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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91화 (91/405)

91화

두 번째 안배

헤르만이 머물던 객실로 의형제들이 구름 떼처럼 우르르 몰려왔다.

“나 때문에 계획에도 없던 장벽 이북까지 온 셈인데. 피로할 텐데 쉬지 않고?”

“어때요?”

“뭘?”

“지금 그걸 몰라 묻습니까! 당연히 우리 조카사위를 말하는 거지!”

“아, 그거?”

헤르만이 피식 웃자, 의형제들은 답답하다는 듯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럼 이 시각에 우리가 미쳤다고 큰형님의 고루한 얼굴 보러 오겠습니까?”

“그 말은 좀 상처받는데.”

“아, 좀! 질질 끌고 말 해보십쇼! 그래서 어떤데? 가르쳐 볼 만합디까? 진짜 막 소문처럼 하나만 가르쳐도 열을 알아듣는 그런 천잽니까?”

“아니. 그건 아니더군.”

헤르만이 담담하게 고개를 젓자, 의형제들은 탄식을 터뜨렸다.

“이런!”

“거봐, 내가 그랬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메르빙거라고. 마법에만 국한되었을 거라니까?”

“그럼 이거 큰일인데. 높게 잡아서 수재 수준이라고 해도, 지금 나이에 검을 쥐기에는 많이 늦었단 뜻인데…. 그럼 우리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는 거잖아? 다른 인재라도 찾아봐야 하나.”

“제기랄. 잔뜩 기대했었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는 구만. 막내야,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

“어어? 둘째 형님 어디 가셔? 주머니에 든 거 안 꺼내시고?”

“…들켰냐?”

의형제들은 ‘계획’이 잘 안된 것에 안타까워하면서도, 몇몇은 내기라도 나눈 건지 서로 돈주머니를 교환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헤르만이 그들의 머리 위로 장난스럽게 던진 말이야말로 더 큰 폭탄이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백을 알아듣는 천재 중의 천재더군.”

“…!”

“…!”

“그, 그, 그 정도라고?”

“셋째! 네 이놈! 내가 처음부터 뭐라고 했느냐! 조카사위님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부터 관상이 남달라 귀인이라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의심을 하고! 어서 썩 뒤에 찬 돈주머니를 내놓지 못할까!”

셋째 하만은 입맛을 다시면서 둘째 라셀에게 돈주머니를 건네면서도, 눈빛은 형형히 빛났다.

“쩝! 그럼 큰형님, 그 수준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일단 ‘제대로’ 검을 쥐면 5년 안에 여기에 있는 놈들은 맞먹을 거라고 장담하지. 밑에 있는 놈들은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거고.”

“미친! 이거 탄신의 신이 아기를 잘못 내려다 준 거 아니오?”

“커험! 험!”

의형제들은 ‘제대로’라는 말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엘릭은 마법사. 거기다 무도를 어디까지나 보조용으로만 배우겠다고 못을 박아버렸으니 그 재능이 썩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이다.

최근에 실력이 많이 떨어진 몇몇은 헛기침을 하면서 따라잡히지 않도록 다시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것저것 유리한 게 많더군. 일단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나 감응도는 내가 여태 본 적도 없는 수준이었고…. 강체술을 익혀서 그런지 호흡도 완벽했고, 감각도 아주 예리했어. 움직이는 내내 숨 한 번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칭찬은 계속 이어졌다.

“체질도 이미 네레스타의 노괴가 미리 손을 써뒀던지 아주 깨끗했었다네.”

헤르만이 처음 엘릭의 몸을 여기저기 만졌을 때 얼마나 경악했는지 몰랐다.

사람이란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마력을 쌓아도, 체내에 노폐물이 자연스레 축적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나 로드 중에서도 사용하는 것보다 사용하지 않은 게 더 많을뿐더러, 발달하기 힘든 근육에도 누적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헤르만은 젊은 시절 동방에서 건너왔다던 기인(奇人)에게서 배운 ‘추궁과혈(推宮過穴)’이라도 엘릭에게 해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겨우 복구한 자신의 마력도 다시 손상이 가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가르침에 속도를 붙일 수 있다면 이득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릭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미 추궁과혈보다 훨씬 좋다던 벌모세수가 깨끗하게 진행된 상태였으니까.

근육과 세맥에 노폐물과 탁기가 거의 찾아볼 수도 없이 깨끗했던 것이다.

물론, 깊은 곳까지 완전한 청소가 이뤄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것만 해도 3살 혹은 4살 아기의 수준이라 할 수 있었으니.

거기다 근질과 골격은 왜 그리도 또 좋던지….

“녹야의 마투술이 강제로 근골을 통뼈처럼 단단하게 만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들끼리도 ‘마골’이라고 한다나? 지금도 보십시오. 오거스틴, 그 노괴를 보고 누가 그 나이대라 생각하겠습니까? 어디 사람입니까? 괴물이지.”

하얀 밤, 오거스틴 네레스타.

그는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세간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과거 마법에 있어서는 ‘별의 마도사’ 우스던 메르빙거와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었던 사람이 그였으며.

오늘날은 누구나 천하제일인으로 손꼽아 인정하는 황금사자에 견줄 수 있는 괴물이라는 것을.

처음 엘릭이 그의 제자가 되었단 말을 들었을 때는 다들 얼마나 경악했던지.

“아냐. 그건 나도 알고 있네만 단순히 그런 정도가 아녔어.”

“그것, 참!”

“하여간 한 가지는 확실하다네.”

모든 의형제들의 시선이 헤르만에게로 향했다.

헤르만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엘릭, 그 친구에게 뜻만 바로 선다면 아주 큰 괴물이 탄생할 거란 것.”

“쩝!”

“역시 그게 제일 중요하군.”

“설득이 제대로 될까?”

“어떻게든 해봐야지. 죽어라 설득해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고. 강제로 시킨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잖아?”

의형제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품고 있던 ‘계획’을 떠올렸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황금사자를 뛰어넘을 새로운 사자를 만드는 것!

지금의 사자공가 제도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동안 헤르만과 푸른 매가 내린 결론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절치부심 노력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도전했던 헤르만이 결국 5개 체인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을 겪고 말았으니.

그래서 그들은 더 큰 인재를 찾고자 했다.

“그러니 다들 돌아가면서 어떻게든 엘릭의 마음을 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그렇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기가 쉬워.”

“쩝. 우리 조카사위님 겉으로는 사람 좋아 보여도 꽤 깐깐해 보이던데 쉬우려나?”

“그래도 동류라는 게 가장 크니 거기에 기대해봅시다.”

모두가 기대를 끄덕이는 가운데.

“언제 가르칠 수 있을지 궁금하군.”

둘째 하만은 큰형님이 그토록 침이 튀도록 칭찬한 엘릭의 재능이 어떨지 궁금한 나머지 잔뜩 설레기 시작했다.

“오, 둘째 형님 저 표정 또 나온다.”

“너무 변태 같지 않아? 저럼 보통 좀 위험하던데….”

의형제들의 걱정을 빙자한 핀잔이 쏟아졌지만.

그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 * *

하지만 그 시각.

엘릭은 기뻐하는 푸른 매와 다르게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동백꽃이… 시들었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한 그대로야.]

[꽃이 시들어버렸어. 축 늘어져서 다시 꽃을 피우질 않아.]

[동백꽃뿐만 아니야.]

[모두 다 그래.]

[‘겨울’이 너무 길어졌어.]

[춥고, 배고파. 햇볕이 여기까지 비추질 않아.]

[봄이 오질 않아. 여름이 눈을 감았고, 가을이 사라졌어. 그러니까 다들 시들었어.]

[남아있던 겨울꽃들도 똑같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어.]

[갑자기 요즘 들어 ‘겨울’이 더 심해져서 그런 것 같아.]

[찬바람이 쌩쌩 불어. 쌩쌩!]

[여기 있던 겨울꽃 전부 잠들었어.]

[우리도 이제 곧 그렇게 될 거야.]

엘릭은 한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큭! 쉽지 않군.』

메피스토의 비틀린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이 옛 라이벌이 깔아둔 안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 아닌, 짜증이 뒤섞인 어조였다.

엘릭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겨우겨우 눌렀다.

이게 사실이라면 큰 문제였다.

오토 한은 동백의 신에게 빙정을 전달해주면 두 번째 안배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뜻은 전달하지 못한다면 안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엘릭으로서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가문을 복구해야만 하는 그로서는 어떻게든 수를 써야만 했으니까.

“동장군… 때문입니까?”

[맞아.]

[그게 너무 오랫동안 기승을 부렸어.]

[동장군이 찾아올 때마다 하늘이 가려. 비도 안 내리고. 바람도 차갑고.]

[땅도 얼어붙어.]

[녹지 않으니까 썩어.]

[썩고 마른 땅에서는 꽃이 피질 않아.]

[피질 않아.]

엘릭은 자신과 메피스토의 추론이 맞았다는 생각에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아무래도 꽃의 신전의 몰락은 지난 시간 동안 아주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쩌지?’

엘릭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쳤다.

‘잠깐만. 분명히 죽은 꽃의 신들을 ‘시들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 표현이 뭔가 찝찝했다.

‘죽었다고 표현하거나 소멸했다는 말이 아니라 시들었다…?’

꽃이 시든다고 해서 무조건 죽는 건 아니다.

꽃은 식물의 일부에 불과하니까.

“혹시… 시든 꽃의 신들께서 열매를 남기시지는 않았습니까?”

[맞아.]

[꽃은 계속 피지 않아.]

[저물고, 기다렸다가, 싹이 나고, 다시 계절이 찾아오면 펴.]

[그래서 씨앗이 남아있어.]

[잠들어 있어.]

다행히 동백의 신을 비롯한 다른 꽃의 신들도 ‘씨앗’의 형태로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엘릭이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자, 메피스토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남은 꽃의 신들에게 혀를 찼다.

『고문관 같은 놈들이로고. 애당초 처음부터 그런 게 남아있다고 말했으면 이렇게 겁먹지 않아도 됐을 것을. 쯧! 이러니 너희들이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왕은 조용히 해.]

[여기 네가 있을 자리 아냐.]

[맞아. 우리 친구가 있으니까 허락한 거지.]

수선의 신처럼 다른 꽃의 신들에게도 메피스토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 눼이눼이. 그렇습니까? 마신께서 계실 시절에는 본 왕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던 것들이, 방주에 몸을 싣고 있으니 아주 기세가 등등하구나.』

[옛날 이야기 한다.]

[왕년에, 왕년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 치고 진짜 잘났던 사람은 없다고 하던데.]

[꼰대 같아.]

[꼰대 맞아.]

[맞아. 꼰대야. 메피스토 꼰대.]

[메꼰대.]

워낙에 시끄럽게 재잘대는 통에 메피스토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뭐냐?』

[마왕은 안 씻어?]

[냄새나.]

[악취 나.]

[한 머리 두 냄새 나.]

『…이봐, 애송이.』

메피스토의 얼굴에는 어느새 핏대가 잔뜩 서 있었다.

『여기다 확 불 질러버리면 안 되겠느냐? 풀잎들이 아주 바싹 메말라서는 불씨만 틔워져도 아주 활활 잘 타오를 것 같은데!』

[역시 마왕은 나빠.]

[저런 심보니까 냄새나지.]

[냄새.]

[웩. 냄새.]

『이것들이 진짜!』

엘릭은 길길이 날뛰는 메피스토를 무시하고, 꽃의 신들에게 말했다.

“그럼 동백의 신께서 잠드신 곳으로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쩌지?]

[동백이 나중에 알면 화낼 텐데.]

[그래도 동백이 우스던이랑 친했잖아. 친구니까 괜찮지 않을까?]

[좋아.]

[나도 좋아!]

엘릭은 꽃의 신들의 대화에서 한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우스던!

“조부님이 여길 다녀가셨었습니까?”

[응. 맞아. 다녀갔었어.]

[우스던은 우리 친구야. 우리 친구.]

[너도 우스던에게서 나던 향이 많이 나.]

[그러니까 너도 우리 친구.]

다섯 명의 꽃의 신들은 잠자리 같은 날개를 파르르 떨면서 엘릭의 주변을 크게 맴돌았다가, 다른 방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따라와.]

[온실로 가자.]

엘릭은 그들의 뒤를 따라 ‘온실’이라는 방으로 움직였다. 쌀쌀한 바깥과 달리 따뜻한 온도가 내려오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훈훈한 따뜻함이 아닌 퍽퍽한 따뜻함에 가까웠다.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

온실은… 묘지였다.

공동묘지.

[여기야.]

[저기 끝에 누워 있는 게 동백이야.]

그곳에는 마치 관처럼 생긴 수백 개의 철제 상자가 각 구획 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구획은 크게는 총 4개, 작게는 12개로 분류되어 있었다. 꽃이 피는 계절의 순서대로 놓이고, 그 안에서 다시 월별로 나뉘어 있는 것 같았다.

엘릭은 꽃의 신들이 가리킨 겨울꽃의 영역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스쳐 지나간 봄, 여름, 가을 구획의 철제 상자는 모두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더 관처럼 보일 정도였다.

-Camellia L.

엘릭은 꽃의 신들에게 양해를 구해 상자의 문을 열었고.

그곳에 비단보에 곱게 놓여 있는 씨앗을 볼 수 있었다.

‘되어야 할 텐데.’

엘릭은 조심스레 씨앗의 옆에다 빙정을 가져다 뒀다.

메피스토가 말하길, 빙정은 ‘알’이라고 했다.

만년설로 뒤덮인 빙산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서만 맺힌다는 정이자 영.

그렇다면 씨앗에도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 않을까?

물론, 그냥 놔둔다고 해서 바로 반응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겠지.

“【흡수되어라】.”

하지만 여기에 언령을 부과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화아아!

빙정이 다시 환한 빛을 뿜어대더니.

스스스-

그 순간, 동백꽃의 씨앗에서부터 새하얀 서리와 검은 마기가 동시에 흘러나오면서 서리는 빙정으로, 마기는 엘릭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짙은 꽃향기도 물씬 풍겼다.

그리고.

쩌걱!

씨앗에 균열이 생겼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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