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두 번째 안배
-여름이 되었다.
햇살이 뜨거워지면서 풀잎들이 더 활짝 커지고, 곳곳에 자라던 나무도 금세 잎사귀를 트면서 울창해졌다.
낙원은 숲이 되었다.
-가을이 찾아왔다.
하늘이 파랗게 변하면서 점차 높아지고,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은 전부 울긋불긋한 색으로 변했다.
열매들이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사과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뒹굴면서 다람쥐와 여우가 나타나 그걸 낚아채고, 한쪽에서는 도토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러다 그 위로 낙엽이 하나둘씩 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앙상한 나뭇가지가 나타났다.
-겨울이 내렸다.
쌀쌀하던 바람은 점차 따가울 정도로 차가워졌다. 눈이 펑펑 내리면서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원래 꽃과 열매가 맺혔던 자리로 눈꽃이 대신 폈다.
그 아래로 고드름이 맺히고, 낙원은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새하얀 세계.
거기에는 조금 전까지 엘릭이 봤던 따스한 바람도, 훈훈하던 향기도, 아름답게 반짝이던 꽃도 보이질 않았다. 여우나 다람쥐도 겨울잠을 자러 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조용하고 삭막하기만 한 정적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젠가 다시 하늘이 개고 따스한 햇살이 비치겠지.
눈이 녹아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둔덕에는 다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며 눈꽃과 고드름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순이 나겠지. 봄이 돌아올 것이라고 모두가 믿었다.
원래 그랬으니까.
계절의 주기가 그러한 것이니 아무도 거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파가 몰아쳤다.
그나마 겨우 남아있던 나뭇가지들이 찬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졌다.
낙엽이 썩으면서 저절로 보충되어야 할 지력이 추위 때문에 그러질 못하면서 땅도 같이 썩었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도 같이 얼어 죽으면서 낙원이었던 세상은 온통 죽음으로만 가득한 세계로 변해버렸다.
꽃향기 대신에 썩은 악취가 풀풀 날리고, 녹색 빛을 띠던 동산은 온통 까만 늪으로 가득 찼다. 푸르던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변해 따스한 햇살이 다시 내리쬐는 날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은… 갖가지 마물들이 들끓는 세계로 점차 변해버리고 말았다.
한 번 변해버린 세계가 돌아올 길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메마르고 썩은 땅.
온통 까맣기만 한 세상.
마물이 활보하고, 독취를 풍겨대는 이곳이 정말 조금 전의 그 낙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이곳은 흑의 설원이란다.”
엘릭은 홀로 앉아 그런 광경을 지켜보다가, 뒤쪽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한 사내가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메르빙거의 중시조이자, 시조를 모시던 ‘겨울’의 가신.
“선조님…?”
오토 한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못 본 새 아주 잘 자랐어. 냉혹의 인장도 이제 그럴듯하게 자리잡힌 것 같고.”
오토 한은 엘릭을 위아래로 살펴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예. 고생은 좀 했지만요.”
“하하. 원래 고생을 해야 그만큼 무럭무럭 잘 자라는 법이지.”
엘릭은 오토 한이 또 얼마나 자신을 괴롭힐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여하튼 네가 ‘겨울’을 완성할 때까지, 나는 계속 따라다니면서 잔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이란다. 두 번 설명하기는 귀찮으니, 잘 들으려무나.”
오토 한은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 쓰면서 말을 이었다.
“처음에 이곳은 ‘설원’이라는 말처럼 새하얗기만 했지. 빙하기가 시작된 거야. 그래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언젠가 끝날 거라고 굳게 믿었지. 그 믿음은 배신으로 좌절되고 말았지만. 그 이유가 뭐 때문인지 아나?”
“동장군 때문입니까?”
오토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곳에서 살던 이들에게는 그 어떤 마물보다 더 마물 같은 놈들이었지. 마신이 이곳을 스쳐 지나가면서 남게 된, 과거의 잔재이자 저주지.”
마신의 잔재이자 저주.
그 말이 엘릭의 귀에 박혔다.
“그러니 후손이여. 지금부터 넌.”
안경 아래.
그의 눈이 눈웃음을 지었다.
“동장군을 가져가는 방법을 배우게 것이다.”
* * *
동장군(冬將軍).
그 단어가 엘릭의 귀에 꽂혔다.
“동장군을 가져간다….”
엘릭의 눈이 요요하게 빛났다.
흑의 설원을 뒤덮고, 온갖 마물이 자랄 환경을 만들어낼 만큼 엄청난 자연재해를 가져갈 수 있다?
물론, 그만한 재해를 단신으로 펼쳐낸다는 건, 꿈에서나 보았던 시조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그만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 틀림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닐 거라는 것.
“냉혹의 인장을 배우게 한 것이 전부 이 때문이었군요.”
“맞다.”
“그리고 동장군이 있는 곳까지 제가 움직이도록 한 건, 그동안 냉혹의 인장에 익숙해질 만큼 적응 기간을 주시기 위한 거였구요.”
오토 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역시 맞다.”
“냉혹의 인장으로 동장군을 담아낸다… 분명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안 하시네요. 이걸로 ‘겨울’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
오토 한은 아무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엘릭은 그것이 무언의 긍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장군도 냉혹의 인장처럼 ‘겨울’을 완성하기 위한 조각에 불과하단 거겠지. 대체 그 ‘겨울’이라는 게 완성되면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한데.’
엘릭은 앞으로도 자신이 계속 성장해나갈 여지가 늘어나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뭘 하면 됩니까?”
“이것부터 받아라.”
엘릭은 오토 한이 던진 것을 반사적으로 받았다.
그에게도 낯익은 것이었다.
씨앗.
그것도 동백의 신이 잠들어있던 것과 똑같은 동백나무의 씨앗이었다.
“지금부터 텃밭을 일구어 그것을 심고, 싹이 트도록 해라. 100일 동안 정성스레 가꾸어 나무가 자라고 거기서 꽃이 피게 된다면 안배는 끝난다.”
동백나무를 키우는 것과 동장군을 가져가는 것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몰랐지만, 그건 임무가 끝난다면 저절로 알게 될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임무의 내용이었다.
나무를 심고 가꾸라니?
땅이 썩어서 일반적인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이곳에서 어떻게 하라는 건지.
게다가 그게 동장군을 가져가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왜? 어렵겠느냐?”
오토 한은 어이없어하는 후손의 표정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안경을 고쳐 썼다.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조상님은 또 점잖은 척하면서 후손을 골탕 먹이는데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설산왕 때도 그랬지만, 어째 만들어내는 안배가 다 이 모양인 건지.
‘이거 이 뒤에 있을 세 번째, 네 번째 안배도 다 이 모양인 거 아냐?’
앞으로 더 성장할 여지가 많다며 좋아했던 흥이 팍 식는 기분이었다.
“…힌트라도 주십시오.”
“후후! 친애하는 후손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
누가 듣는다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을 후손을 지극히 아끼는 마음에 못 이긴 척 내어주는 줄 알겠네.
엘릭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오토 한은 허공에다 손을 활짝 펼쳤다.
휘휘휘!
그러자 허공에 마법진이 아름답게 새겨지면서 잘게 부서졌다.
소환진(召喚陣).
뭘 부르려는 것인가 싶어 가만히 살펴보는데.
[참으로 귀찮게도 구는군요. 또 무슨 일로 부르는 거죠? 이 악취가 나는 곳에서는 되도록 본 녀를 깨우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요!]
소환진이 잘게 부서지면서 연분홍색 날개가 인상적인 요정이 툴툴거리면서 나타났다.
“동백의 신?”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은 이걸 뜻했던 걸까.
다만, 이 요정을 두고 진짜 ‘동백의 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 순간 의문이 들었다.
분명 겉모습은 동백의 신이 맞았다.
하지만 풍기는 존재감이 전혀 달랐다.
꽃향기가 훨씬 짙었고, 풍기는 색도 아주 강렬했다. 크기는 작지만, 마치 거대한 나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이 정도 숲쯤은 전부 뒤덮고도 남을, 하늘을 전부 가리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크기의 나무!
그 순간, 엘릭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동백의 신이야말로 ‘진짜’ 동백의 신이라는 것을.
계속된 겨울 때문에 쇠락에 쇠락을 거듭해 꽃잎만 남은 동백의 신이 아닌, 한겨울에도 우람하게 선 신목(神木)으로서 쉴 새 없이 부딪치는 잎사귀와 만개한 꽃을 지닌 동백의 신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흔히들 말하는 진짜 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음? 그런데 이 잘생긴 아이는 누군가요? 어떻게 본 녀를 알고 있는 거죠?]
동백의 신은 짜증을 내다 말고 뒤늦게 엘릭을 발견하고, 곧바로 사근사근한 태도로 돌변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유일하게 흠이 있다면, 향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인데. 메르빙거인가요?]
“향이 마음에 안 든다니. 그건 상처를 좀 받는군. 인사하게. 내 후손이야.”
오토 한의 말에 동백의 신은 ‘퍽이나 그렇겠군요’라며 콧방귀를 끼면서 엘릭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분위기가 달라졌다?’
엘릭은 한순간 동백의 신을 둘러싼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풍기는 힘은 비슷하지만, 기질은 그가 깨웠던 동백의 신과 사뭇 비슷했다.
[…흠! 동백나무를 키운단 말이죠? 잘도 이런 깜찍한 것을 떠올렸군요. 하지만 우스던의 손자님, 잘 해낼 수 있겠나요? 이딴 변태 같은 임무를 해내는 게 그리 쉽진 않을 텐데 말이죠.]
엘릭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동백의 신이 현대의 동백의 신과 ‘교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데이터 업데이트? 그런 식으로 표현해야 할까.
여하튼 신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말을 익히 들은 적이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다면 나도 이야기가 훨씬 편하고.’
엘릭의 눈이 반짝였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선조께서는 동백의 신께서 머무실 터전을 마련하라는 것 같으시니까요.”
[메르빙거답지 않게 아주 눈치가 빠르군요. 그대의 선조들은 하나 같이 뺀질뺀질해서 요령 피우기만 좋아하지, 그리 성실한 구석이 없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당신은 조금 다른 것 같단 말이죠?]
동백의 신은 메피스토 때처럼 바로 옆에 오토 한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오토 한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지만.
다만, 엘릭은 어쩐지 자신을 보는 동백 신의 눈빛이 뱀처럼 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전혀 모른 척했다.
“그러니 동백 님의 도움을 많이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니 또 메르빙거의 후손이 맞긴 하군요. 호호! 하지만 애석하게도 본 녀가 여기서 해줄 수 있는 건, 옆에서 지켜보면서 적당히 필요한 것들을 일러주는 것밖에는 없어요. 그것을 직접 구하고, 나무를 가꾸는 건 오롯이 그대가 해야 할 몫이랍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자신의 것은 자신이 직접 챙겨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아이로군요.]
동백의 신은 이제 아예 대놓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엘릭은 이번에도 못 본 척했다.
오토 한이 앞으로 나섰다.
“동백의 말대로 너는 그녀가 주는 조언에 따라 나무를 키우면 된다.”
그가 설명하는 안배의 규칙은 아주 간단했다.
첫째. 안배의 시대적 배경은 마신의 저주가 처음으로 ‘동장군’이라는 기현상으로 빚어진 시대라는 것.
‘오토 한이 살았던 건 천년도 전인데, 어떻게 400년 전의 환경을 구현할 수 있는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둘째. 동백의 신은 이번 안배의 안내자라는 것.
셋째. 5일, 10일, 15일, 30일… 이런 식으로 동백의 신이 필요한 재료와 물품들을 말해줄 것이니 그때그때 알아서 구해서 사용하면 된다는 것.
넷째. 이곳은 심상 세계라 해도 ‘진짜’ 흑의 설원과 똑같은 환경이니 반드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마물에 대비할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섯째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흑의 설원을 전부 누비고 다니되, 절대 1천(泉)의 영역을 벗어나지 말라는 거다.”
흑의 설원은 모두 9개의 층계(泉, 천)로 이뤄져 있고, 이 중에서 인류가 닿았다고 알려진 곳은 3천이 고작이었다.
그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죽어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구현되어있는 겁니까?”
“그래.”
“참 힘들게도 하셨습니다.”
엘릭은 굳이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메르빙거라서.
그런 대답이면 충분할 테니까.
“여하튼 임무가 이어지는 내내 다른 도움은 일절 없다. 동백 역시 안내자라지만 정확하게 ‘나무 가꾸기’에 한정되어 조언을 줄 뿐이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대처해야 하니 단단히 유의해두려무나.”
“하아! 알겠습니다.”
어차피 첫 번째 안배의 난이도도 그리 쉬운 건 아니지 않았나.
엘릭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오토 한은 싱긋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도 받거라.”
엘릭은 오토 한이 던진 것을 받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사각형 형태의 석판.
위쪽에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진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메신저’다. 그걸로 나무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알아볼 수 있지. 다른 용도는 차차 알 수 있을 거다.”
“…?”
엘릭은 어쩐지 오토 한의 미소가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오토 한은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럼 건승을 기원하지.”
짝!
가볍게 박수를 치는 순간.
철컹!
그그그극-
마치 어디선가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여태 정지해있던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안배의 시작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