모든 싸움이 끝나고, 파안대소를 터뜨리면서 다가왔다.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식으로 붙는 거였다면 저도 이렇게 쉽게 이기진 못했을 겁니다.”

엘릭이 파악한 랄프의 무위는 약 익스퍼트. 마법사로 치면 6써클의 마도사 급 수준이었다.

‘특히 수화와 광화를 보였을 때의 수인족은 같은 급의 인간들도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고 알려져 있고.’

그러니 엘릭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기는 건 쉽지 않아야 했지만.

엘릭은 랄프가 전혀 모르는 다양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녀석도 그걸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진다는 말은 안 하는군?”

“이러나저러나 결과야 똑같을 테니까요. 전 그냥 쓸데없는 곳에 힘 빼기 싫었을 뿐입니다.”

“자신만만하군. 하지만 편법을 썼든, 아니면 힘을 숨겼든 간에 전장에서는 이긴 놈이 장땡이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그리고.”

율호왕은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엘릭의 어깨를 두들겼다.

“고맙다.”

랄프에게 큰 해를 입히지 않고 제압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흑랑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부족 내에서도 상당한 전력을 차지하는 그가 부상을 입어서야 율호왕으로서도 많이 난감했을 테니까.

“부족의 형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어떻게 형제가 될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제는 아주 거짓말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군요.]

동백의 신이 던지는 핀잔은 그냥 무시했다.

율호왕은 엘릭이 던진 말에 적잖게 감격한 눈치였으니까.

“형제가 형제를 다치게 할 수는 없다라….”

그는 엘릭의 말을 가만히 되뇌더니 피식 웃었다.

“아주 간단하지만 당연한 그런 이치를, 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다른 부족 놈들도 알아야 하건만. 역시 그걸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달려야겠군.”

율호왕은 피식피식 웃더니 앞으로 성큼 나서서 크게 소리쳤다.

“승패의 결과에 따라 인간 엘릭을 우리 부족의 형제로 맞아들이고자 한다. 흑랑족의 랄프 말고 또 이의 있는가?”

“없수.”

“없습니다.”

“없어요!”

“찬성.”

“나도!”

부족원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부족 내에서도 유명한 투사였던 랄프를 직접 꺾어 자격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강체술까지 능수능란하게 선보이면서 이미 부족원들의 환심을 크게 사버린 상태였다.

“그럼 엘릭은 지금부터 우리 형제가 되었음을 선고한다.”

“좋아!”

“어이, 족장님. 새로운 형제가 들어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좋아. 오늘 하루, 특별히 술을 풀도록 하지.”

“야호!”

“족장님 만만세!”

그 순간, 품속이 잘게 떨렸다.

엘릭과 동백의 신이 재빨리 석판을 꺼내 살폈다.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두 번째 제약이 해제됩니다.]

[진명 공개]

엘릭은 화려한 빛을 내뿜는 바람의 인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인장이 품고 있는 내용이 저절로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면서 진명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의 진명은….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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