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늑대
“…으어어.”
엘릭은 녹초가 된 채로 마차 의자에 반쯤 몸을 눕혔다.
저대로 두면 그냥 흘러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 땀 냄새와 열기가 후끈후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괜찮니?”
헤이즈가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누나….”
“응? 뭐 필요해?”
“나 살려줘….”
헤이즈는 난감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그녀 역시 마법의 길이 자신의 적성에 맞질 않아 처음 무도를 접했을 때 비슷한 고생을 해봤으니, 엘릭의 고생을 잘 알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헤르만의 지시는 처음부터 실패하고 말았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목검으로 내려치기만 10만 번이라니. 그게 어딜 봐서 마법사 체력으로 감당이 가능한 수준이란 건지.
심지어 엘릭은 청연의 미궁을 건너오면서 체력이나 힘쓰는 일은 웬만한 마법사들을 두어 명 후려치고도 남을 정도로 뛰어난 편이었다.
그런데도 헤르만의 과제는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고, 그마저도 ‘정자세를 갖추라’는 조건까지 달려 있어 더 죽을 맛이었다.
『거기다 마차로 계속 이동해야 하니 지붕에서 자세를 잡으면서 해야하고. 이만한 고역도 또 없을 것이로고.』
순간, 메피스토의 눈이 반짝였다.
『오늘부로 본 왕은 결정했다.』
[뭘요?]
『본 왕이 모든 힘을 되찾아 이 땅에 새로이 강림하는 날, 사자들을 아주 예뻐해 주겠노라고. 내 오른쪽 자리를 내어 주어 보상을 할…!』
[…【춤춰라】.]
『으갸갹!』
엘릭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바일 가문의 기사들이 왜 다들 그렇게 고집이 세고 전우애가 넘친다더니만…. 이런 거 때문이었나.’
지금처럼 이리저리 같이 구르다 보면 없던 전우애도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겠지.
“그냥 콱 때려치워 버릴까….”
문제는 이미 그러기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는 점이었다.
옆에서 숫자를 헤아릴 때마다 헤르만의 눈이 어찌나 그리 반짝이던지.
거기다 같이 옆에서 구경하던 푸른 매들도 이제 곧 자신의 차례니, 다음 차례는 가위바위보로 정하자느니 잔뜩 들떠 있기까지 했다.
『그게! 아니라! 여자가! 옆에서! 구경하고! 있으니! 그러! 지! 못하겠다고! 한! 거지! 하여간! 인간 수컷들의! 자존! 심은!』
[…【더 열심히 춰라】.]
『갸갸갸갹!』
엘릭은 템포가 빨라지는 메피스토의 물구나무 탭댄스를 구경하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응?’
엘릭은 뒤늦게 헤이즈의 무르팍에 웬 귤색 고양이가 동그랗게 몸을 만 채로 잠이 든 걸 볼 수 있었다.
새끼인지 제법 귀여운 생김새를 자랑했다. 하얀 줄무늬도 멋들어지게 있고, 턱에는 ‘턱시도’라고 부르는 삼각 무늬까지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로 옆에서 이리나가 손수건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설마… 누나, 그 고양이?”
“쉿! 벨, 잠든 지 얼마 안 됐어.”
“…그새 애칭까지 지어줬어?”
“응.”
엘릭은 입을 쩍 벌렸다.
새끼고양이인 줄 알았던 녀석은 벨렌체 왕이었다!
노루스 재상이 배신한 줄 알고 한창 우울해할 때 헤이즈가 조용히 안아준 이후로 많이 따라다니는 것 같긴 하더니.
그새 수화까지 해서 무릎베개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도 명색이 당대 호왕이라는 놈이 저런 식으로 있다니. 체통 같은 거 안 지켜도 되나?
아니, 그보다 호인족은 명색이 호랑이인데, 어떻게 저렇게 고양이처럼 생길 수 있는 건지.
『꼭! 하고 있는! 꼴이! 막내한테! 누나 뺏긴! 둘째! 같구! 나! 꼴! 좋다!』
[…【더 열렬하게 춰라】.]
『꺄우우욱!』
엘릭은 하루 종일 메피스토에게 실컷 분풀이를 해댔다.
* * *
벨렌체 왕-이제는 헤이즈뿐만 아니라, 헤르만도 ‘벨’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호왕의 안내에 따라, 일행이 꽃의 신전에 도착한 건 약 사흘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기에요.”
엘릭을 비롯한 일행들은 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가…?”
“정말 여기가 맞나? 아무리 봐도 신전으로 보이질 않는데.”
헤르만이 벨을 돌아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도 애칭을 부르는 만큼 헤이즈처럼 벨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벨은 어느새 헤이즈의 머리 위까지 올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최근 들어 틈만 나면 인간 형태보다는 수화 상태를 유지하면서 헤이즈와 붙어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리나는 날이 갈수록 불타는 시선으로 헤이즈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맞아요. 겉보기에는 좀 많이 허름하죠?”
“음. 허름한 정도가 아니라, 이건….”
헤르만은 대리석 기둥만 남아있는 신전을 보면서 볼을 긁적였다.
소싯적에는 꽤 큰 규모였는지, 기둥에는 이런저런 꽃의 조각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얼핏 터도 보였다.
“지금은 동장군 때문에 ‘닫혀’ 있어서 그래요.”
“이게 닫혀 있는 것이라고?”
“예. 도착할 거라고 미리 소식을 넣어뒀으니 곧 열릴 거예요.”
일행들은 우선 벨의 말을 들어보자는 생각에 가만히 기둥을 보았다.
그때.
『허! 꽃의 신전이라고 해서 설마 했더니. 이곳이 이렇게 남아있었나?』
메피스토가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기둥, 아니, 정확하게는 그 옆의 허공을 응시하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엘릭은 심안을 활짝 열어 기둥을 둘러싸고 있던 마법 장치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물었다.
[천 년 전에도 여기가 있었나 보네요?]
『아니. 없었다.』
[엥?]
『다만, 계획 중에 있었지.』
엘릭은 심안을 거둬들이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자세히 말해보란 의미였다.
『이곳은 방주다.』
[방주? 그게 뭐죠?]
『세계가 멸망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뒀던, 새로운 요람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인간들이며 용, 거인, 그리고 너희들이 고대신이라 부르는 놈들까지… 위대한 마신 님의 진군에 지레 겁을 먹어서는 훗날을 대비하겠다며, 멸망 뒤에도 다시 이 땅에 싹을 틔워보겠다고 만들어뒀던 곳이지.』
엘릭은 한순간 처음 마도경식의 봉인을 해제했을 때 꿈에서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하늘을 찢고, 대지를 부수며, 또 바다를 가르며 오던 마신을 향해 용과 거인을 마음껏 부리면서 맞서 싸우던 한 존재의 모습을.
메피스토가 말한 ‘멸망’이란 바로 그것을 의미한 걸까?
『물론, 그 진군은 너희로 인해 멈추고 말았지만.』
메피스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엘릭을 슬쩍 보다가, 다시 신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하튼 당시 계획이 추진되다가 중단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계속 진행이 되었었나 보군?』
그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어쩌면 낯익은 얼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아주 재미있을 텐데 말이지.』
메피스토가 아는 얼굴들이라.
이곳은 꽃의 신들이 살아간다는 만신전이니, 진짜 그런 존재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메피스토가 겪을 감정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쿠쿠쿠…!
『열린다.』
엘릭은 작은 진동이 느껴지자 다시 심안을 활짝 열었다.
빗금을 친 것처럼 길게 늘어져 있던 결들이 실타래처럼 잔뜩 뒤엉키더니 소용돌이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문’이 생성되면서 중앙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철컹!
마치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석문이 억지로 열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그그극-
허공 한가운데에서 수직으로 실선이 그어지더니, 새하얀 빛무리가 이쪽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장군 때문에 어둑어둑하던 흑의 설원을 이대로 화사한 빛으로 물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환한 빛무리와 훈풍이 솔솔 불었으니.
뚜벅.
뚜벅.
그 빛무리에서부터 새하얀 법복을 입은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150센티미터는 될까? 작은 키와 체구를 가진 여자였다. 후드를 쓰고 있어 생김새는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제법 귀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두 눈이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게 세로 동공이었으니.
‘파충류?’
엘릭은 그녀의 법복 아래로 나 있는 팔뚝의 절반이 비늘로 덮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휴지기(休止期)’에 찾아오신 손님들이라니. 거의… 이곳의 시간으로 치면 40여 년 만이군요.”
‘40년?’
“반갑습니다. 꽃의 신전을 관리하는 조경사 후니아트로궤악스라고 합니다. 발음하기 어려우실 테니 그냥 조경사라고 불러주십시오.”
“반가워요, 조경사.”
벨이 작은 앞발을 흔들면서 인사하자, 조경사는 고개만 끄덕이면서 뒤로 돌아섰다.
“밖이 어둡고 바람이 많이 찹니다.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엘릭과 일행은 모두 조경사를 따라 빛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치 안트로모프의 비석을 통과했을 때처럼,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넓게 펼쳐진 평원을 따라 야트막한 둔덕이 군데군데 올라와 있는 지형.
쌀쌀한 바람이 감돌았지만, 둔덕에는 메마른 잡초와 들꽃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높게 뾰족하게 서 있는 대리석 건물이 있었으니.
온갖 아름다운 꽃의 조각들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곳이 진짜 꽃의 신전인 모양이었다.
쿵!
그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서 바깥으로 이어지던 결계가 도로 닫혔다.
일행은 슬쩍 그쪽을 보다가, 앞서 걷기 시작하는 조경사의 뒤를 다시 따르기 시작했다.
“평상시 이곳은 온통 꽃으로 무성하고 따스한 바람이 붑니다만, 최근에 ‘겨울’이 찾아오면서 휴지기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조경사는 신전 쪽으로 일행을 안내하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휴지기 동안에는 방문객을 받지 않는 것이 저희 신전의 규칙입니다. 그동안은 바깥으로 나간 저희 측 사제들은 물론, 사제장조차도 출입이 엄금됩니다.”
조경사는 슬쩍 벨을 돌아보면서 무뚝뚝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저희 신전의 오랜 후원자이셨던 호왕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 잠깐 문을 열어드린 것이니, 그런 만큼 여러분들께서도 저희 측의 안내에 되도록 잘 따라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조경사의 말투가 많이 딱딱하게 느껴져도 이해해주세요. 바깥 생활을 거의 안 하셨던 분이라 원래 말수가 적으셔서 그런지, 처음 뵙는 분들은 많이들 오해하시더라고요.”
벨이 재빨리 부연 설명을 덧붙였지만, 조경사는 바로 그것을 걷어 차버렸다.
“이분들이 오해를 하든 말든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만. 오히려 소란을 피우면 그냥 추방해버리면 되니 저는 편합니다만?”
“…그러니까 그런 말투가 오해를 부르는 거라니까요?”
“괜찮습니다. 제 알 바 아닙니다.”
“에휴!”
엘릭은 그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잡초가 흔들리는 둔덕 위로 결이 갑자기 어그러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아주 미세한 크기지만, 파장은 아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휴지기에는 많은 ‘신’들께서 깊은 잠에 드십니다. 동면(冬眠)을 방해하는 행위도 일절 금지되니 각별히 유의해주십시오. 물론, 겨울에 모든 꽃이 지는 건 아니라 간혹 보이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니 이때는 예의를 갖춰주십시오. 그럼 앞에 계신 분부터 어떤 목적으로 찾아오셨는지를 말씀해주실…!”
[인간! 인간!]
조경사는 일행들을 조사하려다 말고 갑자기 위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야만 했다.
손바닥 정도는 될까? 아주 작은 크기에 잠자리 같이 얇은 날개를 단 ‘요정’이 밝은 소리를 내면서 쪼르르 아래로 내려왔다.
[예쁜! 언니! 예뻐! 엄청!]
요정은 가장 먼저 헤이즈 앞에 오더니 그녀의 주변을 뱅그르르 맴돌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헤이즈 누나가 수선 님보다 훨씬 어릴 텐데!”
벨이 앙증맞은 앞발을 휘두르면서 항의했지만, 요정은 꺄르르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예쁘면! 다! 언니!]
“에휴! 또 시작이시네. 다들 인사 나누세요. 수선의 신이세요. 수선화요.”
벨의 말에 다들 놀란 눈이 되고 말았다.
단순히 요정족의 페어리 정도로만 보였는데, 진짜 신이라고?
“말씀 감사합니다, 수선 님.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수선 님이 더 언니 같으신데 어쩌죠? 너무 아름다우세요.”
[언니! 마음씨도! 예뻐! 언니! 나! 예쁘댔다! 다른 신! 자랑!]
마디마디가 뚝뚝 끊어져 무슨 말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어도, 대강 ‘다른 신들한테도 자랑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수선의 신은 날개를 움직이면서 일행들 사이사이를 어수선하게 누비고 다녔다.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상이 아주 찰졌다.
오거스틴에게는.
[괴물! 괴물! 늙고 음침한 괴물!]
“허허! 천 년도 넘게 연세를 먹었을 분께서 이 늙은이에게 나이를 먹었다니, 좀 어불성설이라 생각지 않으시오?”
[몰라! 그런 거!]
헤르만에게는.
[사자! 뚱뚱한 사자! 무거워!]
“이런. ‘무섭다’가 아닌 ‘무겁다’니. 좀 더 분발해야겠군요.”
이사벨에게는.
[짝사랑! 분발! 근데! 여기도 언니! 예뻐! 향기 제일 많아! 기분도! 좋아져!]
“…감사합니다.”
션에게는.
[불쌍해! 알면서! 맨날 당해!]
“…혹시 신은 모두 관심법이라도 쓰는 건가요?”
푸른 매에게는.
[개구쟁이들!]
[시끄러! 많이! 시끄러워!]
[어수선해!]
[정신없어!]
“어어?”
“정신 사나운 양반은 이 양반이지, 우리는 아니오! 신 아가씨!”
“맞습니다! 이 사람들이랑 엮이기 싫다니까요!”
“내가 할 소리를 이 형님들이 하시네?”
이런 식으로 쉴 새 없이 조잘대기 바빴다.
그러다 수선의 신은 엘릭에게 마지막으로 다가갔다.
내심 무슨 평가가 나올까 기대하고 있던 엘릭은 곧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무서워! 어두워! 악취! 가득해!]
수선의 신이 보고 있는 건 엘릭이 아니었다.
옆에 있는 메피스토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