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율호왕(律虎王)
엘릭이 율호왕을 만나려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빡치게 만들자.’
그런다면 할 건 많아도 너무 많았다.
* * *
[으음… 정말이지 이제야 좀 살 것 같군요. 오랜만에 눈을 뜨려니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어요.]
동백의 신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양손으로 눈덩이를 문지르면서 늘어져라 하품을 해댔다.
그러다 검지로 눈가를 살살 긁으면서 눈곱을 떼서 옆으로 튕겼다.
평상시 그녀가 추구하는 ‘여신’으로서의 기품이나 교양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뭐, 아무렴 어떠랴?
그것이야 수백 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꼬맹이 같은 다른 겨울꽃의 신들이나, 신도들이 있는 곳에서나 조심하면 될 뿐.
혼자 있는 이곳에서는 괜찮…!
“심각한 잠버릇은 여전하더군.”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동백의 신은 손톱 끝을 매만지다 말고, 여기서 절대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에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오토 한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짓궂게 웃었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당연하죠! 여기는 본 녀의 방인 것을…! 감히 숙녀의 공간에 외간 남자가 함부로 발을 들이다니! 지금 제정신인가요!]
이곳은 꽃의 방.
꽃의 신전에 거주하는 모든 꽃의 신들에게 개별로 주어지는 심상 세계, 혹은 별세계(別世界) 같은 곳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주인의 허락 없이는 절대 들어올 수 없건만.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오토 한은 손쉽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과연 메르빙거의 중시조라 해야 할는지, 아니면 참 뻔뻔한 작자라고 해야 할는지. 오토 한은 동백의 신이 던진 핀잔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내가 외간 남자였나? 이거 아쉬운걸. 그래도 한때 그쪽의 구애도 상당히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
[흥! 이미 임자가 있는 대상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본 녀의 철칙인 것을요.]
“그러기엔 내게 너무 많이 매달렸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더니 그새 치매라도 앓은 것인가요? 본 녀는 애첩에게도 항상 은총을 내려주면 주었지, 구애를 하진 않…!]
“후아주였나? 하여간 술에 잔뜩 취해서는 다짜고짜 찾아와서 그놈의 거룡 산맥에 좀 그만 가라면서 잔소리를 쉴 새 없이 해댔…!”
[그 입 좀 닥치지 못하겠어욧?]
한순간, 동백의 신은 화를 참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버럭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그녀로서는 계속 속을 벅벅 긁어대는 오토 한이 얄밉기만 했으니.
그러다 동백의 신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좌절하고 말았다.
[아아. 교양 없게 이런 상스러운 말을 쓰다니…!]
“허허! 나이를 먹어 변한 건 그대였나보군? 그래도 교양을 잃지 않던 그대의 입에서 그런 상스러운 말이 나올 줄이야.”
[그 주댕이 좀 닥치라구욧!]
“허허허허!”
[아아아악!]
동백의 신은 껄껄 웃음을 터뜨려대는 오토 한이 너무 얄미워 죽을 것만 같았지만, 당장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애석하기만 했다.
그러다 다시 심리적 좌절감을 맛보면서 한숨을 내쉬어야 했으니.
[자고 일어나면 좀 어른이 되었을 줄 알았던 꼬맹이들은 여전히 그대로고, 이제는 사념만 남은 유일한 지우도 이딴 꼴이라니…! 한때, 겨울 궁전의 여왕으로서 ‘팔한(八寒)’과 ‘파로스’의 수장이었던 본 녀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고 만 건지! 아아! 애통한 세월이여! 원통하고 또 원통하도다!]
“어쩌다 그렇게 되긴. 마족한테 홀라당 털어 먹혀서 그렇게 된 거 아니었나. 그러게 누차 대국적으로 정치하라고 말하지 않았었나.”
[아직도 안 꺼졌어욧?]
동백의 신이 내뱉는 일갈에 오토 한은 다시 껄껄 웃음을 터뜨리다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화제를 돌렸다.
“뭘 그렇게 화를 내나. 어차피 옛날 일인 것을. 지금은 기억하는 이조차 없는데.”
[없죠! 이 시대의 누가 신화와 전설로 가득하던 당시를 기억하겠나요! 본 녀에게조차 너무나 까마득한 옛날이고, 꼬맹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인 시대인 것을.]
동백의 신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당시에 품었던 한이! 백성들이 내뱉던 절규가! 비명이! 원념이! 이 가슴에 꽁꽁 얼어붙은 채로 남아있는 것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요?]
동백의 신은 이제 이글대는 눈빛으로 오토 한을 노려보았고.
오토 한도 더 이상 그녀를 자극해서는 아는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선을 넘었던 것 같군. 그건 내가 사과를 하도록 하지.”
[정말이지 당신은…! 하아!]
동백의 신은 아무리 얄밉게 굴어도 결국 사과가 필요할 때는 지체하지 않고 사과하는 오토 한의 태도가 못마땅할 뿐이었다.
이래서야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잖은가.
물론, 그런 매력 때문에 한때 그를 자신의 첩으로 두고자 몇 번씩이나 추파를 던졌던 것이지만.
[…됐고. 당신과 이야기를 길게 나눠봤자 제 머리만 아파질 뿐이겠지요. 대체 무슨 일로 여길 온 건가요?]
“음? 딱히 이유는 없네만. 굳이 찾자면… 심심해서?”
[당신…!]
“물론, 농담이고.”
오토 한은 동백의 신이 다시 폭발하기 일보 직전에 슬그머니 화제를 돌려버렸다.
“괜찮나 말일세.”
[….]
동백의 신은 가만히 말없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거였다.
오토 한을 미워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인상을 계속 찡그리면 주름이 질 텐데?”
[그건 본 녀가 신경 쓸 일이니 당신은 신경 끄세욧!]
동백의 신은 일갈을 내지르고는 쀼루퉁한 표정이 되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40년이에요. 본 녀가 잠든 것이. 고작 그것으로 회복이나 될 것 같나요?]
“안 되겠지. 그래서 물어본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서.”
[…흥!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란 것이에요. 본 녀의 건강은 본 녀가 알아서 챙길 테니.]
동백의 신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여전히 푸근한 미소로 이쪽을 보는 오토 한을 슬쩍 곁눈질하면서 말꼬리를 재빨리 이었다.
[그래도 일단 임시방편으로는 충분한 것이에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40년 전… 그 저주를 막느라 그대의 희생이 적지 않았으니. 신력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회복도 더디지 않나.”
엘릭이 이 말을 들었더라면 아마 의문을 던졌을 것이다.
오토 한은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스던 메르빙거가 다녀갔던 40년 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마치 스스로가 겪었던 일인 것처럼.
[하지만 우스던의 손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히 당시에 겨우 눌러놨던 것이 일어난다는 의미이니…. 본 녀는 그저 당시의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동백의 신은 짧게 한숨을 내쉬다가,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다 싶었던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우리의 주인공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나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나무를 심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닐 텐데요.]
오토 한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라면 그 메르빙거답게 아주 재밌는 짓을 저지르고 있지.”
[흐응! 그렇게 말하니 또 궁금해지는군요.]
“어렵지 않으니 보여주지.”
짝!
오토 한이 가볍게 박수를 치자, 동백의 신 앞에 스크린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엘릭이 수인들에게 쫓겨 도망치고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도망자와 다르게, 엘릭은 ‘하하하!’ 웃음보를 연신 터뜨려댔으니.
손을 휘둘러댈 때마다 ‘펑! 펑!’하고 집이 폭발해댔다. 얼음 폭풍이 쉴 새 없이 불어닥치면서 모든 걸 헤집고 다니면서 주변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으니.
때문에 만사 즐거워 보이는 엘릭과 다르게, 수인족은 당장 그를 붙잡으면 찢어 죽이기라도 할 듯이 흉흉한 분위기였다.
[…대체 뭘 하는 건가요?]
“뭐긴. 깽판이지.”
[깽… 판?]
“야단법석을 떤다는 뜻일세. 모르나?”
동백의 신이 발끈했다.
[지금 본 녀를 바보로 아시나요? 당연히 알죠! 그보다 저게 대체 무슨 해괴한 짓거리냐고 묻는 것이잖아요!]
“율호왕을 불러내겠답시고 저러더군.”
[유, 율호왕을…? 저딴 식으로?]
동백의 신은 기가 찬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번 안배에 대한 배경 설정은 오토 한과 동백의 신이 같이 작업한 것이었고, 그런 만큼 여기서 활동 중인 ‘캐릭터’들이 실제 인물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율호왕은… 동백의 신으로서도 그리 만만치 않은 작자였다.
물론, 겨울 궁전의 여왕일 때로 되돌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나, ‘동백꽃’이라는 겨울꽃의 신으로 있는 동안에는 항상 그를 인정하곤 했다.
그만큼 율호왕이 흑의 설원과 꽃의 신전에 남긴 영향력은 아주 컸다.
그리고 실제로 이 안배를 공략할 수 있을 몇 안 되는 방법 중에는 율호왕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게 모르게 주어진 ‘단계’를 ‘차례로’ 밟았을 때나 가능한 가장 어려운 난이도에 속했다.
그 과정에서 풀릴 제약도 아주 컸다.
그런데 그런 과정들을 모조리 생략해버리겠답시고 저딴 짓이라니…!
“예상 외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욧!]
“역시 메르빙거라고 해야 할는지. 아니면 시대를 넘어선 청출어람이라고 해야 할는지.”
원래 율호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선결 과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첫 번째는 인간과 수인 간의 분노를 해결할 것.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수인들이 가진 인간에 대한 증오가 가장 극에 달해 있었다.
대륙 한쪽 모퉁이에서 평화롭게 살던 그들 모두가 제국의 무리한 확장 정책으로 인해 장벽 이북으로 쫓겨나다시피 해야만 했고, 흑의 설원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절반이 훌쩍 넘는 인원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수인족이 혈통과 족속을 중요히 여기는 부족 규모로 급격하게 쪼그라져야만 했던 것도, 전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할 만한 인구와 통제망이 완전히 붕괴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여기에 이따금 노예 사냥꾼들이 장벽을 넘어와 수인을 잡아가는 일도 빈번했으니.
결국 수인족 대다수가 인간을 원수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엘릭이 수인족 중에서도 최강자라 불리던, 그것도 신분적으로도 최고 위치에 올라와 있는 율호왕을 만난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니 가장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실 씨앗을 심기 위해서는 수인족의 도움이 꼭 필요하긴 했다.
흑의 설원에서 유일하게 문명을 틔운 이들이 바로 수인족이었으니까.
‘물론, 수인족이 아니라, 적당히 마물을 직접 테이밍해서 텃밭을 갈게 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이건 공략 방법이 완전히 달라지니 뭐라 할 수가 없는 다른 문제지만.’
-두 번째는 분노를 해결한 것을 넘어 ‘친분’을 다지고, 그들로부터 투사로서 인정을 받을 것.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두 번째였다.
수인 부족과는 필요에 따라 어떻게든 거래 관계까지는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친분을 다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특히 투사(鬪士)가 된다는 건 이보다 더 큰 문제였다.
투사 제도는 수인족이 몰락을 겪으면서도 절대 놓치지 않았던, 종족의 정체성과도 같은 문화였다.
강자에 대한 숭상. 혹은 숭배.
강자존(强者尊).
신분과 혈통 여부를 떠나, 강자로 인정받는 수인은 모든 수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싸움만이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식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투사는 그런 강자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존재들로, 부족의 경계를 넘어서 종족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율호왕은 투사들의 정점에 놓인 자이니. 투사가 되지 않고서야 직접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마디로 아무리 엘릭이라 해도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인데….
문제는 정말 저런다면 만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율호왕은 투사의 정점이기 이전에 ‘안트로모프’라는 이름을 가진 부족의 왕이기도 한 존재.
자기네 부족이며 관련 부족들이 죄다 쑥대밭이 된다는데, 대체 어느 왕이 화가 안 나고 배길까!
[뭐해요? 당장 막을 생각도 안 하고!]
동백의 신은 여태 흥미롭다며 바라보면서 움직일 준비도 않는 오토 한을 나무랐다.
그가 말리지 않겠다면, 그녀라도 직접 뛰쳐나갈 분위기였다.
하지만.
“왜 그래야지?”
[무슨 말을…!]
“아니. 저렇게 공략을 시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개입할 것은 아니지 않나? 편법이긴 해도, 잘못된 것도 아니고.”
[…!]
“그 편법이란 게 아주 골 때리긴 하지만. 허허! 뭐, 그래도 뒷감당은 당연히 후손이 알아서 할 테지.”
[….]
동백의 신은 털썩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웃어대는 오토 한을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메르빙거는 정상이 없었다!
“그리고 저놈, 저렇게 막무가내로 보여도 그 속은 아주 영악하기 그지없지.”
스크린을 보는 오토 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영상에 비치는 엘릭과 꼭 닮은 미소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