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늑대
아주 잠깐이지만.
엘릭과 메피스토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마신이시여! 당신은 내게…!
-결국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군. 이제야 만족하나, 메르빙거? 네가 꿈꾸던 이상향이란 것이 정말 이딴…!
-본 왕은 원죄의 메피스토펠레스이니라! 세상 모든 미지와 불합리가 내게서 비롯되었으니! 판도라의 상자에서 태어난…!
도저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을 여러 단편적인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메피스토가 봉인되기 전에 겪었던 과거들.
그 장면들 속에서, 메피스토는 한결같이 피와 시체가 낭자한 전쟁터 위에 있었다.
괴상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면서.
-하하하하!
하지만 엘릭은 어쩐지 그 웃음이 처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런 상황을 자신이 원한 건 아니라는 듯.
그저 타고난 숙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굴레를 쓴 것뿐이라는 듯이.
그렇기에 원죄(原罪).
사는 것이, 숨을 쉬는 것이 전부 ‘죄’인 죄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대체 무엇을 보는 것이냐?
엘릭은 장면들을 더욱더 깊이 파고들려다 말고, 갑자기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확 깨고 말았다.
짜증으로 잔뜩 일그러진 메피스토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무래도 엘릭이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봤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문제는.
‘내 것도… 보인 것 같은데.’
엘릭은 자신의 영혼도 낱낱이 파헤쳐진 듯한 위화감이 들었다.
메피스토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기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긴 그도 그렇겠지.
속내를 들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그때, 장면이 도중에 뚝 끊겼다.
츠츠츠-
천천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엘릭과 메피스토 간에 이어져 있던 고리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게 되었을 때쯤.
“…윽! 속 안 좋아.”
『꾸웨에엑!』
엘릭은 울렁이는 속 때문에 가슴을 몇 번이나 두들기고, 메피스토는 아예 구석에 틀어박혀서 헛구역질을 해댔다.
여자도 아니고, 징그러운 남자의 얼굴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셈이니… 비위가 단단히 상할 수밖에.
“제자야, 왜 그러느냐? 몸이 좋지 않으냐?”
오거스틴이 걱정되는 얼굴로 엘릭의 맥을 짚었다.
벨렌체 왕과 노루스 재상도 걱정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 마족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은인이 다치기라도 했나 싶었으니.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냥 간단한 현기증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오거스틴은 엘릭에게 따스한 마력을 불어 넣으면서 바짝 긴장된 몸이 조금씩 이완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말과 달리.
엘릭의 신경은 여전히 잔뜩 곤두서 있었다.
‘아까 전에 그건 대체 뭐야?’
새끼 마족을 잡아먹었더니 갑자기 메피스토의 인장이 반응을 보였다. 혹시 메피스토가 예전에 지나가듯이 말한 ‘자격’의 요건이 충족된 걸까?
『뭐긴 뭐야? 네놈과 본 왕 간에 페어링이 생겨버렸단 뜻이지. 제기랄!』
때마침 메피스토가 헛구역질을 겨우 끝내고 얼굴을 팍 들었다. 미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짜증이 단단히 뒤섞여 있었다.
‘어? 뭐야, 이거? 제 말 들려요? 전음 안 썼는데?’
『본 왕도 지금 적잖게 놀라고 있는 중이다. 영혼 간에 싱크로가 생겨버리다니. 아무리 본 왕이 사념만 남은 상태라고 하지만… 그래도 인간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뭐 좀 아는 거 있으면 제대로 말해봐요!’
『본 왕이라고 한들 뭘 아는 줄 아느냐! 방금 그 인장이 본 왕의 인장과 어떤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만 갈 뿐이지.』
잔뜩 구겨진 메피스토의 이마는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본 왕의 인장에 둘러싸인 장벽이 조금 해제되긴 했다만. 설마 이딴 식으로 벌어질 거라고는…!』
‘진짜 대마왕 맞아요? 그 자리 혹시 노름으로 딴 거 아니죠?’
『감히 본 왕의 위명을 의심하는 것이냐!』
‘아, 죄송해요. 노름으로 딴 건 아니겠네.’
『당연하지. 본 왕이 얼마나 위대한…!』
‘이런 호구를 등쳐먹었으면 등쳐먹었지, 반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겠지.’
『이놈! 감히!』
메피스토는 버럭 소리를 질러도, 엘릭이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이제는 ‘눈치’가 아니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서로 간에 연결된 심령은 상대의 표면의식을 포함해 대략적인 감정 상태를 포함한 표층심리까지 전달되었으니까.
현재 엘릭의 심리는 아주 간단했다.
무시.
『악마수에 대한 것이나 물어봐라!』
메피스토는 매번 자신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이 짜증 났지만.
어쩌랴.
당장 물리적인 행동이 가능한 건 엘릭인데.
엘릭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슬쩍 메피스토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요.’
『뭐냐!』
‘저한테서는 뭐 봤습니까?’
혹시 이상한 흑역사라도 본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되는 마음에 돌아보는데.
『….』
이상하게도.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로 콧방귀만 끼고 있을 뿐,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놀릴 거리였다면 충분히 약점으로 잡아 부려 먹을 텐데도 불구하고.
* * *
엘릭이 어지럽던 정신을 겨우 수습하고 다시 입을 뗀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모두 끝났습니다.”
여전히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있던 벨렌체 왕과 노루스 재상의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그럼?”
“예. 마족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아!”
노루스 재상의 눈가에 습막이 차올랐다.
그는 엘릭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이 말 외에 다른 할 말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분명히 머릿속에 가득했었는데, 막상 꺼내려고 하니 금세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만큼 노루스 재상으로서는 한평생 멍에나 다름없던 것을 덜어낸 것이니,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큰 힘이 빠져나간 자리라, 몸이 허해지실 수 있으니 관리는 꾸준히 하셔야 합니다. 이따 보신하실 수 있게 간략하게 처방전을 적어드릴 테니 꾸준히 약을 달여서 드십시오.”
“알겠소. 내 빠지지 않고 먹으리다. 1년이라도 더 오래 살아야 왕께서 장성하시는 것을 볼 수 있지 않겠소?”
엘릭은 따스하게 웃으면서 노루스 재상의 늙은 손을 맞잡아주었다.
속내는 조금 달랐지만.
‘음. 슬슬 줄 때가 됐는데.’
『뭘?』
‘원래 주기로 했던 거요.’
『겉으로는 가문의 지난 약속을 지키려는 척, 친구를 위하는 척 하면서 온갖 고고하고 정의로운 행동은 다 하더니. 속물이로구나.』
‘속물이 뭐 어때서 그렇습니까? 친구 사이라도 받을 건 받아야지. 전 어디 사는 M자 탈모 씨처럼 호구로 안 살 겁니다.’
『탈모 아니라니까!』
‘누가 뭐랍니까? 전 메피가 그렇다고 한 적 없는데?’
『이이이익!』
‘그런데 왜 자꾸 남의 속마음에 끼어듭니까? 변태세요?’
『자꾸 들리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스토커네.’
『아니라고!』
‘탈모 스토커.’
『야!』
그러던 그때, 벨렌체 왕이 조막만한 손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함이었다.
“부디 받아주세요.”
엘릭은 놀란 듯 눈을 화등잔만하게 키웠다.
“이, 이게 뭡니까?”
물론, 연기는 여전히 많이 어색했다.
그래도 다행히 벨렌체 왕은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다.
“저희 마음입니다.”
“어이쿠. 이런 걸 다…! 굳이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흥!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딴 말을 하여라!』
‘퉷!’
“은인께서 물욕이 없으시단 것, 명예를 중요시하신단 것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받아주세요. 그래야 저희 마음이 편안해지니.”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엘릭은 공손한 손길로 함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딸칵!
그 안에는 곱게 깔린 비단보 위에 낡은 양피지와 두꺼운 책자가 하나 담겨 있었다.
“처음에 약속드렸던 율호왕의 보물 지도와 본 왕가에 남아있는 강체술의 연구 자료집이에요.”
엘릭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둘 다 중요한 것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아래도 보세요.”
“…?”
엘릭은 벨렌체 왕이 시키는 대로 비단보를 슬쩍 위로 들추었다.
그러자 한순간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확 하고 불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약초가 하나 정성스레 놓여 있었다.
“이거… 삼(蔘) 입니까?”
“역시. 은인께서는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어떻게 이렇게 귀한 것을…?”
동방에서도 특별한 지형에서만 자라, 제국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약초.
엘릭도 책자에서나 보던 것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신기한 건, 그가 알기로 삼은 양기를 띄는 약초일 텐데, 이것은 냉기를 뿜어댄단 점이었다.
“천년설삼이에요. 본 왕가에 내려오는 영약이죠. 그것도 같이 받아주세요.”
“…!”
엘릭은 재빨리 함의 뚜껑을 닫고, 굳은 얼굴로 벨렌체 왕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받지 않겠습니다.”
『뭐지? 네놈이 이런 걸 거절할 사람은 아닐 텐데.』
‘이거 받았다간 진짜 제대로 코 꿰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수인족과의 우방 조약이지, 일방적인 호혜 관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잘못했다간 안트로모프에 빚을 씌우는 게 아니라, 제가 빚을 씔 수 있어요.’
가문을 재건하려는 엘릭으로서는 앞으로 맺을 모든 인연과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봐야만 했다.
일방적인 관계가 성립된다면 금세 파탄 날 수 있었다.
하지만 벨렌체 왕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 수인족에게는 이런 전설이 있어요. 세상이 파멸의 위기에 잠길 때, 일족의 성세를 이끌어 낼 영웅왕이 내려온다는 전설. 그 전설 속 위인은 강체술을 익히고 있다 해요.”
“…?”
“그리고 본 왕가에는 이런 말도 전해져요. 왕가가 누란의 위기에 잠겼을 때, 도와주는 은인이 있다면 그가 곧 예언의 대상이라고.”
이쯤 되면 엘릭도 말뜻을 알아채고 계면쩍을 수밖에 없었다.
“전 어쩐지 엘릭 님이 은인이신 것 같은데, 아닌가요?”
“…너무 금칠을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만.”
“‘혹독한 겨울이 불어와 땅도, 터전도, 백성의 마음도 모두 얼어붙을 때, 그가 몸소 찾아와 겨울을 거둬가고 이 땅에 봄을 피게 할 것이다….’ 구절은 이래요.”
한순간, 엘릭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독 한 가지 단어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겨울.
그 단어가 꽃의 신전으로 가는 이 길목에 남아있는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할까?
‘설마 가문의 안배가 여기에도?’
‘그러고 보니 조부님도 40년 전에 흑의 설원에 ‘볼일’이 있어서 오셨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러니 받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이쯤 되면 엘릭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함의 뚜껑을 닫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제야 벨렌체 왕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꽃의 신전으로 가시는 것 말인데요….”
벨렌체 왕은 그러면서 슬쩍 노루스 재상을 엿보았다.
노루스 재상은 이 손자보다도 더 어린 호왕의 속내가 너무 투명하게 보여서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리나.”
“예. 재상.”
친위대장이 조용히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왕께서 직접 은인들을 꽃의 신전으로 안내하고자 하신다. 동장군도 불어오고 가는 길도 많이 험난하니 옆에서 잘 뫼실 수 있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벨렌체 왕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가 살짝 걱정이 묻어났다.
“괜찮을까요? 퓨리가 다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그 정도는 노신이 생각해둔 바가 있고, 관료들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한 사람이 빠진다고 해서 멈출 만큼 안트로모프는 작은 곳이 아닙니다, 왕이시여.”
“그런가요?”
“예. 그러니 잘 다녀오시지요. 이곳은 왕께서 돌아오시는 날까지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