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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88화 (88/405)

88화

늑대

『개판이로군. 아주 개판이로고.』

메피스토는 마차 뒤로 멀리 사라지는 광경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이런 놈이 뭐가 좋다고 저리들 난리인 건지, 원.』

[제가 오죽 잘났어야 말이죠. 다들 너무 탐내는 인재상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좀 많이 피곤합니다.]

메피스토는 뻔뻔하게 대답하는 엘릭의 낯짝이 영 재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전음을 사용하는구나?』

[서로 속생각까지 들여다보는 거 좀 징그럽지 않아요?]

『이 부분에서는 마음이 맞는군.』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냥 이렇게 가죠.]

처음 페어링이 형성되었을 때, 엘릭과 메피스토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무슨 잡생각만 해도 상대가 귀신같이 알아챘으니까.

다행히 지금은 둘 다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페어링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한동안 이것을 개방할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도움은 좀 되는 것 같으냐?』

[글쎄요.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죠.]

엘릭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대답했다.

사실 벨렌체 왕, 헤르만과의 담론이 그렇게 길어진 건 간만에 모르는 분야에 대한 학구열이 타오른 것도있었지만.

그보다 원죄의 인장을 다루는 데 조금 도움 될 만한 부분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새끼 마족을 흡수하고 난 뒤. 엘릭은 여태껏 멀게만 느껴졌던 원죄의 인장에 ‘한 걸음’ 다가가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여전히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형체도 특징도 알 수 없는 건 똑같았지만, 그래도 손끝에 걸리는 부분은 있었다.

그래서 그걸 조금이라도 이쪽으로 잡아당겨 보려 하면….

‘육체가 발작을 해댔었지, 아주.’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리려는 건지는 몰라도, 용해된 마력을 몽땅 끌어다 쓰는 것은 물론, 육체의 진력까지 쥐어짤 정도였다.

하마터면 마나 로드가 일제히 꼬일 뻔했었으니.

엘릭이 그동안 절맥증 때문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엘릭은 그 뒤로 실수로라도 원죄의 인장은 되도록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일.

몹쓸 호기심과 탐구심은 마법사가 가지는 직업병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엘릭은 원죄의 인장에 접근할 만한 다른 방법을 고민하다가, 강체술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육체라는 그릇이 아직 원죄의 인장을 수용할 만큼 단단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근데 진짜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건지 설명 안 해주실 겁니까?]

『그래.』

[탭댄스?]

『흥! 언제까지 그딴 협박을 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르쳐줄 수 없다면 없는 것이니라.』

메피스토는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엘릭이 가만히 그런 메피스토의 뒤통수를 얄밉다는 듯이 바라봤지만, 그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다.

[메피도 모르는 거네.]

움찔!

순간, 메피스토의 어깨가 들썩였다.

[맞네. 모르는 거.]

움찔, 움찔!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대마왕 중의 대마왕이라 불리던 본 왕이 세상에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없잖…!』

[그러고 보니 원죄의 하위 계보가 뭔지도 몰랐었죠? 이 새끼 마족이 자신의 아래라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고. 그럼 원인을 모를 법도 하네. 대체 아는 게 뭐야?]

『그게 아니다!』

[아니긴, 개뿔.]

이번엔 엘릭이 콧방귀를 꼈다.

[하여간 육체는 계속 단련해볼 건데, 만약 아직 인장을 제어할 만한 ‘자격’이 부족한 거면 비슷한 인장부터 계속 채취해야겠네요.]

엘릭은 노루스 재상이 새끼 마족을 처음 만났다던 장소를 떠올렸다.

[악마수라….]

이미 노루스 재상에게는 악마수의 위치에 대해 들어둔 상태.

문제가 있다면, 흑의 설원에서도 깊어도 너무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인데.

『흑의 설원은 모두 아홉 개의 층계(九泉, 9천)로 이뤄져 있고, 악마수가 자란다는 곳은 세 번째 층계인 3천(三泉)에 해당하지. 그런데 거길 가겠다고?』

뒈지고 싶으면 가던가. 하지만 그 전에 나는 풀어주고 가라. 메피스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엘릭도 아직 자신의 실력으로 3천으로 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수인족이 사는 외곽 지대인 1천만 해도 동장군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힘든 판국인데, 거긴 대체 얼마나 난이도가 미쳤다는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노루스 재상도 당시에 여러 투사들과 힘겹게 통과를 했었다던가.

키키키킥. 그깟 쓸모없는 것보단 차라리 내가 훨씬 나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때, 흉성의 인장이 꿈틀대면서 마왕 휼의 사념이 뭐라고 지껄여댔지만.

‘닥쳐. 아무리 그래도 너는 아냐.’

아쉽군….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고. 나는 저것과 달리 언제까지나 너에게 충실하니까 말이야.

휼의 사념은 인장이 진화를 겪고 난 뒤부터 말이 부쩍 많아진 느낌이었다.

절대 받아주진 않았지만.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마족치고 마음에 드는 꼴을 못 봤어.’

엘릭은 이 짐덩이들을 대체 어떡하면 좋을까, 잠깐 고민에 잠겼다.

* * *

“배우겠습니다.”

크게 한바탕 의견 조율(?)을 마치고 난 뒤.

헤르만과 오거스틴이 각각 맞닥뜨리고 만 것은 환호와 좌절이었다.

“허허허! 그래. 잘 생각했다네. 무릇 수학(修學)을 하는데 있어서 배움이 한 가지 방향으로 편중되는 것은 그릇된 사고관을 만들 수 있음이니, 수학자로서 반드시 피해야 하는 자세지!”

“왜냐! 넌 아직도 이 늙은이와 길리티에게서 배울 게 여전히 많은데! 뭘 또 건드려!”

“맞는 말이다! 나도 아직 환안 외에는 가르쳐 준 게 없어!”

길리티도 오늘만큼은 오거스틴과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배우고 싶어서요.”

엘릭이 던진 한마디에 같이 침몰하고 말았다.

“강체술의 근간은 어디까지나 체술입니다. 그렇다면 그걸 더 확실하게 익히기 위해서는 무술에 대한 기초를 더 깊이 다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뭐라고 대꾸할 수 있을까.

“제 가문의 특성상 마족과도 계속 전쟁을 벌일 텐데, 다양한 공격법을 알면 더 좋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고요.”

한순간, 오거스틴은 위기감을 느꼈다.

‘안돼! 이대로 있다간 정말 제자를 다른 놈들에게 뺏길지도 모른다!’

오거스틴이 처음 엘릭을 강제로 제자로 들이다시피 했을 때, 메르빙거의 본분을 먼저 앞세워도 좋다고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녹야가 3순위나 4순위로 밀려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으니!

애당초 자신이 엘릭을 독점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은 없었다지만, 그래도 되도록 내 새끼라면서 더 오랫동안 품고 싶은 것이 스승의 마음이었다.

‘가뜩이나 원로원이나 빈객청의 늙은이들도 관심 보인다는 말이 많았는데, 왜 이제는 하다 하다 고양이 새끼들까지 지랄이냔 말이냐!’

‘고양이 새끼’는 원로 마법사들이 흔히 사자공가의 여러 사자들을 비하할 때 쓰는 은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 본분을 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마법사고, 무술은 어디까지나 보조할 수단으로만 사용할 겁니다.”

엘릭의 말에 그제야 오거스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헤르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첫걸음을 먼저 떼는 게 중요하지. 천 리도 한 걸음부터니.’

어차피 헤르만도 메르빙거의 가주를 무도가의 세계로 완전히 끌어들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 담아둔 계획대로 청사자의 자리를 물려줄 만한 제대로 된 인재로 키워낼 수 있다면.

그리고.

‘나아가 그 위까지 노려볼 수 있다면.’

아직 딸이며 의형제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진짜 속내가 드러난 순간, 언뜻 그의 두 동공 위로 이채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청사자께는 원래 제가 약속드렸던 게 있으니, 치료를 병행하면서 배움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세.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좋을 것 같군. 내 몸을 직접 살피고 변화를 계속 관찰하다 보면 이해하기가 훨씬 순조로울 테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릭은 고개를 숙였다.

그게 무도가가 되었든, 아니면 마법사가 되었든 간에 아무리 혈육이라 해도 타인이 함부로 몸을 만진다는 것은 금기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헤르만은 흔쾌히 자신의 육체를 실험 도구로 삼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으니 고마울 수밖에.

하지만 헤르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소리인가? 오히려 다 죽어가던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으로도 모자라, 내 딸도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자네에게 내가 감사해야지.”

헤르만은 옆에서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이사벨을 보면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어서 헤르만과 오거스틴에게 물었다.

“그런데 두 분 다 합의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싸움이 좀 빨리 끝난 것 같아서요.”

오거스틴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고.

헤르만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당연히 내가 실컷 두들겨 맞았다네.”

누가 보면 이긴 줄 알겠다.

“하지만 노괴의 바짓가랑이를 아주 물고 늘어졌지.”

어떻게 했을지 보이는 것 같아, 괜히 더 깊게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뒤부터.

엘릭은 틈만 나면 헤르만으로부터 무술에 대한 기초 강론을 듣기 시작했다.

“자네는 마법사일세. 그러니 검술이나 체술 같은 한 종목에 깊게 파고들어서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가능성이 크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금 얕아지더라도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접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네.”

여러 병기술을 가르쳐주겠다는 말.

엘릭으로서도 바랐던 것이기에 눈빛을 빛냈고, 헤르만은 그걸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벌써 눈빛이 달라지는군. 다행히 나를 비롯한 우리 여섯 형제들은 저마다 쥐는 무기가 다르고, 추구하는 목표도 다 다르다네. 따라서 자네에게 여러 각도를 비춰줄 수 있을 것이니 적게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네.”

헤르만은 설명을 마치고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두둑, 두두둑!

모든 준비가 끝난 순간.

화아악!

헤르만을 둘러싼 공기가 확 달라졌다.

무겁고, 컸다.

‘이게 사자란 말이지?’

엘릭은 눈빛을 크게 빛냈다.

헤르만은 아직 검을 쥐지도 않았다. 딱히 이렇다 할 모션(Motion, 기초 자세)을 취한 것도 아닌데 마치 거대한 맹수가 엎드린 채 가만히 이쪽을 주시하는 듯한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무도가는 기선 제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더니.

그걸 직접 겪어보니 숨이 턱 막혔다.

‘지금도 몸이 다 낫질 않은 상태라던데. 정상으로 돌아오시면 얼마나 크게 변한다는 거지?’

소드 마스터.

마법사로 치면 9써클에 오른 절대자들.

헤르만은 그만큼 무도에 있어서 끝이라 할 수 있는 곳을 달려봤던 사람이었으니. 엘릭은 정말 전력을 다해 배워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두루 무술을 겪다 보면, 강체술에 대해서도 새롭게 눈을 뜰 수 있지 않을까?

“무기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나를 대신해 싸우는… 도구?”

“맞네. 도구지. 정확하게는 싸워서 이기기 위해, 좀 더 수월하게 이기기 위해 쓰는 도구. 남들은 여기에 도가 담겼느니 마느니 하지만, 최소한 내가 봤을 때 무기는 도구에 불과해. 그렇다면 가장 좋은 무기는 무엇이겠나?”

엘릭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날카로워야 하지 않을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검을 계속 날카롭게 벼릴 수 있을까?”

“그럼 단단함?”

“부러졌을 때는? 실수로 무기를 놓쳤을 때는? 땅에 떨어진 거라도 아무거나 주워서 싸워야지.”

엘릭은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에 미쳤다.

“편해야겠군요.”

헤르만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편하게 쓸 수 있어야지. 의식하지 않아도 손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무기도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이 최고야. 무기는 손의 연장선이라네.”

헤르만은 밤새 즐거운 마음으로 깎아 만들었던 목검을 엘릭에게 던져주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손을 길어지게 해보세.”

“뭐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엘릭은 그걸 가볍게 받았다가 곧 기겁하고 말았다.

“말했듯이 기초부터 배워야겠지. 내려치기 10만 번.”

“…예?”

“내려치기 10만 번. 물론, 마력은 쓰지 않아야겠지?”

“…!”

“허허. 일단 기초부터 하세나. 기초부터.”

엘릭은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헤르만이 기사도로 유명하다지만, 실은 누구들의 큰형이었는지를!

『파하하핫! 그래! 네놈에게 꼬인 사람 치고 정상인이 있을 리가 없지!』

즐거워죽겠다는 메피스토의 파안대소가 얄밉게 들릴 뿐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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