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타버린 설원
“【휘몰아쳐라】.”
전장을 따라 돌개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치다가.
“【쏟아져라】.”
곧 우박과 얼음 화살이 잇달아 쏟아졌다.
눈보라.
엘릭이 자신의 시그니처 스킬로 만든 마법이 전개된 순간, 앞서 빙판 때문에 크게 미끄러졌던 수인족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아아악!”
“내 팔이 떨어졌어! 내 팔이 떨어졌다고오!”
“대, 대체 누가 이딴 짓… 커컥!”
“정신 차려! 전열을 갖추라고!”
수인족들은 어떻게든 냉정을 찾고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지만.
계속 쏟아지는 우박과 고드름 하며 부서지는 얼음 알갱이 때문에 분산되는 시야, 그리고 우왕좌왕하는 다른 동료들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기다 동장군의 모래폭풍까지 시야를 거의 차단해버리니.
그들이 아무리 ‘꼬리의 가호’를 받아 모래폭풍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해도, 이런 식이면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런 게 왜…!”
“날씨가 왜 이런 거지? 하늘께서 우리를 버리기라도 하셨나?”
“맞아! 하늘이 노하신 게 틀림없어! 그런 게 아니라면 이런 우박이 쏟아질 리가 없잖아!”
“어, 어떡하면 좋지?”
수인족들 사이로 어수선한 기운이 퍼져나가던 그때.
부장 효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정신 차려! 이건 마법이다! 안트로모프에 있다는 인간 놈들이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 똑바로 일어서라고!”
마법.
인간들이 부린다는 괴상한 기적.
수인족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분노를 부르기도 했다.
마법이 없었더라면 선조들이 흑의 설원으로 쫓겨날 일이 없었을 거라는 게 그들의 믿음이었으니까.
“이, 인간?”
“맞아! 안트로모프에 인간이 있었어!”
“비열한 놈들! 우리 종족을 이런 꼴로 만든 하등 종족과 손을 잡은 더러운 배반자들!”
다행히 선동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 안트로모프를 혈미왕 님의 손에 넣어드리고, 수인족의 위대함을 보여주…!”
효고는 어수선하던 전열이 다시 갖춰지려는 것을 느끼고 계속 수하들을 독려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고함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한순간, 시야를 확 가려오던 모래폭풍 사이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까아아앙!
효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면서 커다란 날개로 상체를 가렸다.
다행히 그는 출진을 시작했을 때부터 수화를 진행해두고 있던 상황.
그의 종족, 귀오족은 까마귀 인간 중에서도 ‘강철 깃털’을 가지고 있다고 불릴 정도로 단단한 내구도의 날개를 자랑했다.
그래서 웬만한 공격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아 방어용으로 사용하기에 딱 안성맞춤이었고.
이번에도 그의 기대대로 기습은 손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충격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두꺼운 맷집을 가지고 있는 그도 두어 발자국 물러나야 할 정도였으니.
“그냥 새대가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
모래바람 사이로, 금발과 녹안을 가진 인간이 히죽 웃으면서 나타나는 게 보였다.
그 순간, 효고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인간이 바로 이딴 혼란을 일으킨 주범이란 것을!
다만, 효고는 한순간 분노에 눈이 먼 나머지 어떻게 마법사가 모습을 직접 드러내어 근접전을 시도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죽여주마!”
“엑스트라 새끼들은 항상 그런 말을 하더라. 좀 참신한 다른 말은 없나?”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효고는 상체를 두르고 있던 날개를 크게 옆으로 젖혔다.
퓨퓨퓨퓻!
그러자 아주 빳빳해진 깃털이 비수처럼 대거 쏟아졌고.
엘릭은 광역 마법을 위해 사방으로 흩뜨렸던 마력장을 재빨리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눈보라의 범위를 축소시켰다.
따다다당!
결국 눈보라는 엘릭의 주변을 맴돌면서 비수들을 모조리 튕겨내는 것과 동시에.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다시 범위를 폭발적으로 팽창시키면서 효고를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헉!”
효고는 본능적으로 눈보라에 갇혀서는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양 날개를 도로 접으려 했지만, 그보다 눈보라의 팽창이 훨씬 빨랐다.
더군다나 그사이 발밑에 깔린 빙판에서는 어느새 얼음으로 이뤄진 사슬이 그의 손발을 묶고 있었으니!
‘냉혹의 사슬’.
눈보라와 함께 엘릭이 이번에 자신만의 마법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탄생시킨 마법이었다.
카야를 상대할 때에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얼음 사슬’과 ‘얼어붙은 손길’을 합치면서 사슬의 내구도도 한 층 더 올림으로써 상대를 속박하는 데에 주력을 기울였다.
거기다 사슬이 묶인 자리에는 빙독까지 스며들면서 결빙 현상까지 나타나니.
효고는 그것을 떨쳐내고 싶어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좀처럼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별다른 방어도 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눈보라에 얻어맞아야만 했다.
퍼퍼퍼펑!
콰콰콰쾅-
“컥, 컥! 크아악!”
효고의 몸뚱이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 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들썩였다.
순식간에 전신이 상처로 도배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검은 깃털이 한순간에 피범벅이 되고 말았다.
카야를 상대할 때와 똑같은 순서로 이뤄진 공격 방식이었지만.
그때보다 훨씬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변해 있었다.
쉭!
효고가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엘릭은 눈보라를 헤집으면서 순식간에 녀석의 앞까지 도착했다.
끝장을 내겠다는 생각으로, 손바닥을 활짝 펼치면서 복부를 그대로 휘갈겼다.
그 순간, 엘릭의 오른손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시퍼렇다 못해 아예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소수(素手).
이번에 엘릭이 만든 3개의 마법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고, 앞으로 조금씩 창안해 나갈 마법 체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냉혹의 인장에서 흘러나온 냉기의 정수를 담아내고, 이 위에다 흉포의 인장이 자랑하는 흉포한 기질을 뒤섞었다.
덕분에 엘릭이 벌이는 모든 냉기 관련 마법은 소수에서 비롯되게 되었으니.
마력장을 보다 더 섬세하고, 직접 다루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격 마법으로써의 효과도 확실했으니.
소수가 직접 닿는 자리는 빙독이 강제로 이식되어 결빙 현상이 벌어졌고, 또 그것이 바로 삽시간에 부서져 내리면서 공격 대상을 무력화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다.
얼마나 위력적이고 악독하던지, 오죽하면 오거스틴이 그걸 보면서 딱 한 마디를 던졌을까!
-까딱했다간 전장에서 깨나 공적 취급을 받겠구나. 악랄해도 너무 악랄해. 닿는 모든 걸 얼리고 부순다니. 거기다 상처 부위가 떨어지고 나서도 빙독이 계속 안쪽으로 침투해서 몸을 망가뜨리지 않느냐? 깔끔하고 세련된 것만 찾는 귀족 샌님들이 벌벌 떨겠어, 아주.
그 말을 듣고 나서, 엘릭이 뭐랬더라?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마음에 안 드십니까?
-응? 푸핫! 그럴 리가! 이 늙은이는 마음에 들지! 아주 마음에 들고말고! 대체 어느 전장에 명예가 있고 깔끔함이 있을까?
-더 집요해져라! 더 포악해져라! 그리고 더 악랄해져라!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은 적을 죽일 수 있는지 연구해라! 그것이 앞으로 닥칠 전쟁에서 네가 살아남을 방법이고, 녹야가 빛날 방법일지니!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소수는 엘릭이 직접 근접전을 벌일 때 그 위력이 가장 빛을 발했다.
강체술.
맹호출현.
쐐애액-
강체술과 함께 소수가 효고의 복부에 작렬하려는 순간.
“이놈! 너구나! 이딴 괴악한 일을 벌인 것이!”
갑자기 아귀감이 울렸다.
뒤에 다른 강적이 나타났노라고!
엘릭은 공격의 투로를 옆으로 확 틀었다.
때마침 엘릭의 얼굴을 휘갈기려던 돌도끼와 소수가 충돌했다.
콰아앙!
돌도끼의 주인, 마운트는 서너 발자국 이상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리고.
쩌거거걱-
퍼어엉!
평상시 그가 아끼던 애병이 삽시간에 얼음으로 뒤덮인다 싶더니, 도끼날 부분에 균열이 가면서 터져버렸다.
만약 여기에 직접 손발이 맞닿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마운트는 기습을 가했으면서도 한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간담을 더 찌릿하게 만드는 사실은 따로 있었으니.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 강체술을 익히고 있는 거지?”
마치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이 모조리 붕괴라도 된 듯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
아무래도 수인족 내에서도 몇 안 된다는 강체술의 숭배자인 모양이었다.
호왕의 위대한 힘을 숭상하며, 그들의 업적이 남아있는 강체술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신기(神機)라고 여긴다는 자들.
그리고 퓨리 내에 있는 숭배자들은 강체술이 당연히 그들의 지도자에게 가야 한다고 믿는다 했던가.
‘이놈은 좀 위험하겠는데.’
귀찮은 놈이 나타났네. 엘릭은 그런 생각에 속으로 혀를 찼다.
가뜩이나 숭배자인 것만 해도 귀찮을 게 뻔한데, 몸길이가 3미터 가까이 되어 보이는 그리즐리 베어라니. 거기다 커다란 돌도끼까지 들고 있으니 아주 위압적이었다.
타고난 힘도, 순발력도 대단한 것 같았다.
무도가를 기준으로 친다면 4체인… 즉, 마스터 급의 실력을 지녔을 게 분명한 자.
정확하게는 초입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엘릭에게는 버거운 상대인 게 분명했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뭐, 기회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엘릭은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효고 쪽을 슬쩍 돌아봤다가, 마력장을 다시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눈보라로 상대의 시야를 가려 표홀히 사라지려는 것이다.
“어딜 가려 하느냐-!”
마운트는 한순간 엘릭이 뭘 하려는지 깨닫고 와락 달려들었다.
쿵!
얼마나 저돌적으로 공격해오는지 엘릭이 아주 잠깐 주춤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미 다른 ‘곰’이 저 무식해 보이는 곰을 막아서고 있었으니까.
쾅!
헤르만 바일이 어느새 나타나 녀석의 돌도끼를 튕겨내고 있던 것이다.
마운트는 새로운 인간이 난입했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조차 경지를 가늠하기 힘든 상대가 나타났단 사실에 바짝 긴장하면서 으르렁거렸다.
“인간, 넌 누구냐?”
“본인의 이름은 헤르만 바일. 그대들이 말하는 제국에서는 청사자라 불리오.”
“사자구나!”
퓨리의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나 안트로모프가 아닌 장벽 아래였고, 당연히 그곳에 존재한다는 여러 절대자들에 관련한 정보도 상당히 많이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수인족에게 가장 위협이 될만한 대상은 ‘사자’라 불린다는 무도가 집단이었으니.
청사자는 그중 한 명이었다.
인간답지 않게 가장 정의롭다던 인간.
“곰이 사자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마!”
하지만 마운트는 그딴 사실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오히려 장벽에 내려가기 전에 인간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볼 수 있을 거란 사실이 기뻤고, 빨리 녀석을 처치하고 강체술을 익힌 마법사를 잡아야겠다는 사실밖에 머릿속에 담고 있지 않았다.
콰아아앙!
결국 헤르만과 마운트의 충돌을 시작으로.
“큰형님을 따라라!”
“뭐라는 거야! 우리 조카사위님부터 구하러 가야지!”
“아, 그런가?”
“큰형님은 알아서 잘 하실 테니까 어서 저쪽으로 가자!”
푸른 매도 일제히 전장에 난입했다.
위험할지 모르는데도, 그들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아주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션과 카를, 헤이즈도 본격적으로 난입하면서 공세를 퍼부어댔으니.
가뜩이나 엘릭 때문에 혼란스럽던 전장은 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맹수단에게서 전열을 정비할 여유 따윈 전혀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