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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83화 (83/405)

83화

늑대

“이 정도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돌아가는 것 같지 않수?”

길리티는 작은 소요 끝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안트로모프를 보면서 만족에 찬 미소를 지었다.

오거스틴은 동의한다는 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현재 엘릭의 부탁에 따라 뒤로 빠져서 안트로모프를 살피고 있던 상황.

만약 일이 뜻하지 않은 방향대로 돌아간다면 개입할 생각이었지만,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 듯 보였다.

‘사실 크게 나설 생각도 없었지만.’

물론, 오거스틴은 세상사에 크게 관여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피해가 최소로 그치는 정도로만 손을 댈 생각이었다.

애당초 그는 엘릭과 다르게, 수인족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수인족을 야만인처럼 여기고 계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반적인 제국민의 상식선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호왕가와 메르빙거 간의 관계도 녹야나 네레스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니 끼어들 이유도 없었고.

-이 일도 저에 대한 시험의 연장선이실 테니, 굳이 귀찮게 나설 필요는 없으십니다. 다만, 제가 필요할 때 딱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물론, 스승님에게는 크게 어렵지 않을 일일 겁니다.

‘한 번이라. 이 스승에게도 되도록 빚을 지고 싶지 않아 하는 녀석이 할 부탁이란 게 대체 뭘까? 그게 더 궁금하단 말이지.’

오거스틴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수인족과 관련된 일인 것 같기는 한데… 이렇게 일이 잘 풀리는데도 불구하고 도와달라는 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퓨리의 수장이라는 혈미왕이라도 잡아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동장군을 눌러달라는 것도 있긴 한데. 흠!’

‘그런 거라면 아주 실망할 텐데 말이지.’

오거스틴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나선다면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리겠지만.

그래서야 시험이 별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나.

물론, 오거스틴은 엘릭이 언제나 자신에게 보람과 흥미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아마 그 ‘부탁’이란 것이 오히려 더 새로운 흥미를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일단은 조금만 더 지켜보도록 할까?’

오거스틴은 마력장을 천천히 뿌리면서 빠르게 돌아가는 전장들을 모두 예의주시했다.

저 멀리.

수천 명이나 되는 수인족들이 마치 해일처럼 안트로모프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 * *

선봉에 섰던 맹수단이 궤멸된 이후, 퓨리의 출정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트로모프로 내달렸다.

그들에게는 군율도, 전열도, 심지어 명령 체계도 없었다.

그저 도시를 함락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호왕가를 무너뜨려라!”

“도시를 함락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빼앗고 죽여라!”

“빼앗은 재산은 너희들의 것이 될 것이오, 개개인의 전공은 죽인 머릿수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놈들은 수인족의 수치일지니! 모두 이 땅에서 지워버려라!”

“혈미왕의 영광을 드날려라! 투사들이여!”

명령도 하나같이 안트로모프라는 도시를 이 세상에서 지우라는 것밖에는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호왕가와 그와 관련된 것들을 없애라는 뜻이었다. 그래야만 퓨리가 더 크게 빛날 수 있었으니.

그 때문에 저마다 다른 깃발을 들고 있던 퓨리의 군단들은 서로가 더 많은 공을 세우겠답시고 더 앞서 뛰고, 더 빨리 성곽을 넘으려 했으며, 그런 와중에 저들끼리 내분을 벌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도 출정군의 간부들은 여기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워낙에 안트로모프와 전력 차도 큰 데다가, 공세도 막강했으니까.

무엇보다.

“이제 슬슬 안에서 문을 열 때가 되었을 텐데?”

간부들은 때가 되면 즉각 봉기하여 호왕 등을 잡고, 직접 문을 열어주겠다던 안트로모프 관료들의 호응을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봉기가 실패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전력이 깎여나갈 테니, 이쪽에서도 잘만 이용한다면 함락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그러나.

“저기 성곽 위로 깃발이 걸리고 있습니다!”

“흠! 약속했던 것보다 많이 늦었군. 하여간 수인족의 수치 같은 것들은 느려빠져서 어쩔 수 없군. 그래. 백기인가?”

“아닙니다! 효수(梟首, 죄인의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뭐라?”

출정군의 수장, 바라센은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 재빨리 안력을 돋구어 성곽을 살폈다.

부관의 말대로 서른 개도 훨씬 넘는 머리가 줄줄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전부… 퓨리에 가담하기로 했던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노루스 재상이 서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비겁자들은 모두 처단되었다! 호왕의 투사들이여! 배반자인 퓨리에게 이 땅을 넘기지 말라!”

“…실패했군.”

처음 노루스 재상이 자신들에게로 귀의하겠다고 의사를 표시할 때까지만 해도 뭔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바라센은 그것이 결국 현실로 나타나자 절대 녀석의 기만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래봤자 조금 더 시간을 끌었을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함락시켜라. 몇을 희생시켜도 좋으니, 반드시!”

바라센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 * *

하지만 바라센의 명령은 그리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모두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휘몰아쳐라】!”

첫 번째 이유로, 엘릭을 꼽을 수 있었다.

그는 퓨리의 간부들에게 따로 ‘얼음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있었다.

전열 따윈 찾아볼 수 없는 퓨리의 진영 곳곳에 기습적으로 나타나 군사들을 학살했고, 이를 막으려 들면 불어오는 바람에 묻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면서 다시 다른 곳에서 나타나 큰 피해를 입히고, 발각 되기 전에 자취를 감추는 등 철저한 유격전을 펼쳤던 것이다.

워낙에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까닭에 아무리 노력해 봐도 잡을 수가 없는 판국이니….

퓨리의 투사들은 언제부턴가 성곽을 넘으려 해도, 엘릭이 어떻게 뒤에서 나타나 뒤통수를 칠지 몰라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어야만 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릭은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근접전에도 탁월해서 ‘간부 사냥’에도 쉽게 성공한다는 점이었다.

퍼억!

“비… 겁한…!”

“전쟁에서 비겁한 게 어디 있어? 이기는 게 장땡이지. 안 그래?”

엘릭은 목에 얼음 화살이 박힌 채로 원통하다는 표정을 짓는 수인에게 비웃음을 한껏 던졌다.

그리고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이 바람에 묻혀 사라졌다.

“다, 단주님이 돌아가셨다!”

“젠장! 이게 대체 몇 번째야!”

“물러나지 마라! 어떻게든 앞으로 가 싸우란 말… 커헉!”

상관이 죽은 것을 보고 기세가 흐트러지려는 군사들을 어떻게든 다독이려던 부관이나 조장들도 줄줄이 죽어 나가는 판국이니, 도저히 통제가 이뤄지질 않았다.

『역시 사람 뒤통수를 치는 데에 있어서는 아주 도가 텄군.』

[뒤통수‘도’ 잘 친다고 말씀해주실래요?]

『…잊고 있었군. 너에게는 이런 말들이 오히려 칭찬이라는걸.』

[당연하죠.]

『그보다 대체 그런 건 언제 배운 거냐?』

메피스토는 엘릭의 손등 위에서 흉흉하게 빛나는 흉포의 인장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활약했던 건지, 흉포의 인장은 어느새 9성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냥 가르쳐 주던데요?]

『그냥… 가르쳐줘?』

[예. 인장 사용법이라고. 덕분에 저만 편하게 쓰고 있죠.]

흉포의 인장에 묻혀 있던 마왕 휼의 사념은 전쟁에서 활약하기 시작하던 엘릭에게 자신이 지닌 기예를 하나 가르쳐줬다.

그림자 걸음.

녀석이 아직 마왕이 되기 훨씬 이전, 비루한 아귀로 지낸 시절에 여러 천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기예라던가?

그림자를 따라 걷고 달릴 수 있어 기척을 죽이는 데에 이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마투술에 접목시켜도 별 이상이 없어서 같이 잘 사용하고 있어요.]

『허!』

[어디 사는 M 모씨도 이런 거 가르쳐주면 참 좋을 텐데.]

『본 왕은 비루한 시절 따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그깟 저급한 잡기 따위는 만들 이유도 없었느니라!』

[눼이눼이. 어련하시겠습니까? 하여간 저렇게 뭐든지 날로 먹어댔으니 M자 탈모나 오지.]

『뭐 인마?』

근본도 없는 놀림에 메피스토는 발끈하고 말았지만, 엘릭은 다시 그림자 걸음을 밟으면서 다음 사냥감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동장군의 모래폭풍은 차가운 바람을 담고 있어 오히려 그에게는 더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엘릭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가운데.

헤이즈와 션, 카를을 포함해 푸른 매의 눈부신 활약까지 더해지면서, 퓨리가 성곽을 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였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벨렌체 왕과 노루스 재상의 지휘 아래 안트로모프의 시민들이 모두 일치단결하여 적들을 밀어내고 있단 점이었다.

결국 사흘 밤낮으로 쉬지 않고 전투가 이어진 내내 퓨리는 성곽의 끝에도 다다르지 못했으니.

“…퇴각한다.”

이대로는 오히려 승산이 전혀 없겠다고 판단한 바라센은 모든 병력을 뒤로 물려야만 했다.

“하지만 총관님! 이대로 아무 성과도 없이 물러나서는 혈미왕께서 분노하실 겁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잠시 물러났다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돌아오는 것이 좋다. ‘꼬리의 가호’도 한계가 보이고…. 이대로 있다가 동장군에 아군이 휘말리기라도 했다간 정말 끝장이다.”

“그래도…!”

“왕의 진노는 내가 감당하겠다.”

“알겠… 습니다.”

철수는 침공 때와 다르게 아주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안트로모프에서도 뒤쫓을 힘 따윈 남아있지 않았기에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퓨리의 모든 공세가 그친 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왕께서 승리하셨다!”

안트로모프의 시민들은 모두 손을 맞잡으면서 승리를 만끽했다.

* * *

“고생하시었습니다, 왕이시여.”

노루스 재상은 주름진 손으로 어린 호왕의 작은 손을 맞잡으면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지난 호왕이 죽은 이래. 그토록 염원했던 간자들에 대한 청소와 퓨리의 위협을 배제하는데 성공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퓨리의 공세는 이 뒤로도 몇 번씩 이어질 게 분명했지만.

이미 저들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앞으로 시민들을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터였다.

무엇보다.

노루스 재상은 이번 승전을 바탕으로 퓨리의 지배권을 물리칠 만한 방안을 오래전부터 계획해둔 상태였다.

문제가 있다면.

두근!

두근!

시시각각 그의 목을 옥죄어 오는 죽음의 그림자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분이라면…!’

노루스 재상은 자신이 더 이상 없더라도, 벨렌체 왕은 알아서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미안해요, 재상. 잠깐이지만 재상을 믿지 못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벨렌체 왕의 눈가에도 똑같이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노루스 재상은 평상시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이시여. 무릇 군주란 부끄러움을 몰라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워 마십시오. 그리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왕께서는 누구보다 현명한 자질을 갖고 계시니 앞으로도 계속 더 나은 성군이 되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번에 확실하게 알았어요. 저에게는 재상이 필요해요. 부디 오래오래 살아서 곁에서 저를 도와주세요.”

노루스 재상은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라고 해서 어찌 벨렌체 왕의 옆을 지키고 싶지 않을까.

오히려 그의 말마따나 오래 살아서 안트로모프가 기지개를 펴고, 벨렌체 왕이 왕가의 지난 위엄을 되찾는 것까지 똑똑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자신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음을 왕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던 그때.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뭐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엘릭이 슬그머니 두 군신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미 엘릭과 일행은 안트로모프에서 지난 전투 중에 보인 활약상으로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의견을 내놓는다고 해도 제재할 사람은 없었다.

또한, 노루스 재상도 그에게 얼마나 무리한 부탁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 속 깊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무엇이오, 찬성공작? 무엇이든지 말씀해보시오.”

“재상께서는 지금 오래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셔서 왕께서 말씀하신 바에 대해서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시는 게 아닙니까?”

“…!”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재상, 정말인가요? 찬성공작! 제대로 설명을 해주세요!”

노루스 재상은 자신의 비밀이 들켰다는 사실에 잔뜩 굳었고, 벨렌체 왕은 사색이 되어 엘릭을 다그쳤다.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난번에 메피스토에게 들었던 설명을 말해주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족이 노루스 재상의 심장에 똬리를 틀었고, 그로 인해 동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수명이 아주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다는 것.

설명이 이어질수록 노루스 재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벨렌체 왕의 커다란 두 눈동자에는 습기가 다시 차올랐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야기를 듣던 남은 관료들이며 시민들까지 모두가 걱정에 잠겨야만 했다.

“….”

노루스 재상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직 승리를 만끽하고 있어야 할 시민들에게 이런 소식은 말해주고 싶지 않았건만.

이렇게 찬물을 끼얹고 만 엘릭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말에 그는 다시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치료해드릴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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