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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82화 (82/405)

82화

타버린 설원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리나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대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왕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던 인간들이 퓨리에 맞서서 싸워주고 있다니.

특히 그동안 자신을 놀려먹기만 하던 금발의 사내는 가장 많은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 부탁한다.

특히 자신에게 벨렌체 왕을 툭 던지듯 맡겨놓으며 내뱉었던 말은 아직도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다 벨렌체 왕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 묻겠어요.”

“하문하십시오.”

이리나는 혼란스럽던 머릿속을 다잡으면서 허겁지겁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벨렌체 왕은 더 이상 어리지만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친위대장은 어느 곳의 편을 들 건가요? 만약 친위대장이 퓨리 쪽에 선다고 한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왕의 옆을 지키는 친위대장입니다.”

이리나의 눈이 절박함으로 물들었다.

“저의 충성을 의심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그래도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니니까요.”

벨렌체 왕은 한순간 푸근한 미소를 짓다가, 이리나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부탁드려요. 저를… 도와주세요, 이리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왕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리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왕을 지키고 말겠다는 결심이 눈가에 단단히 맺혀 있었다.

* * *

이대로는 정말 위험하다.

안트로모프 보다 훨씬 야생에 가깝다는 퓨리의 소속이라서 그런 걸까?

마운트는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을 몇 번이나 받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인간들이 파놓은 함정 따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별다른 위험 없이 장벽 아래 안전하게 사는 인간이 아닌가.

그딴 하등 종족 따위가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금발의 인간이 수인족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강체술을 직접 전개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이제 청사자와 직접 맞부딪치고 있는 지금, 본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훨씬 시끄럽게 경종을 울려대는 중이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도망쳐야 한다고!

이대로 있다간 정말 부대가 전멸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콰아앙!

“…컥!”

하지만 마운트에게 그럴 여유 따윈 없었다.

그의 상식에서 퇴각은 생각도 할 수 없거니와, 다른 작전을 떠올리려고 해도 눈앞에 있는 사내가 도저히 빈틈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왜 그러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지 않았소? 퓨리에서 손꼽히는 용사라고 들었는데, 설마 이것으로 끝이라 할 건 아닌 듯하오만?”

헤르만은 피투성이가 된 마운트를 보면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수록 마운트의 얼굴은 더더욱 인상이 일그러져야만 했다.

‘강… 하다!’

마운트는 이제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전신이 상처로 도배되다시피 한 반면에, 헤르만은 이렇다 할 부상을 입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그는 지쳐서 목구멍에서 단내를 내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헤르만은 지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즐거운 듯 보이기도 했고.

뭐랄까?

마치 편안한 자신의 집에 돌아오기라도 한 느낌?

안전만 추구한다는 인간 따위가 어떻게 전장에서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마운트는 이제 넘볼 수 없는 천적처럼 다가오는 헤르만에게서 원초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인간은… 설마 인간이 다 이런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마운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분명히 인간들 중에는 청사자에 비견될 만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자들이 더러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아마 그건 청사자가 실력을 숨기고 있어서 잘 모르는 것일 거라고.

아마 청사자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인간일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하튼 당신에게는 미안하기 그지없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본인이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동작이 많이 둔하지 않았소? 몸이 아직 삐거덕대는 곳이 많아 그러니 엉성해도 이해해주시오.”

“…날 기만하려는 건가? 그딴 말을 믿으라고?”

“정말이라오. 그리고 굳이 지금 내가 그대에게 격장지계를 벌여서 무엇하겠소?”

헤르만은 피가 흐르는 검을 가볍게 바닥에다 털면서 웃었다.

“이미 내가 이기고 있는 것을.”

으드득!

마운트는 그 말을 듣고 이를 갈았다.

문제는 자신이 반박할 말이 없다는 점이었다.

“여하튼 싸움이 길어져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으니 빨리 끝냅시다. 이번엔 내가 가겠소.”

파앗!

마운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면서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헤르만에게 돌도끼를 크게 내리쳤다.

하지만 헤르만이 도중에 방향을 꺾자 돌도끼는 애꿎은 지면만 때렸고.

촤아악!

헤르만은 마운트에게 난 빈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연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검이 번쩍일 때마다 그를 상징하는 푸른 오러가 몇 번이나 벼락처럼 내리꽂혔으니!

그것은 마치 거대한 사자가 먹잇감을 향해 발톱을 휘두르는 것 같이 너무나 매서웠다.

마운트의 돌도끼가 부서졌다. 왼팔도 깊숙하게 잘려 허공으로 튀었다.

쿠어어!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마운트가 볼 수 있는 건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비루한 몸뚱이와 속절없이 무너지는 자신의 군단뿐.

‘인간들 때문에…! 이 이상한 인간들 때문에!’

40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퓨리의 수치사라고도 불린다는 사건. 안트로모프의 공략을 바로 눈앞에서 말머리를 돌려야만 했던 사건.

그때도 금발과 녹안을 지닌 인간 때문에 좌절해야만 했다던가…?

‘이번에는 절대 그럴 수 없다! 혈미왕의 위대한 뜻을 또 꺾이게 할 수는 없어!’

그래서 마운트는 생각을 바꿨다.

가질 수 없다면 그냥 자폭해버리기로.

마운트는 돌도끼의 자루 밑에 밀봉해뒀던 구슬을 꺼내 바닥에다 떨어뜨렸다.

쐐애액-

헤르만은 그것이 폭약인가 싶어 서투른 짓을 하기 전에 제거할 요량으로 검의 투로를 도중에 꺾었다.

퍽!

검이 마운트의 턱밑을 통과해 그대로 두개골을 뚫고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켈, 켈켈…! 퓨리는 무너지지 않…!”

마운트는 그 말을 끝으로 대가리를 옆으로 꺾었다.

하지만 구슬들은 그새 저들끼리 부딪치면서 불꽃을 튀기더니, 곧 허공에다 아주 높게 폭죽을 쏘아댔다.

하늘을 따라 붉은 안개가 삽시간에 퍼졌다.

“뭐지?”

헤르만은 저것이 신호용 폭죽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대응하기 쉬울 텐데. 퇴각 신호라면 차라리 편할 테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 단장님께서 돌아가셨다…!”

“명령을 내리셨다!”

“죽음을 불사하자! 퓨리를 위해!”

“혈미왕을 위하여!”

“혈미왕을 위하여!”

맹수단은 일제히 포효를 지르면서 안트로모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엘릭 일행이 등 뒤를 노려도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투.

전술이나 전략 따윈 없이 전부 그쪽으로 달렸다.

“푸하핫! 어떠냐, 인간들아! 방금 전에 총공세 명령이 떨어졌다! 선발대인 우리뿐만 아니라 곧 뒤따라올 본진도 안트로모프만 노릴 것이니! 너희들의 도시는 곧 짓밟히고 잿더미가 될… 커헉!”

사체 더미에 뒤섞여 있던 효고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곧 뒤통수에 작렬한 얼음 화살 때문에 침묵해야만 했다.

“하여간 엑스트라는 이래서 안 돼요. 쓸데없이 말만 많아서는.”

엘릭은 어쩌라는 태도로 죽은 효고의 사체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안트로모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위험해진 도시 떄문에 벨렌체 왕이 전전긍긍하는 것이 보였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러다 엘릭의 전음을 받고 조금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부디 저쪽에서 잘해야 할 텐데.’

밖에서 할 만큼은 이미 충분히 다 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안에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엘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퓨, 퓨, 퓨리가 쳐들어왔습니다!”

“뭐?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동장군이 한창 몰아치는데, 어떻게 퓨리 놈들이 여기에 온다는 것이야?”

“저, 저희도 그걸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경계병의 보고가 그러합니다. 당장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퓨리의 군단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은 안트로모프를 혼란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가뜩이나 강체술의 비급 때문에 시끄럽던 차였건만.

외환까지 닥치니 그나마 남아있던 보루까지 흔들리고 만 것이다.

“하, 항복합시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지금 미치기라도 했소?”

“그럼 어떡합니까! 왕도 없어지고 동장군 때문에 병력도 군량미도 충분하지 않은 마당에! 이대로 퓨리에 노출되면 죽소!”

“나는 재무대신에 찬성하오!”

“나도!”

“나도…! 난 이렇게 죽고 싶지 않소!”

“이런 미친 작자들을 보았나! 왕가의 비술을 독차지하려 했던 것만 해도 죽을 죄인데, 저딴 망발을 지껄여?”

대신과 관료들은 저마다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부르거나, 수화를 하면서 싸울 준비를 하는 등 막장에 다다랐고.

상황이 이렇게 되니 시민들도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것들을 대신이라고!”

“뒤집어버리자! 저런 놈들에게 정치를 맡길 수 없다! 도시를 맡길 수 없다고!”

“왕! 왕을 모셔오자!”

퓨리를 상대하기도 전에 당장 내전이 벌어지기라도 할 것 같던 그 순간.

여태 눈을 감고 있던 노루스 재상이 눈을 떴다.

“영위대(影衛隊). 무엇들 하는가? 반역자들을 당장 잡아들이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깊은 울림이 있어 주변에 있는 이들 중 그걸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재, 재상! 무슨 말을… 허, 헉!”

“허억! 이, 이런!”

항복을 주장하던 관료와 대신들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갑자기 턱 밑에 드리운 칼날을 보고 헛바람을 들이켜야만 했다.

그들이 그동안 충복이라고 생각했던 이들.

상황이 너무나 빠르게 진전된 까닭에 다른 가병들이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었다.

아니면 그러기 전에 그들의 머리가 줄줄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떨어졌거나.

“항복 의사를 표명하였거나, 강체술 비급을 거래했던 31인의 인사 및 그 휘하 일당들을 모두 제압하였습니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노루스 재상 앞에 부복하면서 보고를 올렸다.

노루스 재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포된 대신과 관료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재상!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우리는 동지였지 않소!”

“영위대라니! 이건 대체…!”

영위대는 과거 호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수인 연합 곳곳에 숨어 비밀리에 반역자들을 토벌했다던 비밀 조직.

하지만 수인 연합이 해체되고, 왕가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저절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직도 활동하고 있었다고?

하물며 그것이 그동안 자신들이 아군이라 믿었던 노루스 재상이었다는 게 그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작은 도시에서 이 많은 인원들을 비밀리에 뽑고, 훈련시키며, 도시 곳곳에 배치하기까지….

대체 그동안 얼마나 비밀리에 움직여왔던 거지?

“왕가는 기울어질지언정 그분들의 유산은 곳곳에 남아있소. 여태 왕가를 지탱했던 것은 당신네들이 가지려고 했던 그딴 잡기 따위가 아니란 거지.”

“…!”

“…!”

“…!”

“그런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헛된 꿈을 꾸었던 것이니, 혈미왕의 영호족도 머지않아 다시 고꾸라지고 말 거요.”

노루스 재상은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대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만! 재상! 내 말을 들어보시오! 나는 억울하오! 억울하…!”

“항복하겠습니다! 그러니 살려만 주십시오! 재상? 재상!”

영위대의 손속에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즉결 처분에 따라 많은 머리통이 죄다 바닥을 뒹굴어야만 했으니. 바닥은 금세 시뻘건 핏물로 차올랐다.

좌중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시민들도 놀란 얼굴로 입을 쩍 벌리면서 노루스 재상을 보는 가운데.

그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지만, 두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난 채로 우뚝 서 있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겠소. 싸웁시다. 우리의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그 말이면 충분했다.

시민들이 항전을 위한 준비를 하기까지는.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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