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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99화 (99/405)

99화

율호왕(律虎王)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짓을 잘도 저질렀군요.]

엘릭은 율호왕을 따라 다른 장소로 이동하던 중에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어느새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동백의 신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오토 한과 짧게 대화를 끝내고 이곳으로 바로 찾아온 참이었다.

[이렇게 나타나셔도 되는 겁니까? 아직 씨앗은 심지도 않았습니다만.]

[잠깐 들리는 정도는 괜찮답니다. 아, 참고로 본 녀는 벨렌체 왕과 머리통만 똑같은 호왕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에요. 일부러 그대 외에 다른 이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그게 가능한 걸까?

율호왕의 실력으로 봐서는 감각도 아주 예민할 텐데.

[본 녀에게 투명화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랍니다. 그리고 한낱 피조물에게 읽혀버려서야 신격 박탈이겠죠?]

신이 맞긴 맞나 보다.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정확하게 읽는 걸 보면.

겉보기에는 그냥 히스테리 부리기 좋아하고, 까랑까랑한 성격을 지닌 동네 백수 누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대, 지금 아주 불쾌한 생각을 한 듯 보이는 것 같은데요?]

설마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신격 모독적인 발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요.

[흥! 또 이상한 생각을 한 것 같다만 그냥 넘어가 주죠.]

동백의 신은 팔짱을 낀 채로 도도하게 콧방귀를 꼈다.

[그보다 어쩌실 건가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뭐긴 뭐겠어요? 당연히 저 머리통만 똑같은 호왕에 대한 이야기지. 저 의심 많은 작자가 정말 그대를 ‘동료’로 받아들여 줄 거라고 믿는 건가요?]

이런 거였나.

엘릭은 어쩐지 동백의 신이 왜 난데없이 나타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 실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이번 공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찾아온 모양이었다.

뭐랄까. 글을 재미있게 보던 애독자가 뒷내용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작가를 직접 찾아가는 듯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엘릭은 도도한 겨울꽃의 여왕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귀여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안 믿을 겁니다.]

엘릭은 자신을 따라가지 않겠냐는 율호왕의 제안을 아주 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부족이 있다는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럼…!]

[하지만 저를 옆에다 두긴 할 겁니다.]

동백의 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수인족이 아무리 인간을 증오한다고 한들, 결국 현재 체제는 부족들 간의 대립이 가장 극에 달해 있을 때입니다. 괜히 저들끼리도 이 당시를 ‘전국시대’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호오?]

[결국 어느 부족이 되었든 간에 전력감이 될 수 있는 ‘실력자’는 출신을 막론하고 기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야심 넘치는 율호왕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감시용으로도 괜찮잖습니까?]

[하긴. 그럴싸하군요.]

동백의 신은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 후련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이대로 그냥 긍정하기엔 조금 얄미웠던지, 조금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수인족의 증오는 아주 크답니다. 현시대에도, 이때에도 마찬가지죠. 율호왕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족원들이 그렇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제는 스포일러라도 해달라는 모양새였다.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납득하긴 할 겁니다.]

[어째서?]

[저들 부족이 가진 특징 때문에요.]

[…?]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동백의 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군. 부족 안트로모프는 원래 이단아들의 모임이었지.]

[그리고.]

[또 있나요?]

[사실 안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

[율호왕의 마음을 살 방법을 찾을 때까지 계속 되감기하면 되잖습니까?]

동백의 신은 기가 찬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 인상을 팍 굳혔다.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요? 아무리 되감기가 된다고 그걸 계속 반복해서 인간에게 좋을 리가 없을 텐데요.]

[아뇨. 잘 아니까 그런 겁니다.]

[뭔…!]

[정말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엘릭은 처음 겪었던 안배를 떠올렸다.

죽고, 또 죽어야만 했던 설산왕과의 싸움.

그로 인해 정신이 마모되면서 미칠 것 같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설산왕을 이해하고 정신을 더 단단하게 다질 수 있었다.

죽음을 쉽게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동백 님이 ‘시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걱정이 들었던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경험하는 시간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

엘릭은 덤덤하게 말하다 말고, 갑자기 동백의 신에게서 아무 반응이 보이질 않자 슬쩍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백의 신이… 날개보다도 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동백 님?]

[오, 왜, 그러는 건가요!]

[왜 갑자기 얼굴이 그러신… 아하?]

[무, 뭐냐!]

동백의 신은 엘릭의 한쪽 입꼬리가 씰룩대는 것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엘릭의 미소를 더 짙게 만들었다.

[신도 부끄러움을 타시나 봅니다?]

[…아니에요.]

[맞네. 부끄러움 타시는 거.]

[아니라고 했어욧!]

[눼이눼이. 예. 잘 알겠습니다.]

[야!]

동백의 신이 길길이 날뛸수록 엘릭의 입가에는 미소가 씰룩거렸다.

‘선조 님이 왜 동백의 신을 계속 괴롭히시는지 잘 알 것 같은데…. 조부님도 이러셨으려나?’

동백의 신은 감히 불경하게도 엘릭이 신격 모독적인 생각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신벌을 내릴 방법이 없어 짜증이 날 것만 같았다.

‘어떻게 된 게 선조고 후손이고, 어찌 메르빙거란 작자들은 죄다 이 모양인 건가요!’

물론, 이렇게 속으로 한탄을 늘어놔봤자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동백의 신은 자신이 평생 내린 선택 중에 가장 잘못된 선택이, 바로 이 메르빙거 족속들과 엮인 게 아닌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 * *

“으아아! 족장님! 제발 이런 무리한 짓 좀 그만하시라구요! 우리 전부 심장 떨어진단 말입니다아!”

엘릭이 율호왕과 함께 도착한 부족 ‘안트로모프’는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랑했다.

마치 떠돌이 유목민처럼 여러 개의 막사를 원형으로 배치하고, 중앙에 마련한 공터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훈련도 같이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매번 사고 치기 바쁜 족장이라고 해야 할까?

율호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전투 대기 상태에 있던 투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강체술 쓰는 인간이 있다면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옆에 있는 거, 저거 설마?”

“인간이다! 인간!”

부족원들은 하던 일을 다들 멈추고 허둥지둥 수화(獸化)를 전개했다.

‘와우. 엄청 다양한데?’

이 당시 수인족의 전통은 호인족이면 호인족, 서서족이면 서서족 등, 부족과 혈통으로만 뭉친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텐데.

지금 보이는 면면은 종류가 엄청 다양했다.

“다들 멈춰! 이놈은 우리 형제다!”

율호왕의 윽박질에 부족원들은 엘릭에게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형제?”

“인간이 대체 어떻게 형제가 된다는 거야!”

‘대체 옛날에 제국은 뭘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다들 이러는 거야?’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을 긴장한 것으로 판단한 율호왕은 재빠르게 나서서 부족원들을 설득했다.

엘릭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

그리고.

‘…우네?’

율호왕의 설명이 얼마나 그럴듯하던지, 부족은 삽시간에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형제의 스승님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시기 전에 그러셨다더군! ‘비록 우리의 인연은 인간과 수인이라는 넘을 수 없을 종족의 한계에 부딪혔다지만, 떠날 때는 그런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스승과 제자로서만 남을 수 있게 되어서 고맙구나.’라고! ‘다음 생에서도 이렇게 다시 이렇게 만나자’고!”

‘…내가 저렇게까지 말했었나?’

엘릭은 이리저리 양념이 가득 섞인 사연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으헝헝헝!”

“아이고, 스승님!”

“그 스승님이라는 분이 어느 분이신지는 몰라도, 그런 분을 모실 수 있어 그대는 참으로 복되었구나.”

“아, 예. 예….”

엘릭은 어느새 자신을 ‘형제’라고 받아들인 수인들을 보면서 식은땀을 적잖게 흘려야만 했다.

하나 같이 맹수의 탈을 쓴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율호왕이 엘릭에게 다가와 슬쩍 귀띔했다.

“적당히 맞장구쳐라. 이놈들은 죄다 바보들 투성이니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잘 믿는다.”

엘릭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면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현실에서도 상당히 순진하다 싶긴 했지만, 아무래도 400년 전에는 그보다 훨씬 심했던 모양이었다.

[이제는 없던 스승이라도 진짜 만들어야 할 판이로군요.]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던 동백의 신은 기가 찬다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혀를 차면서 엘릭에게 짓궂게 물었다.

[거짓말이란 게 원래 구르면 구를수록 계속 커지는 법이긴 하지요. 어떠신가요? 그대도 사람이면 조금 미안할 마음이 들…!]

하지만 엘릭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거, 잘하면 골수까지 완전히 쪽쪽 뽑아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 사람이 아니죠!]

엘릭은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제가 아무리 막 나가도 저에게 호의적인 사람들까지 그렇게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선은 지킨다구요.]

션이 들었다면 거품을 물 소리를 잘도 태연하게 해댔다.

[그냥 조금. 아주 조금만 빼먹을 겁니다.]

[…어째 그대가 말하면 농담도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단 말이죠.]

[글쎄요? 흐흐.]

동백의 신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또 이런다고 해서 호락호락하게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정말 호구란 뜻이겠죠.]

엘릭은 여전히 자신에게서 사나운 눈빛을 거둬들이지 않는 일원들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반대야.”

검은 머리를 갈기처럼 길게 늘어뜨린 자들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꼬리뼈 부근에 길게 나 있는 꼬리가 그들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흑랑족.

[노루스 재상의 직계 선조들이로군요. 제 기억에도 있어요. 아주 열성적으로 살던 아이들이었으니까. 율호왕의 충견이기도 했고. 아니, 그 정도면 엽견(사냥개)이란 말이 맞으려나?]

부족 안트로모프에서 율호왕을 제외하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 중 가장 인상이 사나운 사내가 엘릭을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으르렁대고 있었다.

“랄프. 지금 족장인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크르르!

율호왕의 기세가 얼마나 거세던지, 마치 적을 만난 호랑이처럼 낮은 울림이 섞여 나왔다.

랄프라 불린 흑랑족 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원들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조, 족장! 우리말은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뭐라는 거냐?”

“그게…!”

“우리 안트로모프의 정체성이 뭐였는지 그새 잊은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네놈의 모가지부터 내가 직접 비틀어주마.”

랄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안트로모프의 정체성. 그것은 씨족도, 혈통도, 달랐던 그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이상이었으니…!

그것을 부정한다고 낙인이 찍힌다면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뭐라고 항변을 하려던 그때.

“모든 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내쳐져야만 했던 이들이 모인 소굴. 부족을 자칭하지만, 그런 부족의 경계를 깨뜨리고 모든 수인을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게 안트로모프의 목표라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여태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엘릭이 입을 열었다.

율호왕과 랄프 등, 모든 부족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쏠렸다.

율호왕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신념을 알고 있었나?”

“설원의 여기저기를 유랑하면서 주워들은 적이 있습니다. 갖가지 문제로 부족을 나와야만 했던 반항아와 범법자들이 뭉친 집단이 있다구요. 여러 부족에서 공적으로 취급하지만, 그 성세는 날이 갈수록 부쩍 커지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율호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평생을 들여 일군 부족을 칭찬하는데 누가 싫어할까.

더군다나 엘릭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하는 바까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저는 인간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이름도 모르는 스승님께 은혜를 받아 강체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족장님은 그런 저를 애석하게 여겨 형제로 받아들여 주셨으니, 이 또한 족장님께서 평상시 추구하시는 이상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흐응! 역시 메르빙거라 그런가, 말 하나는 참 번드르르하게 잘한단 말이죠.]

“그렇다면 저 역시 그 기대에 부응하고, 그 이상에 함께 위해서는 그만한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율호왕은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어 뒤로 슬쩍 빠졌다. 자신이 더 이상 두둔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이 잘 풀리겠다 싶었던 것이다.

랄프도 더 이상 율호왕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 여겼는지, 다시 살기를 풀풀 날렸다.

잔뜩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날 정도였다.

“자격을 증명하겠다? 뭐 어쩌겠단 거지?”

“수인족의 서열은 힘으로 가려진다죠? 그러니 한 판 붙읍시다. 내가 이긴다면 부족원이 되는 거고, 지면 알아서 떠나드리지. 어때요? 콜?”

“감히 인간 따위가 투사인 나에게…!”

“혓바닥이 기네.”

엘릭이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왜? 쫄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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