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두 번째 안배
화아아!
빛무리가 가라앉은 자리에는 물결무늬를 연상케 하는 한 줄의 문장만이 남아있었다.
엘릭으로서는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여태 4번째 인장은 감도 잡히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생겨난다고? 그것도 데스웜을 잡았다는 이유로?’
석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간 상태.
그래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안배에서 네 번째 인장을 주는 게 처음부터 의도되어 있었다는 건데….’
사실 첫 번째 안배도 비슷하긴 했다.
설산왕의 인장을 가지는 게 최종 목표였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다르진 않은 모양이었다.
‘동장군을 훔칠 수 있다더니…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진명은 뭘까?’
엘릭은 이 인장이 아마도 오토 한이 말한 ‘겨울’의 일부 중 하나라고 예상했다.
문제가 있다면 이것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메피스토가 옆에 있다면 이것저것 편하게 물어보면 되련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으니.
‘메이더! 도와줘요, 메이더!’
물론, 무의식 세계에서 벌어지는 안배에 메피스토가 개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동백의 신에게 물어보려 해도, 나무와 관련된 일이 아니니 나타나지도 않을뿐더러, 마족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으로 봐서는 설령 안다 해도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진명은 인장을 구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진명을 넘어 그 속에 담긴 개념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진정 인장의 구동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인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했다.
등급은 어떻게 되는 건지, 계보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감지할 수 있는 건, 인장이 가진 속성 정도?
‘바람이라.’
아무래도 이 인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설산왕의 인장도 이해하고, 사용법을 터득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것 같은데. 차차 두고 봐야겠지. 그런데 대체 이 인장은 무슨 조건으로 획득하는 거지?’
냉혹의 인장이야 설인이라는 마족의 한 부류를 처치하면서 얻었다지만, 데스웜은 마물로 분류된다고 해도 마족은 아니지 않은가?
엘릭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많았지만, 계속 안배를 진행하다 보면 저절로 풀릴 거라고 여겼다.
“그럼 청소도 끝났으니까, 이제 다시 좀 제대로 심어볼까?”
엘릭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씨앗을 꺼내 땅에다 심었다.
데스웜의 사체 냄새를 맡고 하나둘씩 마물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으니, 서둘러 일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쿠쿠쿠…!
“…설마?”
엘릭은 아주 잠깐 지면이 떨리는 것을 보고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왠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느낌이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젠장…!”
어째서 언제나 불길한 느낌은 이리도 틀리질 않는지.
콰아아앙!
다시 지면이 터졌다.
* * *
[미션에 실패하셨습니다.]
[0일 차로 되감기됩니다.]
[3회차 도전입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라아알!”
엘릭은 정신이 들자마자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온 것을 보고 욕지기를 한바탕 쏟아내야만 했다.
데스웜은 처음 잡은 두 마리가 끝이 아니었다.
아귀감으로도 닿지 않는 저 지하 밑바닥에서부터 동족의 사체 냄새를 맡고 올라온 수십 마리의 데스웜을 마주쳤을 때는 정말 까무러칠 뻔했다.
‘이딴 데 데스웜의 군락지가 있다고? 아니, 호왕가는 대체 여기다 어떻게 도시를 세운 거야?’
데스웜의 군락지는 「마물 도감」에도 어느 정도 정보가 적혀 있었다.
[데스웜의 군락지: 데스웜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아주 까다로워 특정 지역에 여러 개체가 함께 몰려 사는 특징이 있다. 적게는 수 마리에서 많게는 수십 마리가 집단을 이루는 경우도 많으며, 이런 경우 군락지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사지(死地)가 되고 만다.]
[만약 의심되는 지역이 있으면 반드시 피해갈 것. 군락지는 토벌 등급이 1급으로까지 격상된다.]
데스웜이라는 항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군락지에 대한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로, ‘데스웜의 군락지’는 끔찍한 악명을 자랑했다.
직접 ‘군단’이 출동하거나, ‘일인 군단’이 나서지 않는다면 토벌이 불가능하니 보통은 발견되어도 그냥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하지? 정말 다른 장소라도 찾아봐야 하나?’
엘릭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고민에 잠겼다.
당장 혼자만의 힘으로 데스웜의 군락지를 공략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중과부적.
한 손이 여럿을 동시에 감당하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데스웜이 저만큼이나 떼거지로 살고 있다는 건, 그만큼 환경이 좋다는 뜻이긴 한데.’
생긴 것과 다르게 살 수 있는 지역이 극히 까다로운 놈들이었으니까.
다른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일단은 그래도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아직 호왕가와 관련된 정보를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무엇보다 지금까지 정보를 캐낸 것이 아쉬웠다.
군락지가 무섭긴 해도, 몇 번만 더 고생하고 나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득!
엘릭은 이를 악물었다.
* * *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것이 지독한 지옥의 수렁이 시작되는 출입문이었을 줄은.
* * *
[미션에 실패하셨습니다.]
[0일 차로 되감기됩니다.]
[34회차 도전입니다.]
“아아아악!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엘릭은 관자놀이를 쥐어뜯으면서 괴성을 꽥꽥 질러댔다.
실패하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 참지, 그게 서른 번을 넘어가게 되니 사람의 인내심도 바닥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걸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10회차 도전까지만 해도, 엘릭은 어떻게든 데스웜의 군락지를 공략하기 위해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죄다 쥐어짰다.
실제로 성공이 바로 눈앞에 놓인 것처럼 몇 번이나 아른거렸으니까.
데스웜이 좋아할 만한 먹이를 활용해 단체로 낚아보려 했다던가, 대지를 통째로 얼린 채 가둬서 아사시킨다던가, 아니면 다른 마물을 끌어온다거나 하는 다양한 방법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죄다 실패하고 말았으니.
떼로 있는 데스웜을 일일이 상대하는 것도 상당히 힘이 들뿐더러, 겨우 다 정리해뒀다 싶으면 또 어디선가 숨어있던 다른 놈들이 튀어나와서 훼방을 놓으니 되는 게 없었다.
결국 더 이상 공략하는 게 불가능하다 싶은 판단 아래, 어쩔 수 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해야만 했으니.
문제는 거기서도 좀처럼 나무를 키우는 게 쉽지는 않았다.
‘대체 마물이 왜 그렇게 많은 거야? 마물이 없으면 온통 토지가 마기나 독극물투성이니 정화하는 데 한 세월이고…!’
지역이 마음에 들성싶으면 마물이 한바탕 쏟아졌고, 마물이 좀 적다 싶으면 지역이 엉망이었으니.
그제야 엘릭은 어째서 흑의 설원이 그토록 일반적인 생명이 살아남기 힘든지를 알 것 같았다.
오히려 이런 곳으로 내쫓기고도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번영시킨 수인족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안트로모프만 봐도 분명히 부분적으로나마 농경은 이뤄지고 있었어.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건데….’
엘릭은 한순간 안트로모프의 경계마다 서 있던 석비를 떠올릴 수 있었다.
흑의 설원 한가운데에다가 마물의 침범을 막는 결계를 대형으로 구축해주던 석비. 역시 그것이 있어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건 또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혹시 이것도…?’
엘릭은 석판을 꺼내 꼼꼼하게 살폈지만,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석비보다 훨씬 크기가 작은 데다가, 결계와 관련된 마법적 장치가 보이지도 않았다.
뭔가 있다고 해도 당장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듯싶었다.
‘차라리 결계를 구축할 마법진을 새겨 넣는 게 나으려나?’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서야 오토 한이 설치해둔 마법 장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알 수 없으니.
결계 마법을 새긴 거석을 가져와 경계에 세워 두는 것도 고민해보긴 했지만, 결국 계속된 마물의 공격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는 걸 보고 나서는 그냥 포기해버렸다.
결국 30여 회차가 넘었을 때는 도로 데스웜의 군락지로 되돌아오고 말았으니.
그나마 비교적 이곳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었기에 공략이 좀 더 수월할 거란 판단에서였다.
물론, 그것도 연달아 실패하면서 좌절을 겪어야만 했지만.
‘하아! 진짜 이대로 있다간 안배에 영영 갇혀 지낼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해결책은 처음 제약이 해제되었다며 얻은 이름 모를 인장밖엔 없었다.
‘이게 동백나무를 심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한데.’
엘릭이 일단 임시로 ‘바람의 인장’이라고 이름 붙인 인장은 마물을 제거하는 족족 계속 성장하긴 했다.
별다른 걸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3성에 다다르고 있었으니.
강한 마물이면 강한 마물답게 더 큰 인장의 조각을 주었고, 작은 마물이면 작은 마물 급의 작은 조각을 주었다.
덕분에 30여 회차에 다다르는 리셋이 아주 소득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 근방에 대한 지리적 정보를 습득할 수도 있었고.
‘두 번째 제약인지 뭔지 하는 게 풀리면 진명이나 트리거를 알 수 있으려나? 풀릴 기미만 보인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텐데. 하아!’
문제는 그 제약이란 게 대체 뭔지 알 수 없는 데다가, 해제를 위한 필요조건에 대해서도 알 방법이 없으니.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알아내야 하는 점이었다.
마치 모래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기분이랄까?
‘설산왕 때는 차라리 설산왕을 잡으라는 눈에 딱 띠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몇 번씩 죽어도 상관없었지만, 이건 그런 정도도 아니고.’
엘릭은 아주 잠깐 음험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구경하고 있을 오토 한에 대한 험담을 잔뜩 늘어놓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오히려 그럼 그럴수록 더 좋아하면 좋아했지, 약이 오를 리가 없지.’
어쩐지 타인의 약오름에 희열을 느끼는 메르빙거의 질 나쁜 성격이 보일 것 같아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럴 때 누가 도와준다면 좋을 텐데.
‘잠깐. 돕는다고?’
그러다 엘릭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머리를 벅벅 긁고 말았다.
“아악! 이 멍청이! 왜 그걸 이제야 떠올리는 거야!”
오토 한과 동백의 신은 분명히 나무를 심으라는 말만 했었지, ‘혼자서’ 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조력자가 있어도 된다는 말이 아닌가!
“호왕가! 이 시대의 호왕가를 찾아야 해!”
처음 엘릭이 이 시대에 떨어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생각이 무엇이었던가. 400년 전에 안트로모프를 세웠던 호왕가와 그들을 따를 부족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씨앗을 심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들과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
그건 아마도 안배를 솔로 플레이로 공략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스스로의 행동에 사슬을 걸어버린 것 같았다.
‘농경을 시작할 방법이야 수인족에게 배우면 그만이잖아? 안 된다면 도움을 구해도 되는 거고.’
물론, 엘릭은 수인족과 친분을 가지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 시대는 인간에 대한 수인족들의 분노가 가장 극에 달하던 시기.
오히려 그를 발견하자마자 때려죽이려 들 놈들도 많을 터였다. 어쩌면 호왕가도 거기에 속할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이 시대 호왕가가 득세를 했던 건 인간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해서 연합할 필요성을 느껴서였으니까.’
하지만 엘릭은 자신 있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경계는 가질지언정, 관심을 기울이게끔 할 자신이.
‘인간이 강체술을 배웠다는 사실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 자세를 바꾸긴 해야겠지.’
이 시대까지만 해도 강체술은 아직 호왕가의 비술이 되기 전이었다.
오히려 수십 개의 분파와 부족으로 갈라진 만큼, 강체술도 이름만 같을 뿐이지 수없이 다른 형태와 유파로서 세상에 남아있을 때였으니.
‘하지만 이 시기에 일어난 호왕이 수인족을 일통(一統) 하면서 중구난방이었던 강체술도 하나로 통합해서 오늘날의 체계를 갖췄지.’
그것이 바로 엘릭이 ‘강체술의 원형’이라 일컫는 호왕가의 비술이었으니.
‘차라리 잘 되었어. 그들을 만나서 강체술의 원형에 대한 정보도 얻고, 나무도 키울 수 있다면… 일석이조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인 연합을 만들고, 호왕가를 개창한 영웅을 만나야겠지.
율호왕(律虎王)이 과연 이 안배 내에 구현되어 있을까?
엘릭은 그게 몹시 궁금했다.
물론, 이 넓은 흑의 설원에서 그와 부족을 찾는다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엘릭에게는 오히려 쉬웠다.
‘찾기 어렵다면, 그냥 찾기 쉽게 나오게끔 만들면 되지.’
엘릭의 한쪽 입꼬리가 불길하게 씩 말려 올라갔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