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늑대
‘조부님도 꽃의 신전을 방문하셨던 걸까?’
왕궁을 나오면서 엘릭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분이었지만.
엘릭은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성품이었는지,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상(偶像).
그에게 조부님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우상이 지나간 길을 간다?
엘릭으로서는 저절로 마음이 들뜰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부님이 정말 꽃의 신전으로 가셨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들어가면 아무도 나오지 못한다는 흑의 설원의 심처에 연구 목적이 있으셨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셨을 거야, 분명.’
엘릭은 어쩐지 자신이 가려는 길이 40년 전에 조부님이 걸었던 길과 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정황상 모든 게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직감도 그렇고.’
세상의 신비를 파헤치고, 이성과 합리를 추구해야 할 마법사가 ‘직감’으로 그런다는 것은 조금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엘릭은 자신의 그런 직감이 절대 틀리지 않았을 거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조부님이 보셨던 길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게 너무 궁금했다.
그렇기에.
엘릭은 지금부터 바로 그 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러 갈 생각이었다.
* * *
“동장군이라고 했지? 대체 이 모래폭풍이랑 찬바람은 언제 그치는 거지?”
션은 도시의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고 있는 모래폭풍을 보면서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안트로모프는 경계에 세워진 비석이 빚어내는 결계로 항상 보호된다. 흑의 설원으로부터 쏟아지는 온갖 마물들이며 자연 재해까지 막아내기에 수인족들은 편히 그곳에서 터전을 일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결계 밖으로 나가야 할 일행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단순히 시야를 가릴 뿐만 아니라, 엄동설한까지 몰고 오니 어떻게 통과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옆에 있던 카를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그러게요! 그러고 보면 대체 퓨리 놈들은 어떻게 이 바람을 등지고 침공해왔는지 신기하단 말이죠.”
“그러네.”
“응? 그런 마법이 있는 거 아닙니까?”
“세상에 얼마나 많은 마법이 존재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알겠어?”
“에이, 도련님도. 그런 살벌한 농담 같은 거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농담, 아니셨어요?”
“뭘?”
“헐! 설마 지금 저더러 저길 알아서 통과하라는 거 아니죠?”
카를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로 도시 밖을 삿대질했다.
사실 다른 일행들이야 마법사이거나 뛰어난 고수니 어떻게든 몸을 보호할 수 있겠지만, 일개 마부인 그로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흑의 설원의 외곽에 위치한 이 도시까지 오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대체 어디까지 가라고!
그러다 카를은 션이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사람 간 떨어지게…! 다른 사람은 다 닮아도 제발 엘릭 도련님은 닮지 마시라니까요, 좀!”
이번에는 션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야. 말이 너무 심하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엘릭만큼은 아니지.”
“요즘은 별 차이 없으시거든요?”
“취소해라.”
“못합니다.”
“내가 뭐 어때서, 이 새끼들아?”
션과 카를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엘릭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타났다.
“몰라서 묻냐?”
“몰라서 묻습니까?”
아주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두 사람의 질문에 엘릭은 기가 찼다.
“어쭈! 야, 카를! 너 너희 도련님한테는 항상 깍듯하게 굴면서 나한테는 요새 자꾸 개긴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너희 도련님의 베스트 프렌드…!”
“그건 제 알 바 아니고요.”
“하. 진짜 내가 헛살았지, 헛살았어.”
“몰랐어?”
“여태 모르고 있었습니까?”
“닥쳐, 이것들아!”
엘릭이 쏘아붙여도 션과 카를은 콧방귀만 낄 뿐이었다.
그들이 그동안 엘릭 때문에 오죽 고생했던가. 당연히 저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저거 통과할 방법 찾아놨는데, 필요 없다면 뭐 어쩔 수 없…!”
“어이쿠! 우리 엘릭 도련님 신발에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았네. 왜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요? 이 카를이 원래 뭐라고 불리는지 아십니까? 청결의 카를! 깨끗함의 대명사가 아니겠습니까요! 가만히 계십쇼!”
카를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는 입김을 호호 불면서 엘릭의 신발을 깨끗하게 닦기 시작했다.
엘릭은 순간 ‘이걸 콱 발로 차버려?’하고 생각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왼쪽 발도 내밀었다.
“왼발 앞코 부분이 좀 닳았던데.”
“이런! 이러시다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이러고 계실 게 아니라 어서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편하게 쉬십쇼. 그동안 신발은 이 카를이 말짱하게 수선해 놓겠습니다요!”
“마차 몰아야 하잖아?”
“에이. 마차를 제가 몹니까? 말이 몰지. 걱정 마십쇼.”
션은 어느새 쿵짝이 잘 맞는 엘릭과 카를을 보면서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엘릭에게 물었다.
“어떻게 통과하겠다는 건데? 퓨리 놈들은 대규모 가호라도 받고 있는 것 같던데. 어디 신전에라도 다녀오려고?”
“아니. 바람길을 가로지를 거야.”
“바람… 뭐?”
션은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심안을 활짝 연 엘릭의 시야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마구잡이로 불어 닥치는 모래폭풍 사이로 빗금을 친 것처럼 수도 없이 나 있는 결들이.
그중에서도 유독 짙게 나타나는 것들이 있었으니.
‘그 가호를 그냥 모방하면 그만이지. 안 그래?’
퓨리 군단을 동장군으로부터 보호하던 가호는 인위적으로 모래폭풍이 그들을 빗겨나가게 했다.
엘릭은 그것을 침공이 벌어지던 사흘 내내 계속ㅂ 볼 수 있었고, 덕분에 이제는 모든 프로세스를 머릿속에 담아둔 것으로도 모자라 원리까지 파악해둔 상태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대형 마법인 그것을 똑같이 따라 할 수는 없을 테지만, 필요한 부분만 떼어 와서 사용하는 건 별반 어렵지 않았다.
“저기 왕 님 오시네. 그럼 어서 출발하자.”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 * *
빛이 전혀 들지 않은 공동 속.
그곳에서 아주 천천히 요사스럽게 빛나는 눈이 떠졌다.
[지금 그딴 걸 보고라고 올리는 건가?]
공동이 이대로 폭삭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목소리가 크게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육합전성!
동방에서 단순히 의지만으로 허공에다 목소리를 터뜨린다는 기예였다.
더구나 그 속에 담긴 살의는 너무나 강렬했으니.
대(對) 안트로모프 침공군의 사령관이었던 바라센은 더더욱 바짝 바닥에다 머리를 박아야만 했다.
“죗값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바라센은 한순간 머리 뒤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만큼 자신의 주인이 한껏 노려보고 계시단 뜻일 테지.
그리고 자신의 충정 어린 속내를 여과 없이 알아 봐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주인께서는 저급한 것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미래를 엿볼 줄 아는 초능력을 지니셨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또 메르빙거인가?]
크르르-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예나 지금이나, 그 핏줄을 타고난 놈들은 허구한 날 나를 집요하게도 계속 괴롭혀대는구나.]
바라센은 더욱 깊숙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외부에는 단순히 주인께서 영호족의 수장이시고, 퓨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호왕가의 지배 체제에 반발하여 일어난 야망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바라센은 주인이 수백 년도 넘는 세월 동안 도를 닦았던 호선(狐仙, 여우 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당대 메르빙거 가주와 대적하게 되면서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그것을 당시 수인족을 이끌던 율호왕이 거두어주어 겨우 살 수 있었다지만, 그래도 그때 입었던 마음 속 상처는 아직까지 낫질 않고 있었다.
그런데 메르빙거는 그 뒤로도 두 번이나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한 번은 40년 전에.
그리고 이번까지…!
주인께서 메르빙거라고 하면 이를 가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소신은 아둔하여 그 젊은 인간이 메르빙거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자로 인해 주인께서 수모를 겪으셔야 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퓨리 아래에 있는 ‘연합’ 중에 안트로모프의 소식을 듣고 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는 도시가 있다는 보고가 종종 들려왔다.
물론, 그런 곳들은 본보기로 따로 손을 써두긴 했다지만.
바라센은 이런 현상들이 절대 긍정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탑은 아무리 단단하게 쌓아도, 한 축만 빠져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법이니.
“그러니 그자를 징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방법이 있는가?]
“방금 전 안트로모프 근방에 심어둔 ‘눈’으로부터 그자가 안트로모프를 떠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떠났다? 어디로?]
“파악 중에 있습니다만, 꽃의 신전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제 선조가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로군.]
“그런 듯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녀석을 잡겠다는 거지?]
그동안 바짝 엎드려 있던 바라센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서서족(瑞鼠族)답게 쥐를 연상케 하는 간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전을 통째로 불태워버릴 생각입니다.”
[꽃의 신전은 만신전(Pantheon)이다. 섣불리 건드려서는 우리에게만 화살이 돌아올 수 있음이니.]
바라센은 주인께서 염려만 표시하실 뿐, 안 된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은 것에 집중했다.
“본래 꽃은 불에 아주 활활 잘 타오르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동장군이 찾아온 겨울. 꽃이 피기에 좋은 계절은 아니지요. 오히려 이렇게 한 번 화전을 일궈줘야 토지가 그만큼 비옥해지지 않겠습니까?”
[궤변이로군.]
“그럼 그리 진행하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꼬리’를 거둬야 할 것이나,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바라센은 고개를 숙이면서 뒤로 조심스레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주인, 혈미왕은 바라센이 완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몸집을 일으켰다.
우르르!
족히 수백 명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큰 공동이 들썩일 정도로, 혈미왕의 덩치는 아주 비대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다른 한쪽으로 돌아갔다.
바라센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곳. 어둠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한 사내가 천천히 몸을 드러냈다.
창백한 인상과 왼쪽 관자놀이에 뿔이 나 있는 마족이었다.
[저쪽은 이만하면 된 것 같고.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도록 하지.]
“그러시죠.”
마족의 엷은 웃음소리에, 혈미왕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빙정을 필요로 한다고?]
* * *
엘릭의 호언장담대로, 마차는 동장군의 모래폭풍을 가로지르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카를은 어떻게 이런 마술이 가능한 거냐고 신기해했지만.
“내가 원래 좀 잘났잖아?”
엘릭의 거들먹대는 모습에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편하게 가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동장군 덕분에 마물이 나타나는 횟수도 극히 적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대체 저 두 사람은 무슨 관계야? 라센트 시에서 만났다는 말은 들었는데.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 아냐?’
카를은 아까 전부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엘릭과 이사벨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무향화 이사벨에 대한 소문은 여기저기에 많이 나 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니.
만약 엘릭과 잘 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청사자도 도중에 끼어들면서 아주 진지하게 무언가를 이야기 나누는 것 같은데.
대체 뭘 하는 걸까, 싶은 마음에 슬쩍 그쪽을 곁눈질 하는데.
덕분에 카를은 크게 놀랄 만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혹시 자네, 검술을 배워볼 생각 없나?”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