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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98화 (98/405)

98화

율호왕(律虎王)

콰아아앙!

콰르릉, 콰르르-

우르르르!

“저 미친놈 잡아라!”

“잡긴 뭘 잡아! 그냥 산 채로 튀겨버려!”

“씹어 먹을 새끼! 거기 안 서? 서란 말이다아아!”

백주대낮부터 흑의 설원 한복판에서는 때아닌 술래잡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여러 수인족 중에서도 발이 가장 날래다고 알려진 서서족이나 광견족(狂犬族)조차도 인간 한 명을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

때문에 그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인간 한 명을 잡지 못해 전전긍긍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욕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런 인간이 부족 한가운데에 들어와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정면에서 부딪쳤을 때 줄줄이 깨져나가고 있다는 점은 치욕을 넘어 수치나 다름없었다.

특히 부족 내에서도 손꼽힌다는 투사들이 나가떨어졌을 때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더 큰 문제는.

콰콰콰쾅!

“대체 어떻게…!”

“어째서 인간이 강체술을 쓰고 있단 말이냐!”

수인족 내에서도 아주 귀한 혈통만이 익힐 수 있다는 강체술이 인간의 손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수인들의 눈에 너무나 괴이하기만 했다.

펑, 퍼펑, 퍼퍼퍼펑-

쿠르르르-

“쿠에엑!”

“케엑!”

주먹을 휘두르는 족족 수인들은 방망이에 맞은 야구공 신세가 되어 줄줄이 튕겨나야만 했고.

거기서 퍼진 충격파는 가뜩이나 볏짚을 쌓아 만들어 조악하기 짝이 없는 움막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말았다.

결국 엘릭이 지나간 자리는 개판 오 분 전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지경이었고.

몇몇 나이 많은 원로들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다.

마법이면 마법. 강체술이면 강체술.

저 금발의 인간은 정말이지 그들이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 존재였다.

여태 수인족이 주로 만난 인간이라고 해봤자, 떼로 움직이는 노예 사냥꾼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죽여버리겠다…!”

“도망치려 한다! 저쪽 길 막아!”

수인들 여럿이 분노를 활활 불태울 때쯤.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금발의 사내, 엘릭은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아직도 안 나타난다고?’

엘릭이 여태껏 짓밟고 다녔던 마을은 총 6개.

그동안 30여 번에 걸쳐 리셋을 하면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미리 위치를 파악해뒀던 곳들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율호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들이기도 했다.

그런 곳을 일일이 인간이 직접 들쑤시고 다녔고, 강체술을 여러 차례 선보였으니 슬슬 반응을 보일 때가 됐는데….

엘릭은 아직 소문이 덜 퍼졌나 싶어 다음 마을로 이동할까 마음을 먹으려던 그때.

오싹!

“…!”

갑자기 등골을 타고 섬찟한 뭔가가 올라왔다.

그건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것이었으니.

아귀감을 익힌 이래, 아귀감이 가장 크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엘릭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질주하다 말고, 옆으로 방향을 꺾어 바닥에다 몸을 굴렸다.

콰아아앙!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로 아슬아슬하게 뭔가가 세게 틀어박혔다.

‘리, 리셋 될 뻔했다…!’

엘릭은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큰일 날 뻔했단 사실에 식은땀을 흘리며 그쪽을 바라봤다.

“…벨?”

벨렌체 왕이 이대로 나이를 먹어 성장하면 저렇게 될까?

2미터도 넘는 거구. 30대 초반의 호쾌한 인상. 하지만 얼굴은 어쩐지 벨렌체 왕의 이목구비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렇기에.

엘릭은 상대가 자신이 그토록 찾던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제 이름은 위대한 율호왕 님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율호왕께서 그러셨듯이, 무너져가는 왕가를 다시 부흥시키라며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었죠.

벨렌체 왕은 꽃의 신전으로 오던 중에 엘릭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엘릭을 만나면서 퓨리의 첩자들을 쓸어 내고 다시 절대 왕권을 틀어쥔 지금.

퓨리의 야욕에 맞서서 새롭게 왕가를 일으켜 세울 것이라며 포부를 앞장세우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똑같은 건 이름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400년 전인 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리도 얼굴이 똑같을 수 있는 건지.

‘핏줄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율호왕(律虎王).

당대 호왕가의 위대한 시조이자, 수인 연합의 초대 맹주.

400년 전, 흑의 설원에서 일어나 여러 수인족의 도시를 통합하고, 마물을 맘껏 부리며 북방의 대군주로 떠올라 제국의 공포가 되었던 그가… 바로 자신의 앞에 있었다!

“호오? 생각보다 감각이 예민한데? 뭐냐, 너? 정말 인간이 맞기는 하나?”

킁킁!

율호왕은 코를 씰룩대면서 엘릭의 냄새를 잠시 맡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냄새는 인간이 맞는데. 어떻게 된 건지를 모르겠군. 인간이 익힌다는 마법도 우리들의 강체술처럼 여러 갈래가 있어서 다양한 신비를 추구한다더니. 인간, 네가 익힌 마법이 그런 건가?”

단 몇 마디만 내뱉었을 뿐인데도, 율호왕은 인간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보이고 있었다.

‘돌아가는 정세를 봐서는 아직 율호왕이 수인 연합을 결성하기 전… 그런데도 이만큼 견해를 지니고 있단 건, 이미 오래전부터 장벽 아래를 경계하고 있던 것으로 봐야 할까?’

엘릭은 당장 율호왕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마법 무장을 전개, 대비를 마쳤다.

순간, 엘릭을 따라 마력향이 짙게 감도는 것을 맡고, 율호왕의 두 눈에 이채가 어리는데.

“유, 율호왕!”

“당신이 여기에 왜 이곳에…!”

어느새 엘릭과 율호왕을 에워싼 수인들이 기함을 터뜨렸다.

분명 수적으로 그들이 훨씬 우세한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인들의 얼굴에는 바짝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아니, 그것을 훨씬 넘어선 감정이 배어 있었다.

공포.

“왜? 내가 와서는 안 될 곳이라도 왔나?”

율호왕은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그러자 시선이 마주친 수인들은 저마다 움찔거리면서 뒤로 주춤 물러서야만 했다.

율호왕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

순간, 수인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아무도 여기에 대해 반발하지 못했다.

‘역시. 패기가… 만만치 않네.’

엘릭도 율호왕이 주는 압박감을 받긴 했지만, 정면이 아니라 옆으로 살짝 빗겨낼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롭게 심안으로 그를 살필 수 있었다.

심안에 비친 율호왕은 호랑이였다.

집채만 한 크기를 가진 호랑이.

마치 재미난 유희 거리를 찾은 것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지만, 그런 여유가 보는 이로 하여금 더더욱 심장을 바짝 옥죄이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다행히 힘은 전성기가 아닌 것 같은데…. 하긴, 안트로모프가 건설되기 전이니. 아직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전인 거구나.’

듣기로 전성기 시절의 율호왕은 현시대의 5체인(Penta-Chain), ‘슈페리어’ 급도 넘을 정도였다고 하니.

하지만 지금은 흔히들 말하는 4체인(Quadra-Chain), ‘마스터’의 경지로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마스터에서 슈페리어로 넘어가는 중간지대 정도?

더구나 실제로도 지금은 아직 많이 잡아봐야 20대 후반? 아니면 30대 초반? 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정면에서 부딪쳤다간 바로 피떡이 되고 말겠지. 역시 율호왕과 관련된 부족이 아니라, 적대 부족을 들쑤시고 다녔던 게 정답이었어.’

엘릭은 절대 율호왕의 휘하에 있는 부족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단기간에 율호왕의 호감을 사는 것이었지, 적개심을 사려는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냥 들쑤시고 다닌다면 ‘웬 노예 사냥꾼이 또 왔나보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으니, 고의로 강체술을 선보였다.

여태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율호왕의 행적이 사실이라면, 그가 호기심과 모험심이 많은 성격일 거란 판단에서 내린 계획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목표는 고스란히 적중한 것 같았다.

율호왕은 어느새 이쪽에서 등을 돌리며 엘릭을 쫓던 수인들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있었다.

엘릭을 보호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

‘아니. 이건 보호라기보다는 삥 뜯는 동네 형 느낌인가?’

엘릭이 그런 생각을 동안, 율호왕이 으르렁거렸다.

“덤빌 거 아니면 썩 꺼져.”

수인들은 전부 식은땀을 흘리면서 주춤거렸지만, 몇몇은 용기를 갖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베, 벨렌체! 지금 인간을 두둔하려는 것이냐?”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인간은 우리 수인들의 공적이다! 그를 두둔한다면 너 역시 같은 부류로 묶이게 될 것이야! 그런데도 모든 수인을 적으로 돌릴 것이냐!”

성토에 가까운 야유.

하지만.

“응.”

율호왕은 아주 당당했다.

“무사할 것 같은데?”

“무, 뭣…?”

“무사할 것 같다고. 아니면 너희들이 뭘 어떻게 할 거지?”

“….”

“….”

모든 수인을 적으로 돌리고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패기에 수인들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덤비라고. 응?”

벨렌체 왕은 언제든 좋다면서 손을 까닥거렸다.

결국.

“…돌아간다.”

“하, 하지만!”

“돌아간다고! 이 일은 상부에 보고하고 다른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무조건 근신이다!”

수인들은 꼬리를 말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투사급의 인사들은 부족을 들쑤셔놨던 인간을 눈앞에서 놓친다는 사실에 분개했지만, 율호왕이 그쪽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리고 말았다.

엘릭은 속으로 적잖게 놀라야만 했다.

‘적진 한가운데에 쳐들어왔는데도 아무도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한다니. 대체 뭐 어떻게 해먹은 작자이기에….’

그때, 율호왕이 엘릭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고맙습니…!”

“인사는 됐고. 그런데 너.”

엘릭이 자세를 바로 하며 예의를 갖추려는데, 순간 율호왕이 엘릭의 멱살을 붙잡고 얼굴을 이쪽으로 바짝 붙이면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흉포한 웃음.

“날 아나?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강체술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고?”

마치 그 웃음이, 산중제왕이라는 호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지? 아니면 못하는 건가?”

“이걸… 놓아주셔야…!”

“흠!”

엘릭이 율호왕의 주먹을 두들기면서 숨이 막힌다는 수신호를 한 뒤에야 율호왕은 멱살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매서운 호안(虎眼)은 여전히 엘릭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도망을 친다거나, 조금이라도 쓸데없는 짓을 벌인다면 바로 머리통이라도 박살 내려는 듯.

“켁켁! 으, 진짜 죽다 살아났습니다.”

“진짜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만. 빨리 말 안 하냐?”

엘릭은 정말 까닥했다간 안배를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고아 출신입니다.”

“그게 뭔 개뼉다구 같은 소…!”

“제 부모님은 제국 정부의 무거운 세금 때문에 흑의 설원으로 도망치셔야만 했던 화전민 출신이셨습니다. 그러다 힘겹게 절 낳다가 마물에게 돌아가시고,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어린 저를 어느 수인께서 구해주셨습니다.”

우연이라도 그를 만났을 때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미리 해두었던 덕분인지, 그럴듯한 사연이 줄줄이 나왔다.

메피스토나 션이 봤으면 질린다는 기색을 지었을 게 분명한 거짓말.

“그분께서는 험난한 이곳에서 어린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을 보호할 만한 수단이 한두 가지쯤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배운 게 방금 보인 체술이고?”

“예. 그렇습니다.”

“그 수인의 이름이 무엇이냐?”

“스승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리셨다며 끝까지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저도 마지막까지 제자로 인정해주시지 않으셨던 것을, 제가 마음속으로나마 스승님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 고작입니다.”

율호왕은 거짓 유무를 밝혀내려는 듯 한참 동안 엘릭의 동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 *

「마물 도감」에는 데스웜과 마찬가지로, 수인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이 되어 있었다.

마물은 아니었지만, 그만큼이나 인간들에게 ‘유해하다’고 판단되는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설명문 중 엘릭이 가장 크게 기억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수인족: 평상시에는 사람과 똑같은 외양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야생의 짐승에 더 가까운 아인종.]

[그런 만큼 일반 인간보다 훨씬 강한 근력과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투사’라 불릴 정도가 되면 상대의 심장 박동수를 직접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리한 눈으로 근육의 긴장도까지 알아본다.]

[그런 여러 정보를 추합해서 상대의 상태를 파악해 전략을 짜기도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예민한 감각으로 상대의 긴장도를 알아본다는 것.

이 말은 인위적인 거짓말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

‘아카데미에서도 거짓말 탐지기 같은 마도구는 제작이 상당히 까다로운데, 이들은 이미 400년 전부터 그걸 밥 먹듯이 하고 있으니….’

그러니 일반적인 수인들보다 훨씬 감각이 예민할 율호왕은 더 자세히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릭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인위적으로 혈류를 조절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션과 카를 등은 그더러 연기를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들조차 혀를 내두르면서 제일이라고 인정한 부분이 있었다.

뻔뻔한 낯짝!

“…‘형제’인 건 맞나 보군.”

형제.

그것은 강체술을 익힌 전승자들 사이에서 서로를 일컫는 단어였다.

피는 나누지 않았어도, 같은 맥(脈)을 잇고 있으니 정서적으로는 형제라는 뜻이었으니.

즉, 엘릭을 인정하겠단 뜻이었다.

당장은 별다른 이상을 찾을 수 없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눈빛은 사나웠다.

수상쩍은 행동을 보인다면 바로 목을 쳐버리겠다는 듯.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인 그대를 믿은 게 아니다. 강체술이 맺어주는 하늘의 인연을 믿는 거지.”

하늘.

저들의 언어로 ‘텡그리’라고 믿는 개념신은 수인족이 공통으로 믿는 최고신이었다.

그리고.

곧 예상대로 그의 입에서 기대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 형제여, 이 척박한 대지에서 어디 몸 누일 곳은 있나?”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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