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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90화 (90/405)

90화

늑대

엘릭은 조금 놀란 눈치가 되었다.

설마 메피스토를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이게 두 번째였나?’

첫 번째였던 점박이는 현재 마차의 말로서 열심히 자기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메피스토를 감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감각이 가장 예민한 오거스틴과 헤르만마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수선의 신은 메피스토에게 아예 대놓고 싫은 티를 팍팍 냈다.

방금 전까지 일행들 사이를 누비면서 꺄르르 웃어대던 그 요정이 맞나 싶을 정도였으니.

아무래도 적잖은 악연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호오! 이게 누군가? 낯이 익은 얼굴인데. 호박꽃이었나?』

[호박꽃 아냐! 호박은! 여름에 펴!]

『아, 미안. 할미꽃이었군.』

[아냐! 할미꽃도 봄이야!]

『그럼 치자꽃? 너무 못생겨서 그런가, 헷갈리는군.』

[나! 안 못생겼어! 언니! 예쁘댔어!]

『흥! 인간이 입바른 소리 좀 해줬다고 그걸 진짜라고 생각하다니. 그러고도 신이라 할 수 있나?』

[이이익!]

메피스토가 독설을 던지는 족족 수선의 신은 화가 잔뜩 났던지 허공을 발로 차면서 씩씩대기 바빴다.

‘…메피가 원래 저렇게 말싸움을 잘했나?’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저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엘릭은 어쩐지 자신의 탓인 것 같았지만, 전혀 모른 척했다.

다만, 메피스토가 보이지 않을 다른 일행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이 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수선의 신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삿대질하면서 방방 날뛰는 것으로 보일 테니.

아니나 다를까.

“음? 수선의 신께서 왜 저러시나?”

“뭐라도 보이시나 보군.”

“우리가 못 보는 신이라도 있나?”

일행들은 혹시 다른 꽃의 신이 있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벨은 여기저기에다 코로 킁킁 댔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수선의 신께서는 원래 정신이 사나우시고 혼자 노는 걸 즐기시는 편이십니다. 그러니 아마 지금도 혼자서 역할 놀이를 하시는 모양이군요. 세바스찬이라고, 투명 친구도 있있는데 아무래도 그와 싸운 것 같습니다.”

조경사가 덧붙인 말에 일행들은 그제야 납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시선으로 수선의 신을 바라봐야만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은 했었건만.

아무래도 친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시선을 느꼈던지, 수선의 신이 이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연극! 아냐!]

“맞나 보군요.”

[아냐!]

“맞답니다.”

[우씨! 진짠데! 이번엔 진짠데! 잘생긴 인간! 말해줘!]

수선의 신은 한참 동안 분통을 터뜨리다가 엘릭을 봤다.

잘생긴 인간.

엘릭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저 말씀이십니까?”

[응! 너! 여기서! 제일 잘생겼어! 말해줘! 나 거짓말쟁이 아냐!]

“맞습니다. 어떻게 수선 님이 거짓말쟁이겠어요? 옆에 있죠. 어디 씹다가 만 개뼉다구같이 생긴 놈이요. 그렇지 않습니까?”

[맞아! 맞아! 개뼉다구! 씹다 만 것 같아! 너무 좋아! 표현! 꺄르르!]

수선의 신은 잔뜩 일그러진 메피스토의 얼굴을 보면서 배를 잡고 웃어댔다.

『본 왕이 방주의 한낱 종자에게 비웃음이나 당하고. 하! 억울하고 분통할 일이로다.』

[딱 봐도 어려 보이는 신인데 그렇게 싸워서 이겨서 뭐하려구요?]

『흥! 너야말로 어디 씹다 만 개뼉다구와 다니지 말고, 작고 귀여운 요정 놈이나 데리고 다니지 그랬냐?』

엘릭은 잔뜩 토라진 메피스토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지만, 더 이상 대꾸도 하기 귀찮았다.

‘메피를 알아보는 신이라.’

엘릭은 이것이 득일지 해일지 알기가 힘들었다.

‘괜히 신들의 노여움을 사거나, 색안경을 쓰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주 잠깐 고민하는 동안.

‘음?’

그러다 그는 수선의 신의 날개에 노란 꽃가루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

수선의 신은 웃다 말고 아주 잠깐 화들짝 놀랐지만, 곧 정성스런 손길에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릭이 그녀가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수선의 신 님은 장난기가 많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 부끄러움이 많으신 분입니다. 지금도 부끄러워서 저러시는 거구요.”

[아냐!]

조경사가 무뚝뚝하게 던진 설명에 수선의 신은 날개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하늘 위로 휙 날아 가버렸다.

조경사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모양입니다. 아주 많이 부끄러우신가 보군요.”

[아니라고!]

하늘 위에서 수선의 신이 외친 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조경사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한 분이시긴 해도, 신과 인사를 나누셨으니 초대를 받은 것으로 하고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아까 전에 여쭙지 못했던 것을 다시 여쭙겠습니다. 본 신전을 방문하신 용건이 무엇이십니까?”

모든 일행의 시선이 엘릭에게로 향하고.

엘릭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마른 침을 삼키면서 품속에 넣어두었던 빙정을 꺼냈다.

화아아!

빙정이 시린 빛을 토하면서 다시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이것을 동백의 신께 전달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 * *

조경사는 신들께 용건을 말씀드리고, 접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올 테니 잠시 대기하고 있으라며 먼저 신전으로 들어 가버렸다.

그동안 엘릭 일행은 신전의 뒤편에 위치한 객실을 배정받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음.”

방문객을 일절 받지 않고 있어서 그런지, 개개인마다 독실을 받을 수 있어 엘릭은 간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 했다.

물론, 옆에 메피스토가 있어서 그러긴 힘들었지만.

『왜 그러지?』

“신전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좀 많이 달라서요.”

『네가 생각했던 분위기가 어땠기에?』

“뭐라고 해야 하나, 좀 더 산뜻하고 화려한? 동화에나 나올 것 법한 그런 낙원을 생각했거든요. 동장군이 부는 휴지기라서 그런가?”

엘릭이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메피스토가 크게 코웃음을 쳤다.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응? 뭐가요?”

『최소 100년.』

“…?”

『이곳에 꽃이 안 피었을 시간 말이다.』

“…!”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

엘릭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이곳에 오는 내내 대강 보이더군. 뭐, 조금씩 아주 드문드문 피었을지는 몰라도, 저들이 말하는 ‘겨울’이니 ‘휴지기’니 하는 건 최소 그 정도는 되었을 거다. 어쩌면 더 되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벨렌체 왕은 동장군 때문에 신전의 문이 닫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동장군이 얼마나 지속되고 있었는지 들었나?』

“…아.”

『흑의 설원을 뒤덮고 있다는 저 기현상. 본 왕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긴 하다. 하지만 저런 것은 절대 그쳤다가 다시 거세지거나 하지 않는다. 많이 약해졌다가 다시 거세지는 경우는 있어도.』

“그 말씀은 흑의 설원에 ‘겨울’이 온 지는 한참 되었단 뜻이로군요?”

『말했지만, 동장군이라는 건 본 왕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에 흑의 설원은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음침한 곳은 아니었다. 동장군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봐야겠지.』

메피스토는 가볍게 헛웃음을 흘렸다.

『마신 님이 가져다 놓으려던 멸망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방주인데, 정작 그 방주는 ‘겨울’이라는 것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니. 어불성설도 이런 어불성설이 없겠어!』

‘어쩌면 꽃의 신전이 동화나 민담에만 남고, 더 이상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신전의 힘이 약해져서일지도….’

아무래도 신전의 유명세가 곧 신앙을 모을 수 있는 척도가 될 테니까.

‘수선의 신도 ‘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존재감이 작았어.’

엘릭이 알기로 ‘신격(神格)’이라는 것은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한 업(業)을 쌓고 또 쌓아, 영혼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고, 세계에 깊숙한 인식을 새겨 신도들로부터 신앙을 받을 수 있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자리였다.

현재 대륙에서 제일인으로 손꼽힌다는 황금사자조차도 반신(半神)에 다다른 게 고작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신’이라는 존재가 주는 무게감은 결단코 작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수선의 신은 아무리 신격이 작은 꽃의 신이라 할지언정, 단순히 요정이라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존재감이 작기만 했다.

그러나 앞선 추측이 들어맞는다면, 수선의 신의 존재감도 얼추 이해가 되었다.

“그럼 그 동장군이 유독 최근 들어서 크게 기승을 부리게 된 이유가 뭘까요?”

『그거야 모르지. 그냥 정말 수인들이 여기고 있는 대로 주기적인 변화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메피스토의 눈이 요요하게 빛났다.

『어느 누군가가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음.”

『혈미왕인지 뭔지 하는 괴상한 놈도 다시 날뛰려 한다지 않나? 전혀 이상한 추측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공감합니다.”

『어쩌면 네놈 가문의 안배인지 뭔지 하는 것과 이것이 모종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모든 게 공교롭지 않으냐? 네가 나타난 것에 발맞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죄다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네놈의 음험한 선조들이라면 뭔가 꾸몄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팍팍 드는구나.』

확실히 선조들이 좀 무슨 생각하는지 파악하기 힘들긴 하지.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왜 이렇게 친절해지셨대?”

『흥! 그냥 죄다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럴 뿐이다.』

메피스토는 끝까지 협조적인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엘릭은 얼핏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수선의 신은 메피스토를 알아보았고, 꽃의 신전도 그가 알고 있던 방주에서 비롯된 거였다.

전부 그의 시대에서부터 내려왔다는 뜻.

자신이 살던 시대에서부터 강제로 분리되고 말았던 그에게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추억거리일 수밖에 없으니.

그런 것들이 이대로 망가지는 게 보기 싫었던 거겠지.

‘…응? 이렇게 생각하니까, 엄청 오래된 화석이잖아?’

엘릭은 그런 메피스토를 신기하단 얼굴로 빤히 쳐다봤고.

메피스토는 이놈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싶어 미간을 좁혔다.

그러던 그때.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엘릭은 익숙한 기척에 문을 활짝 열었다.

밖에는 조경사가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까지 내리고 있을 정도였다.

“신들께서 조용히 엘릭 메르빙거 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엘릭의 눈이 반짝였다.

다른 일행들은 없다.

그 말은 즉, 자신만 불렀다는 뜻.

“동백의 신과 관련된 겁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신들께서 편하게 머무실 수 있도록 거처를 관리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이따금 신들의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일 뿐. 신들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어떤 용무를 갖고 계시는지는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가도록 하죠.”

엘릭은 조경사의 뒤를 따라 객실을 나섰고, 다시 신전 쪽으로 걸었다.

메피스토가 이미 했던 말 때문일까? 엘릭은 어쩐지 황무지에 가까워 보이는 둔덕과 평원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특히 메말라서 갈색 빛을 띠는 잡초의 풀잎은 톡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화려한 꽃의 조각상이 놓인 신전도 내부는 별것 없었다.

방문객과 신도들의 찬탄을 불러와야 할 복도와 회랑은 을씨년스런 분위기만 감돌았으니.

그 어디에서도 꽃의 향기는 느껴지질 않았다.

그러다 중심부에 도착했을 때.

아치 형태의 지붕을 따라 수백 개나 되는 꽃잎 좌석이 나선 형태로 쫙 도열해 있는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한가득 찼을 꽃잎 신좌(神座)에는 앉아있는 신이 몇 명 되질 않았다.

고작해야 넷? 아니, 다섯?

구석에 앉아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보는 수선의 신까지 합쳐서 그 정도였다.

문제는 나머지도 수선의 신처럼 존재감이 미약하단 점이었다.

마치 곧 시들 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역시.’

엘릭은 메피스토와 한 추측이 들어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장군.

그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넌 누구지?]

[왜 찾아왔지?]

[동백은 왜 찾는 거야?]

[왜 동백꽃에다 빙정을 주려는 거야?]

수선의 신을 제외한 다른 꽃의 신들이 여기저기서 질문을 던져대는 통에 엘릭은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빈 좌석 사이사이로 떨어진 꽃의 신들의 눈들을 일일이 마주쳤다.

군자란.

베고니아.

시네라리아.

칼랑코에.

그리고… 수선화.

문제는 거기에 동백꽃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주황 빛깔로 물들고, 파랗고, 노라며, 붉게 띄는 등, 여러 시선들을 한꺼번에 받으면서 빙정을 꺼냈다.

화아아!

“저는 메르빙거입니다.”

[메르빙거!]

[우리 친구!]

[친구가 왔어! 와! 몇 년 만이지? 천년 만인가?]

[바보야. 40년 전에도 왔잖아.]

[아, 그랬지.]

[그런데 왜 온 거야?]

[맞아. 왜 온 거야? 약속 지키러 온 거야?]

반가워서 그런 걸까.

어디선가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것 같았다.

엘릭은 ‘약속’이란 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잠깐 뒤로 미루고 본론부터 꺼냈다.

“조경사님을 통해 말씀드렸듯, 이것을 동백의 신께 전달해드리라는 것이 선조님들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혹시 동백의 신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만 전해준다면 새로운 안배가 시작되리라.

하지만.

순간, 꽃향기가 확 사라지고,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동백 없어.]

우울함이 퍼져나갔다.

엘릭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동백꽃은.]

[동백은 시들어버렸어.]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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