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두 번째 안배
[얼음이 나갔어!]
[동백꽃 씨앗은 꽁꽁 얼어있었는데. 찬바람이 나갔어.]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한 거야?]
다섯 꽃의 신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엘릭의 주변을 뱅그르르 돌면서 ‘와! 와!’ 만세를 외쳐댔다.
『무슨 파리 떼도 아니고.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정신 사나우니까 좀 가만히 있어!』
물론, 메피스토의 말을 들을 꽃의 신들이 아니었지만.
‘역시.’
엘릭도 다행히 자신의 판단이 들어맞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동장군은 메피스토 때에도 없었다던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그래.』
[응. 생긴 지 이제 400년밖에 안 됐어.]
[맞아, 맞아!]
“불가사의는 미지(未知) 중의 미지를 뜻하는 것이니… 당연히 인외(人外)일 수밖에요.”
인외.
인간이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영역을 제외한 모든 기현상을 총칭하는 것.
아니, 정확하게는 그러한 기현상에서 빚어지는 원초적인 공포와 두려움이 빚어내는 결과물을 뜻했지만, 어쨌거나 비슷한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魔)’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니.
엘릭은 동장군이라는 불가사의를 인외로 규정하고, 그것을 ‘마’로 여겨서 흡수해버렸다는 점이었다.
『흠! 동장군의 추위가 인외와 함께 섞여 있으니, 거기서 인외만 추출 해낼 수 있다면 씨앗을 얼어붙게 만든 추위는 저절로 빙정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엘릭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서진 균열에서부터 싹이 자라는 게 보였다.
『이런 식으로 일일이 여기 있는 씨앗들을 깨워 나갈 셈인가?』
“할 수 있다면 해야겠죠. 문제는 빙정이 여기 있는 냉기를 앗아갈지도 문제이고, 동장군이 계속 진행되는 동안에는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요.”
메피스토는 기가 찬다는 얼굴이 되었다.
『동장군을 없애야 한다는 뜻이로군. 400년 넘게 여기 있는 마물이며 수인족도 해내지 못했다는 짓을.』
엘릭이 쓴웃음을 짓는 동안, 새싹은 점차 커졌다. 줄기가 굵어지고, 잎사귀가 자라면서 작은 묘목이 되었다.
그러다 잎사귀가 지고, 그 위로 꽃봉오리가 트면서 점차 꽃잎을 활짝 펼쳤으니.
동백꽃은 화려한 붉은색만큼이나 짙은 향기를 품고 있어서 온실은 금세 꽃향기로 가득 찼다.
동백의 신은 바로 그곳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누워 있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연분홍색 날개를 늘어뜨린 요정.
[동백이다!]
[와아! 동백꽃이 폈어!]
[40년 만이야!]
[바보야! 41년 7개월 만이거든!]
[아, 그런가? 아무튼 반가워!]
깊게 잠든 듯 보이던 동백의 신은 주변이 온통 시끌벅적해지자,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비비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서… 깬 건가?]
동백의 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자신은 계속되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을 텐데…?
어떻게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던 건가 싶다가, 바로 눈앞에 언젠가 잠들기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얼굴이 있자 금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약속대로… 왔군요. 메르빙거.]
동백의 신은 어린아이 같던 다른 꽃의 신들과 다르게 말투가 상당히 어른스러웠다.
몽롱한 잠의 기운을 완전히 떨쳐내고 짓는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겨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차갑고 도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엘릭은 ‘약속’이라는 단어에서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조부님이 약속하신 게 있으신가 보군요.”
[있었죠.]
동백의 신은 연분홍색 날개를 파르르 떨면서 하늘 위로 날아가 엘릭과 눈높이를 맞췄다.
[와! 동백이가 난다!]
[난다 날아!]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잘 잤어?]
다른 꽃의 신들이 동백의 신에게로 모여들면서 까르르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늘어놓았다.
하지만 동백의 신은 시끄러워 죽겠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힐을 신고 있던 발로 허공을 콱하고 내리쳤다.
쿵!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꽃의 신들이 지저귀던 소리를 전부 꺼뜨렸다.
[다들 조용히 좀 하세요! 보아하니 40년도 족히 넘은 것 같은데 너희들은 어떻게 하루도 조용해질 새가 없는 건가요!]
한순간, 꽃의 신들이 조용해졌다.
엘릭은 철없어 보이던 저들도 동백의 신 앞에서는 약해지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딱 보기에도 동백의 신이 겨울꽃 중에서도 우두머리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와! 역시 동백이! 40년 전이랑 똑같아! 완전 박력 넘쳐!]
[한 번만 더 해줘!]
[해주라! 더 해주라!]
[이번에는 쾅쾅이로 해줘! 쾅쾅이 듣고 싶어! 쾅쾅이!]
[우르르, 쾅쾅!]
[으으…! 진짜!]
꽃의 신들은 오히려 재미난다는 얼굴이 되어서 동백의 신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동백의 신은 예나 지금이나 해맑기만 한 이 친구들을 대체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까 싶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옛날처럼 시끄럽게 떠들지 못하게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갓 잠에서 깨어났으니 그럴 수도 없어서 갑갑할 노릇이었다.
『고작 피워낸 꽃이 하나뿐인가?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신목(神木)은 어디 가고 없나보군, 그래?』
그러다 동백의 신은 엘릭의 옆에 익숙한 얼굴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꽃의 신전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음험한 얼굴.
[하나뿐이긴 해도 본 녀는 아름답고 아주 향기가 강한 꽃이죠. 하지만 너의 그 못생긴 얼굴은 어째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어쩌면 좋은가요? 그나마 볼만하던 몸뚱이도 비루한 거죽만 남아버린 것 같고. 아주 볼품없는 몰골이 되어버렸군요.]
『본 왕은…!』
[왕은 무슨. 신도도 백성도 없는 주제에 혼자서 왕이라고 자칭해봤자 누가 알아준다고. 차라리 본 녀가 왕호를 붙여주겠어요. 비루하고 찌질하게 남아있으니 찐따왕. 어떤가요? 너에게 아주 잘 어울릴 듯한데 말이죠.]
『이년이!』
메피스토는 동백의 신이 날린 차디찬 독설에 본전도 건지지 못하고 주먹만 부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동료 꽃의 신들에게 향하질 못한 화가 메피스토에게로 고스란히 쏟아진 모양이었다.
‘성격이 지랄 맞을 거라더니.’
엘릭은 어쩐지 첫 번째 안배에서 오토 한이 빙정을 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물론, 그걸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두 번째 안배를 따와야 하는 마당에 괜히 충돌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우스던 메르빙거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메르빙거.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엘릭입니다.”
[엘릭 메르빙거라. 아주 예쁜 이름이로군요. 이름만 봐도 본 녀를 기나긴 잠에서 깨울 지혜가 있어 보여요.]
그러다 동백의 신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마치 품평을 하듯이 엘릭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거기다 금발에 녹안이라? 얼굴도 이만하면 잘생긴 편이군요. 지적이고, 잘생기고, 몸도 호리호리한 것 같으면서 잔 근육이 잡혀 있고. 흠이라면 딱 한 가지, 안경을 안 쓰고 있는 게 흠이긴 한데… 뭐, 그거야 본 녀가 선물하면 되는 것이고.]
“…?”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엘릭이 아주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대가 딱 본 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란 뜻이에요. 그대, 본 녀의 첩이 될 생각은 없나요?]
“….”
순간, 엘릭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메피스토의 핀잔을 듣고 난 뒤에야 제대로 들은 게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흥! 또 시작되는군! 그놈의 얼굴 밝히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당신처럼 씹다 뱉은 개뼉다구 같이 생긴 작자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빠지세요.]
『뭣이? 본 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인외에서 손에 꼽히는 미형을 갖추었다며 사모하는 이들이 많았…!』
[마물들 사이에서 미형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라니. 뭐, 더 들어보지 않아도 충분하겠군요.]
『…!』
메피스토가 다시 길길이 날뛰었지만, 동백의 신은 전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다시 엘릭을 보면서 물었다.
[어떤가요? 이런 영광스러운 기회는 두 번 찾아오지 않는답니다. 본 녀는 아주 도도하고 쿨한 존재라 한 번 떠난 것에 두 번 손을 내미는 경우가 없었으니까 말이죠.]
엘릭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얼마나 당당하게 말하는지. 정말 당연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더군다나 눈빛은 왜 저리도 매서운지.
꼭 뱀 앞에 놓인 개구리가 된 느낌이었다.
맛난 먹이를 앞에 둔 포식자의 눈이라고 해야 하나?
평소 같았으면 무슨 헛소리냐며 맞받아쳤겠지만, 엘릭은 상대가 ‘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것도 안배를 내어주기로 약속된 신.
“죄송하지만, 저는 한 가문을 대표하는 몸이라 함부로 혼인할 수가 없습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정중히 반려하겠습니다.”
[그 선택, 후회하게 될 텐데요?]
“죄송합니다.”
[아쉽게 되었군요.]
동백의 신은 정말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도 엘릭을 보는 시선은 흥미로 가득했다.
메피스토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둘을 바라봤지만.
[뭐, 일단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조금 전, 우스던 메르빙거가 하고 간 약속이 있었는지 물었죠?]
“예.”
[맞아요. 있었어요. 그가 그랬었답니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자신의 손자쯤 되는 녀석이 찾아와 흑의 설원을 뒤덮고 있는 ‘겨울’을 훔쳐 가고 대신에 ‘봄’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그렇… 습니까?”
역시 예상대로 조부님은 이곳을 방문하셨었구나.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해졌다.
조부님은 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을 방문하였으며.
당신께서 계시지 않을 먼 미래에 손자가 이곳을 방문할 것이란 걸 어떻게 아셨을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래요. 그러니 우스던 메르빙거의 손자인 엘릭 메르빙거, 그대에게 묻겠어요. 그대는 그대의 조부가 약속한 대로 이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겨울’을 가져가고,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봄’을 가져올 수 있나요?]
하지만 엘릭은 그런 궁금증 따윈 전부 뒤편으로 미뤘다.
지금은 대답이 더 중요했다.
“제가 ‘겨울’이라는 것을 가져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가문의 선조께서 제가 직접 남기신 당부가 있으셨습니다.”
엘릭은 빙정을 동백의 신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당신께 드리고, 이렇게 말하라구요.”
엘릭은 크게 숨을 고르고, 눈을 크게 빛냈다.
“‘겨울’을 완성하러 왔다고요.”
순간, 동백의 신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겉보기엔 냉소로 보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만족에 찬 미소로도 보이는 알 수 없을 웃음.
[오토 한, 그 얄미운 작자의 전언이로군요. 우스던에 오토 한까지…. 어쩌면 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될 흐름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좋아요. 그럼 그곳에서 ‘겨울’을 가져갈 방법을 배우고 돌아오세요.]
동백의 신이 양손을 둥글게 모으더니 안쪽으로 입김을 불었다.
후!
짙은 꽃향기와 함께 노란 꽃가루가 확 풍기더니 금세 엘릭을 뒤덮었다.
[이따가 보도록 하죠.]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았지만.
목에 걸고 있던 마도경식의 에메랄드 부분이 환한 빛무리를 터뜨리면서 곧 사라지고 말았다.
파아앗!
시야가 빙글 도는가 싶더니, 다시 시야가 제자리를 잡았을 때. 엘릭은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다.
첫 번째 안배 때와 똑같은 현상.
“여긴…?”
엘릭은 우선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눈보라만 거세게 몰아치던 설산왕 때와 다르게, 동백꽃의 향기뿐만 아니라 다른 꽃향기도 가득 풍기는 낙원이었다.
쏴아아!
때마침 불어오는 훈풍은 사람의 기분마저 훈훈하게 만들어주었으니.
곳곳에 나 있는 둔덕을 따라 활짝 핀 꽃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게 보였다.
“꽃의 신전… 인가?”
엘릭은 이곳이 원래 꽃의 신전이 가지고 있던 본 모습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의문점이 있다면 낙원이 너무 넓은 데다가 신전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랄까?
그리고 그런 엘릭의 의문을 설명하기라도 하듯.
낙원을 덮고 있던 시간이 빨리 감기기 시작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