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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84화 (84/405)

84화

늑대

“치료법이라니? 그게 정말 있나요?”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벨렌체 왕이었다.

엘릭은 말없이 웃으며 그를 보다가, 노루스 재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독기가 빠졌던 그의 동공에 다시 초점이 잡히고 있었다.

“젊은 시절, 힘에 심취했던 적이 있소. 믿었던 이전 호왕께서 그리 가버리시고, 안트로모프에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였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쏠렸다.

“그래서 나라도 어떻게든 힘을 얻지 않으면 안 되겠단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 별의 마도사가 안트로모프를 구했을 때처럼… 나 역시 그렇게 안트로모프를 구하고 싶었소. 그러다 우연히 악마수(惡魔樹)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허! 악마수?』

[악마수라면 마족이 잉태된다는 나무 아닙니까?]

『맞다.』

[대단하기도 하시네. 그걸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

마족은 미지와 불합리에서 태어나는 존재이고, 그런 만큼 어디서 어떻게 태어난다고 해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악마수는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잉태 장소였다.

마기를 한가득 먹고 자라 마족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맺힌다는 나무.

메르빙거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인간의 대륙 개척이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악마수의 개체수도 급격하게 줄어서 이제는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웬만한 마물들조차도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음험한 마기를 풍기는 것이 악마수일진대. 흑의 설원이라 남아있는 것인가?』

엘릭은 아마 메피스토의 추측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짐작했듯이 악마수를 발견하여 거기에 맺혀 있던 열매를 전부 먹어 치웠소. 어디서 듣기로는, 마수(魔獸)가 되면 그만큼 힘도 세질 수밖에 없다고 하여서 말이오. 그리고 실제로 강해졌지.”

물론, 그만큼 나중에 가서 후회할 일이 더 많아지고 말았지만.

노루스 재상은 그렇게 뒷말을 덧붙였다.

“그대도 이미 본 대로 나는 이미 이 마족과 거의 동화가 이뤄진 상태요.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내 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지.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아도 금세 자아를 잡아 먹히고 말 거요. 그럼 ‘진짜’ 마족이 하나 탄생하는 거지.”

노루스 재상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기 싫소. 인외가 되어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두렵소. 해서 죽으려는 거요. 그런다면 이 빌어먹을 마족 놈도 숙주를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말라버리고 말 테니까.”

두근!

두근!

노루스 재상의 살의를 읽었기 때문일까?

심장이 다시 거칠게 뛰었다.

허튼 수작을 부릴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말라는 경고일 테지.

물론, 노루스 재상은 그냥 무시했다.

“그런데 나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하시었소? 괜한 짓을 할 것이라면 생각도 하지 마시오. 오히려 섣불리 잘못 건드렸다간 도리어 큰일만 치를 수 있음이니.”

노루스 재상에게는 만약 허튼 수작을 할 것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엘릭은 그 속에 일말의 희망이 깃들어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정확한 거죠?]

『왜? 쫄리기라도 하느냐?』

치료법은 메피스토가 말해준 것이었다.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로 콧방귀를 꼈다.

[틀린 거면 저만 골치 아파지니까요.]

『그럼 본 왕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것이겠군?』

[요즘 계속 깐족대시던데. 탭댄스 가죠.]

『걱정 마라. 오죽하면 네 스승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일까? 그리고 여차하면 네 스승이 죄다 찢어버릴 테니 뭐가 걱정이냐.』

치료법은 아주 간단했다.

노루스 재상에게 막대한 마력을 쏟아부어 마족을 강제로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

다만,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마족과 노루스 재상의 영혼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고리를 일일이 끊을 수 있을 만큼의 세심한 마력 제어력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수작업이 가능한 건 오거스틴밖에 없었다.

엘릭도 심안을 지니고 있는 만큼 시간을 들인다면 가능할지 몰랐지만.

마족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했다.

게다가 엘릭은 따로 할 일이 있기도 했다.

“스승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냐. 부탁할 것이 딱 하나 있다더니. 설마 이런 식으로 부려 먹을 줄이야.”

이미 엘릭에게 언질을 들었던 오거스틴이 웃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노루스 재상은 대체 엘릭이 뭘 하려는지 몰라 잠시 인상을 찡그렸고, 곧 모든 방법을 듣고 난 뒤에는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허! 정말 그런 걸로 가능하겠소?”

“가능할 겁니다.”

“어떻게 그리 믿소?”

노루스 재상은 오거스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퓨리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오거스틴과 길리티는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확인할 수가 없었으니 지금은 그냥 엘릭의 일행이라고만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40년 전에 안트로모프에 오셨다던 조부님도 지금 스승님께는 비하실 바가 아닐 겁니다.”

“…그게 사실이오?”

노루스 재상을 비롯한 벨렌체 왕과 관료들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퓨리의 위협으로부터 안트로모프를 보호해준 우스던 메르빙거는 여전히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었다.

“흥!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영감과 두고두고 비교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것인지 아무도 모를 테지. 결국 그 사람이 남긴 그림자는 평생 치우지 못하는 것이니까.”

기분 나쁘다는 듯이 콧방귀를 끼면서도, 어쩐지 오거스틴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하여간 지금 그대는 이대로 있어도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뭐라도 해보고 나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드는데, 아니오?”

오거스틴의 말에 노루스 재상은 잠시 벨렌체 왕을 봐야만 했다.

벨렌체 왕이 그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 뒤에서 수양딸인 이리나도 제발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

‘내 목숨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로구나.’

노루스 재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심장과 연결되어 있는 고리만 끊어주십시오. 그 뒤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오냐.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대충은 알겠다만, 그래도 조심해라.”

“감사합니다.”

엘릭은 담담하게 웃었다.

오거스틴은 이 제자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시작합시다.”

오거스틴은 노루스 재상의 뒤로 돌아가 등에다 손을 가져다 댔다.

두근, 두근!

노루스 재상의 심장이 거칠게 뛰는 소리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마족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날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오거스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마력을 한껏 쏟아부었다.

“…흡!”

노루스 재상은 한순간 체내로 거대한 노도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끝도 없이 넓은 망망대해가… 그 너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이라는 존재는, 그리고 심장에 기생 중인 마족은, 그 앞에서 딱 한 번 출렁이기만 해도 뒤집힐 작은 돛단배에 불과했다.

‘이, 이게 정말 사람이란 말인가…!’

노루스 재상은 경악하면서도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좁은 우물에 갇혀 지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절대 쓰러뜨릴 수 없을 것 같던 혈미왕도 이 사람에게는 비할 바가 아닐 것 같았으니!

[정신 차려!]

노루스 재상은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다 말고, 오거스틴의 목소리를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사이.

키에에엑!

마족이 처음으로 괴성을 내질렀다.

놓으라며, 치우라고 발버둥을 쳤지만 끝내 거센 마력을 당해내진 못했다.

따다다당!

노루스 재상은 마치 심장에 박혀있던 고리가 일제히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순간, 몸이 헐거워지고 있었다.

키아아악!

재상의 머리 위로 마족이 둥실 떠올랐다.

감히! 감히이이!

강제로 터전을 잃어버리고, 쫓겨나다시피 한 마족의 얼굴은 온통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여태껏 제대로 된 자아를 갖춘 적도 없었기에 오로지 본능만 내세우는 것이 고작인 새끼 마족.

하지만 품고 있는 마기량은 상당해서 웬만한 준고위급 마족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주 못생긴 놈이로… 음?』

메피스토는 그런 녀석을 가만히 구경하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그의 심기를 톡톡 건드리는 게 있는데.

그게 대체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태어난 지 백 년도 안 된 녀석이니만큼 그가 아는 놈도 아닐 텐데, 대체 뭐지?

하지만.

엘릭은 메피스토의 궁금증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런 녀석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흡수되어라】.”

휘휘휘!

마족은 마기 형태로 갈가리 찢기면서 엘릭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오거스틴이 강제로 뜯은 마족을, 엘릭이 집어삼킨다.

아주 간단한 계획이었지만, 두 사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으니.

엘릭으로서는 안트로모프에 빚을 지우면서 마기도 보충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죽여버리게… 커컥!

키키킥! 맛있어 보이는 신참이로군. 이번엔 먹어도 되겠지?

이름 없는 새끼 마족은 발악을 하다 말고, 갑자기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마왕의 사념이 모습을 드러내자 바짝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치 고양이 앞에 놓인 생쥐 같다고 해야 할까?

분명히 당장 겉으로 보이는 체급은 새끼 마족이 컸다.

녀석은 아직 제대로 인장을 확인하지는 못했어도 ‘진귀’ 급에 해당했고, 사념만 남은 휼은 아직까지 ‘일반’ 급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품고 있는 저력과 사나운 기질이 달랐다.

자아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새끼 마족은 휼의 사념에게 있어 ‘인두겁도 쓰지 못한 병신’에 불과했고.

반대로 휼의 사념은 새끼 마족에게 있어 감히 시선도 마주치지 못할 마왕의 잔재였으니 기가 눌릴 수밖에 없었다.

체급은 상관없었다.

생전에 닿았던 위치가 어디인지, 가지고 있는 힘을 얼마나 잘 다룰 수 있는지 역량이 중요할 뿐이었다.

‘먹어.’

엘릭은 그래서 굳이 이번에는 휼의 사념에게 제동을 걸지 않았다.

아직 죽지도 않는 새끼 마족을 억지로 찢으려 해봤자 귀찮기만 할 뿐이니, 그냥 통째로 요리를 부탁하는 것이다.

그림자 걸음을 가르쳐준 대가이기도 했다.

앞으로 비슷한 방식으로 더 많은 기예를 가르쳐달라는 의미의 뇌물이기도 했고.

‘대신에 인장은 남겨.’

그러도록 하지. 그럼, 아주 감사히 먹겠습니다!

휼의 사념은 사악하고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새끼 마족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마치 고양이가 장난으로 생쥐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었다가 천천히 잘라먹듯이, 휼의 사념은 새끼 마족을 아주 느긋하게 삼켜나갔다.

그럴수록 흉포의 인장은 환한 빛무리를 내뿜으면서 조금씩 형태가 달라져 갔으니.

검은 선을 몇 개 그은 것이 전부였던 조악한 형태가 천천히 그림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10성이 되어 ‘틀의 완성’을 이뤘고, 그마저도 단숨에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틀’이 만들어졌다.

진화.

인장이 힘을 얻어 기존의 틀을 벗어날 때 일어난다는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엘릭은 흉포의 성질이 더욱더 잔학한 폭력성을 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흉성(凶性).

휼의 사념은 이제 대기마저 울릴 정도로 뜨거운 살의를 풍길 수 있었다.

키키키킥! 그래. 이제야 좀 사는 것 같군. 그동안은 너무 갑갑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좀 더 자신에게 힘을 보태달라는 말이었지만.

엘릭은 미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뭐지?’

휼의 사념이 먹다 말고 내뱉었던 새끼 마족의 인장이… 갑자기 원죄의 인장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혹시 메피스토가 무슨 꼼수라도 부리나 싶어 제지하려 했지만, 이상하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건 대체…?』

더군다나 메피스토도 이 현상에 대해 놀라고만 있을 뿐, 영문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 순간.

철컥-

엘릭은 영혼과 원죄의 인장 간에 보이지 않는 고리가 형성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가지고 있으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던 원죄의 인장을, 조금씩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메피스토의 존재감까지도.

문제는 메피스토도 똑같이 엘릭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철컥-

철컥-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고리가 조금씩 채워졌다.

“…!”

『…!』

엘릭과 메피스토가 서로를 마주 보며 똑같이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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