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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95화 (95/405)

95화

두 번째 안배

엘릭과 동백의 신은 상황 판단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고.

덜컹!

어디선가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그그그극-

4개의 계절이 순차적으로 보였던 때와 다르게 심상 세계가 저절로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엘릭이 힘겹게 쌓았던 석벽이 허물어지고, 그림자가 되돌아가면서 땅이 다시 단단해지며, 쓰러졌던 나무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있던 자리도 안트로모프가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니.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것이 원래 엘릭이 처음 심상 세계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변해버렸다.

“…!”

[…!]

둘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바짝 굳어버려야만 했다.

“이게 대체…?”

하루 동안 벌인 고생이 전부 허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엘릭은 멍한 얼굴로 동백의 신을 바라봤다.

이곳의 안내자라고 했으니 뭔가 아는 게 있나 싶어서였지만.

동백의 신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아! 체크하지 못한 게 있는 모양이네요.]

“정말 실패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되돌아올 리가 없겠죠?]

엘릭이 대체 이유가 뭐냐고 물으려는데.

그보다 먼저 동백의 신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먼저 대답했다.

[잘 안 된 이유야 많겠죠. 이곳은 흑의 설원이잖아요?]

엘릭은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흑의 설원이니까.

그 말 한마디면 다른 이유는 필요 없긴 했다.

[본 녀도 이곳에서 머문 지 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답니다.]

동백의 신은 엉덩이를 탁탁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분홍색 날개를 흔들면서 엘릭의 머리 위로 날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만하면 ‘튜토리얼’도 충분히 끝난 듯하니, 나머지는 알아서 잘할 수 있으시겠죠?]

엘릭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디 가십니까?”

[이곳은 메르빙거의 안배가 작동하는 곳이고, 바깥세상과는 단절이 되어있죠. 아직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저로서는 이렇게 계속 깨어 있는 것조차 부담이랍니다. 꼬맹이들 때문에 엉망이 되었을 신전 뒷정리도 해야 하구요.]

그러면서 동백의 신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니면 본 녀 옆에서 같이 자겠어요? 그럼 본 녀의 회복도 그만큼 빨라질 것 같은데. 어때요?]

엘릭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시다시피 메르빙거의 가주는 짊어지고 있는 의무가 많아 그러기가 힘드네요. 죄송합니다.”

[호호호! 메르빙거가 의무 이행이라니. 그것만큼 재미없는 농담도 없겠어요.]

동백의 신이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하여간 나무와 관련된 이슈가 생길 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안배 공략에 집중하도록 하세요.]

“잠…!”

엘릭은 뒤늦게 아직 퇴비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 말았지만, 동백의 신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

“…어쩔 수 없나. 뭐, 일단은 실패한 원인부터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엘릭은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석판을 내려다봤다.

석판은 ‘되감기’를 운운하던 글자가 사라지며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되감기… 설산왕 때처럼 이번에도 미션을 성공할 때까지 계속 재도전을 하는 구조인가? 또 수도 없이 리바이벌하게 생겼네.’

그래도 덕분에 머릿속에 잡힌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리기 시작했다.

‘선조님이 얄궂은 면이 있으시긴 해도, 고작 장난을 치고자 시간을 되돌리시지는 않았을 테고… 정말 그 텃밭에 내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게 있다는 건데.’

땅을 고르는 것부터 정화하는 것까지.

정말 만반의 준비란 준비는 다 했었으니까.

“일단 직접 확인해봐야겠지.”

엘릭은 다시 안트로모프 쪽으로 이동했다.

* * *

“【감지하라】.”

엘릭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일대에 걸쳐 마력을 잔뜩 뿌렸다.

아귀감뿐만 아니라, ‘마나 스캔’까지 총동원해서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정화는 했다지만, 토질이 동백나무와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고, 그게 아니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마물이 있을 수도 있었다.

‘되감기가 되기 전에 습득했던 마기량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그것까지 리셋 됐으면 짜증이 장난 아녔을 테니까.’

극소량이긴 해도, 용해율에 따른 마력장의 범위도 그만큼 달라졌으니.

그런데.

“…음.”

엘릭은 곧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무리 구석구석을 들쑤셔 봐도 어제 감지했던 것 외에 이렇다 할 이상 현상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차라리 다른 장소를 찾아볼까?’

오토 한이 준 미션은 어디까지나 나무를 키우라는 것이었지, 꼭 한 장소만 지목한 건 아니었으니.

꼭 여기만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아냐. 장기적으로 여기서 머무는 게 좋을 거야.’

엘릭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분명 이 세계는 400년 전의 시간대를 재현했다고 했어. 분명… 호왕가가 처음 안트로모프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라고 알고 있고.’

조부님, 우스던 메르빙거는 굳이 도시 안트로모프를 찾았다가 꽃의 신전을 방문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수인족, 특히 호왕가와의 인연을 되살린 걸 단순히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엘릭은 그럴 수 없다고 봤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시대적 배경을 굳이 이렇게 설정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과연 심상 세계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인물까지 정확하게 재현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긴 했지만.

‘시도해본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물론, 그런다고 해서 맨땅에다 헤딩을 계속하는 건 그의 성미가 맞지 않았다.

엘릭은 넓게 퍼뜨렸던 마나 스캔을 도로 거둬들였다.

대신에 마력장의 범위를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잡아당겼다.

‘넓게 해서 안 된다면… 깊게!’

어쩌면 아귀감으로 닿지도 않을 만큼 아주 깊숙한 곳에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에 지층을 계속 아래로 파내려갔고.

곧 암반처럼 거대하고 단단한 무언가와 맞닥뜨릴 수 있었다.

‘찾았다!’

엘릭은 그 순간 비행 마법을 펼치면서 아주 높이 하늘로 떠올랐다.

쿠쿠쿠…!

땅이 아주 미약하게 울린다 싶더니.

콰아앙!

갑자기 땅거죽이 폭발하면서 어마어마한 몸집과 길이를 자랑하는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어어어-!

“젠장! 설마설마했는데, 데스웜이라니!”

엘릭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언젠가 아카데미의 도서관에서 봤던 책자, 「마물 도감」에 수록된 내용이 일부 떠올랐다.

[데스웜: 작게는 30미터에서 길게는 50미터에 달하는 길이. 다른 마물조차도 한입에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아가리는 장장 3미터에 달하고, 몸뚱이는 온통 빳빳한 가시와 맹독성을 띤 점액으로 가득해 접근전이 쉽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탐지로도 쉽게 잡히지 않는 아주 깊은 지하에 둥지를 형성하고, 전투 시에도 불리하다 싶으면 토굴을 파고 숨는 습성이 있다. 출현 시에 많이 위급할 수 있다.]

[마도사 급의 워메이지 서넛이 달라붙어도 상대하기 어려운 3급 마물이니, 우연이라도 조우할 시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

웜 계통의 최강자를 만난 것만 해도, 엘릭으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이러니 씨앗이 심자마자 죽지!’

엘릭 역시 마도사 급의 실력이라지만, 아직 정식으로 6써클로 인준을 받은 건 아니었으니.

서너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잡을 수 있다는 녀석을 홀로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대신에 그에게는 부족분을 채울만한 다른 강점들이 많았다.

마투술과 강체술.

둘 모두 전투에 있어서는 최고의 장기를 자랑하지 않던가!

“【휘몰아쳐라】!”

콰드드득!

엘릭은 데스웜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들이받았다.

눈보라가 회오리치면서 데스웜의 질긴 가죽을 마구잡이로 할퀴고 지나갔다.

점액이 사방으로 아무렇게나 튀었다. 상처 사이로 빙독이 깊숙하게 침투하면서 얼음이 삽시간에 상처를 크게 벌려놓았다.

쿠우우웅-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는 녀석의 몸뚱이 위로.

착!

엘릭이 착지하면서 강체술을 강제로 개방했다.

“【무장 개방】.”

강체술.

백호난아 – 경(勁).

퍼어엉!

엘릭은 가장 큰 위력을 자랑하는 초식을 얼어붙은 상처에다 그대로 작렬시켰다.

그러면서 헤르만과 떠들면서 이해했던 ‘경’의 묘리를 뒤섞었다.

모든 힘을 작은 한 점에 압축시킴으로써 더 큰 파괴력과 살상력을 자랑하는 상승의 묘리.

그리고 여기다 흉성의 인장까지 한껏 더해주니, 파괴력은 곱절의 곱절까지 늘어났다.

마치 폭죽이라도 터진 것처럼 상처가 그대로 폭발했다.

점액과 핏물, 그리고 부서진 살점들이 시야를 가렸다.

하나 같이 독성이 가득했지만, 엘릭은 전부 ‘실드’를 사용해 옆으로 흘리면서 재차 공세를 퍼부으려고 했다.

그런다면 끝장낼 수 있을 거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

엘릭은 한순간 아귀감이 질러대는 경종에 자세를 잡다 말고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쐐애애액-

캬아아악!

그곳엔 또 다른 데스웜이 아가리를 벌리면서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두 마리였나!’

엘릭은 재빨리 실드를 잇달아 끌어올렸다.

쾅!

쾅!

콰아앙!

하지만 제대로 마력장을 세우질 못한 탓에, 네 겹이나 되는 나머지 실드가 연달아서 너무나도 쉽게 박살나 버렸고.

끝내 마지막 남은 실드마저 금방이라도 박살이 날 듯한 순간, 아가리의 그림자가 엘릭의 머리 위까지 다다랐다.

“젠장!”

콰직!

결국 마지막 실드가 부서지면서 엘릭은 데스웜의 아가리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콰콰쾅!

데스웜의 머리통은 안쪽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에 그대로 날아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에는 엘릭이 있었으니.

하지만 그는 위액과 독극물을 잔뜩 뒤집어쓴 채 이를 바득바득 갈아야만 했다.

“젠장…!”

예상치도 못한 녀석의 등장 때문에 쓸데없이 상처만 잔뜩 입은 셈이니 짜증이 날 수밖에.

악취가 진동하는 데스웜의 아가리 속에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끈적끈적한 점액과 4중으로 된 이빨, 그리고 산성으로 가득한 위액은 하나하나가 전부 끔찍했으니까.

엘릭은 순간 다시 리셋을 할까 싶었지만, 괜히 또 고생하기는 싫어서 용언 마법을 발동시켰다.

“【삼켜라】, 【나아라】.”

흉성의 인장을 사용해서 그림자로 하여금 죽은 데스웜의 사체에서 마기를 흡수하도록 하는 한편.

치이익!

치료 마법도 병행하면서 짓물렀던 상처들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살갗 위로 희뿌연 서광이 올라오면서 수증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회복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느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장이 없는 마법들의 효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단 말이지.’

나중에 치료와 관련된 인장이라도 얻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엘릭은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털었다.

‘치료용 흑마술이라니. 흐, 그것만 한 모순도 없을 것 같… 응?’

엘릭은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면서 순간 인상을 굳혀야만 했다.

품에 넣어뒀던 석판이 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또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그런 불안한 마음에 석판을 봤다. 다행히 이번에는 다른 내용이 적히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내용이었다.

[필요조건을 충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첫 번째 제약이 해제됩니다.]

‘제약?’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인장 개방.]

“…!”

파아앗!

순간, 엘릭의 오른쪽 손목 부위로 석판에서 새겨졌던 것과 똑같은 빛무리가 새겨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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