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늑대
엘릭은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은 얼굴로 헤르만을 바라봤다.
대체 뭘 하다가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건지.
처음 엘릭이 대화를 나눴던 상대는 이사벨과 헤르만이 아니었다.
벨렌체 왕이었다.
강체술의 연구 자료집을 받긴 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인족의 시선으로 기술된 것들이다 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벨렌체 왕도 자료집에 대해서 얼추 다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니.
하지만.
“그러니까 맹호출현은 타(打)와 격(擊)의 묘리 말고도 압점(壓點)과 발경(發勁)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여기 오의는 경(勁)의 집중을 통한 점(點)의 형성과 파장에 따른 확산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면, ‘먹구름이 흩어지듯이’라는 구절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지겠네요. 그 뒤에 이어지는 호풍과 환우에 대한 것도 바로 이해가 될 거고요.”
두 사람의 대화는 곧 얼마 가지 않아 강체술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벨렌체 왕은 엘릭이 복구했던 전반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았고, 이를 통해 그동안 모르고 있던 강체술의 기반 지식과 요체(要諦)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엘릭은 강체술을 이루는 주요 뼈대는 알고 있어도, 심의(深意)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아 엉성하게 기워만 두었던 부분을 전부 채우는 게 가능했다.
서로가 서로가 갖고 있던 결여를 채워준다고 해야 할까?
거기다 담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두 사람도 여태 보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이 드러났다.
또한, 다른 각도로 강체술을 볼 기회도 갖게 되었으니.
‘…뭐냐, 이 천재는.’
‘은인은 천재다! 정말이지 이런 분이 우리 안트로모프에 오신 건 선조님들이 주신 홍복이 틀림없을 거야!’
엘릭은 자신의 지식을 아무렇지 않게 흡수해대는 벨렌체 왕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벨렌체 왕은 이제 엘릭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동경심 가득한 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나누는 담론의 수준이 워낙에 깊다는 점이었으니.
‘무, 뭐야? 이 새끼들은!’
‘그러니까 그게 뭔데! 뭐냐고! 우리도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을 좀 하라고!’
션과 푸른 매는 모두 옆에서 뜨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이 거의 열 명이니 십뜨억이로군.』
메피스토의 감평은 아주 간단했다.
반면에.
오거스틴과 헤르만은 여기에 혹하고 있었다.
다만, 자존심이 있어 쉬이 끼어들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두 분이서 대화를 나누시는데, 혹시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한 말씀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때, 갑자기 이사벨이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엘릭과 벨렌체 왕은 뭔가 싶어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시오.”
“다른 좋은 의견이라도 있나요?”
이사벨은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꼭 닮아서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별 건 아니구요. 저도 무도가의 딸이다 보니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있어서 그런데, 점의 형성은 압축의 성질을 띠는데 어떻게 해방의 성질을 가진 파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아, 그건 말이오.”
“그건요. 아주 간단해요.”
엘릭과 벨렌체 왕은 자신들의 대화(?)를 들어줄 동지가 새로 생겼다는 생각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이것저것을 설명해주었고.
이사벨은 거기에 맞춰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가문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 것이라면 본 가에도 비슷한 묘리가 있어요.”
“오, 그렇소?”
“정말요? 어떤 방식인지 여쭐 수 있을까요?”
“그런데 본 가의 비술에 가까운 거라… 잠시만요. 아버지.”
“으, 으음?”
가만히 팔짱을 낀 채로 잠든 척 하고 있던 헤르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주 끼어들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는데 마침 잘 걸렸다는 얼굴이로군.』
메피스토의 말마따나 헤르만의 두 눈은 얼마든지 질문을 하라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험험! 무엇이냐. 무엇이든 물어보려무나. 웬만한 건 설명해주마.”
“‘경’에 있어서는 우리도 뭔가 다루는 게 있지 않았었나요? 전사(轉絲)를 활용한 촌경(寸勁)이었던 것 같은데.”
“아, 그것은 짧게 마디를 친 경력을 나선 형태로 꼬아서 풀어내면서…!”
“오!”
“아아! 그런 방법이!”
헤르만은 엘릭과 벨렌체 왕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들뜬 기분으로 이런저런 장광설을 잔뜩 늘여 놓았다.
‘제기랄! 우리 형님, 발동 걸리셨잖아!’
‘아니. 거기서 묻지도 않은 분경(分勁)은 왜 나오는 건데! 이러다가 침투경까지 나오겠네! 이걸 또 얼마나 들어야 하는 거야? 5시간? 6시간?’
‘아아악! 누가 좀 말려봐!’
‘저걸 누가 말려! 오히려 잔소리만 더 잔뜩 듣겠지!’
‘여긴 지옥이야! 지옥이라고오!’
푸른 매는 자신들의 큰형님인 헤르만을 아주 존경했지만, 유일하게 생각하는 단점이 있다면 바로 설명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되도록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귀에 피가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붙들려 있어야 했으니까.
특히 헤르만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분야가 바로 무술이었으니.
평상시 대륙의 온갖 무술을 섭렵하고 연구하는 취미가 있었던 만큼, 그와도 어느 정도 묘리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강체술에도 큰 흥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푸른 매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엘릭과 벨렌체 왕도 그와 상당히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다는 것.
“그럼 이 부분은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설명이 ‘토론’이 되어버린 순간, 더 큰 지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으어어…!’
장광설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져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자정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도 볼 수 있겠군. 허어! 확실히 자네의 말을 들으니 마법사가 가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현상을 연구할 수 있어서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네.”
헤르만은 어느새 엘릭과 벨렌체 왕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어느 정도 예를 갖출 생각이었지만, 열 시간도 넘게 즐거운 토론이 이어지면서 어느새 의기투합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닙니다. 저도 여태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던 무술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도요! 저도!”
엘릭과 벨렌체 왕의 말에 헤르만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해서 하는 말이다만.”
헤르만은 엘릭을 찾아오면서 했던 생각을 조심스레 꺼냈다.
혹시 검술을 배워볼 생각이 없냐는 질문.
일이 바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검… 술,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물론, 나한테서 말일세. 여태 이야기를 나눴던 내용도 그렇거니와, 요 며칠 간 자네가 보였던 싸움 방식에도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아서 말일세. 그러니…!”
헤르만이 눈을 반짝이면서 뒷말을 덧붙이려던 그때였다.
“누구 마음대로.”
여태 말없이 엘릭 등의 담론을 듣고만 있던 오거스틴이 눈을 사납게 빛냈다.
화아악!
마차 안에 흐르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반쯤 꾸벅꾸벅 졸고 있던 푸른 매는 모두 잔뜩 굳은 얼굴이 되어 옆자리에 풀어뒀던 병장기 쪽으로 손을 가져가려 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좋을걸?”
“…!”
“…!”
“…!”
그들은 바짝 긴장한 채로 정지해야만 했다.
어느새 그들의 목젖에 하나같이 파리가 한 마리씩 붙어있었으니까.
여차하면 이것이 폭발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건너편에 길리티가 히죽 웃었다.
“형님, 어떡할까요? 이것들 대가리 전부 터뜨립니까? 바깥바람이 아주 살벌하니 치우는 게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길리티는 한때 제국을 크게 휘젓고 다녔던 야수왕으로서의 면모를 아끼지 않고 보였다.
덕분에 벨렌체 왕은 살의에 노출되어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헤이즈의 보호로 겨우 숨을 쉴 수 있었고.
이사벨도 아버지 헤르만의 등 뒤로 몸을 바짝 숨겨야만 했다.
푸른 매는 시선을 빠르게 교환하면서 이것에 어떻게 대응할까 논의를 나눴지만.
“내가 한 제안이 결단코 노괴의 제자를 제 제자로 들이겠다는 뜻은 아니었소.”
헤르만은 의형제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며 손짓을 하면서 오거스틴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거스틴은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시선으로 빤히 헤르만을 바라봤다.
아주 오랫동안 경쟁 관계를 벌여왔던 무도가와 마법사 간에는 불문율이 있었다.
제아무리 탐나는 희대의 천재가 나타난다고 해도, 한쪽 진영에서 그를 점찍어두면 다른 쪽에서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불문율.
진영 내 세력 다툼은 있을지언정, 절대 영역을 초과하는 행위는 벌여서는 안 되었다.
물론, 그것이 자로 잰 듯이 딱딱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인재는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거스틴은 헤르만이 이 불문율을 어기려 한다고 본 것이다.
그것도 스승인 자신이 보는 바로 앞에서.
어찌 보면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으니, 오거스틴으로서는 당장 헤르만의 목을 쳐도 절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말했듯이 노괴의 제자는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싸움 방식이 전혀 다르오. 그것이 노괴의 가르침 때문일 수도 있고, 메르빙거의 가풍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검술이든 체술이든 이쪽 방면으로 제대로 접한다면 크게 개안(開眼) 할 수 있을 거란 거지. 아니, 그렇소?”
“….”
오거스틴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설득이 통하지 않았다는 뜻. 눈빛이 여전히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더 설득해보란 뜻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고 사실 말이야 바로 해야지.”
“…?”
“노괴를 만나기 전부터 강체술을 연구했다는 건, 체술에도 그만큼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 아니겠소?”
헤르만이 아무리 예의 바른 성격이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그는 ‘사자’였다.
거칠고, 사나운 사자.
길들이려 하는 순간, 포악한 맹수의 기질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사자였으니!
콰아아앙!
눈 깜짝할 새 마차 한쪽 문이 터진다 싶더니, 오거스틴과 헤르만이 동시에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쿠릉, 쿠릉, 쿠르르릉!
콰콰콰콰-
콰콰쾅! 콰쾅!
오거스틴은 뒤로 물러나는 헤르만을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쫓으면서 손을 잇달아 휘둘러댔다.
그럴 때마다 오른팔에 이식한 다크 엘프의 팔이 어둡게 빛나면서 검은 벼락이 떨어졌고.
헤르만은 그럴 때마다 오러를 잇달아 뿌리면서 오거스틴의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들고자 했다.
아직 몸의 회복이 덜 되었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였다.
휘휘휘!
동장군의 모래폭풍도 같이 마구잡이로 뒤섞이면서 일대가 혼란에 잠기는 동안.
팟!
파밧!
푸른 매와 길리티 간에도 충돌이 벌어졌다.
쿠쿠쿠…!
격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지반이 거칠게 요동칠 정도였다.
“이 고얀! 저놈은 내 제자다! 숟가락 좀 그만 올려, 이것들아!”
“숟가락은 무슨! 애당초 저 아이는 메르빙거가 아니오! 내 알기로 메르빙거는 마도를 좇으면서도, 속 좁은 마탑 놈들과 다르게 무도에도 상당히 개방적이라고 들었소만! 우스던 메르빙거도 형의권의 고수라는 소문이 파다했었고!”
오거스틴과 헤르만의 고성이 폭발소리 사이사이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다들 이게 대체 뭐하는 짓거리들이야…!’
마부석에 앉아있던 카를은 입을 쩍 벌리면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대륙에서도 내로라한다는 고수와 명사란 사람들이 제자를 들이니 마니 하면서 마차를 폭발시키질 않나, 서로 뒤엉키면서 개싸움을 해대질 않나.
이 상황을 어디 가서 말한다고 한들, 과연 사람들이 믿기나 할까?
‘아니, 그보다 정작 본인이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저렇게 서로 싸워서 결정해도 되는 거야?’
“카를!”
카를이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을 때, 갑자기 뒤에서 엘릭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예, 예?”
“뭐해? 가던 길 안 가고.”
그냥 무시하고 가자는 말에 정말 그래도 되나 싶었지만.
쿵!
카를은 재빨리 부서진 문짝을 도로 달아놓고는 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마차를 출발시켰다.
다그닥다그닥.
엘릭 등이 떠나고 나서도, 싸움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 이어졌다.
쿠쿠쿠쿠…!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