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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80화 (80/405)

80화

타버린 설원

처음 노루스 재상이 도와달란 말을 했을 때.

엘릭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도 장기적으로 수인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픈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간에 신뢰가 쌓인 뒤에나 천천히 진행할 수 있을 일.

당장 엘릭조차도 노루스 재상이나 벨렌체 왕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수인족이 조금 순진한 면모가 있다지만, 그래도 한때 제국의 북방을 위협했던 세력이니만큼 조심할 필요는 있었으니까.

그래서 당장은 강체술을 거래하면서 안면을 트고, 조금씩 그들에 대해 알아갈 생각이었다.

자신보다 더 폐쇄적인 성향을 가졌을 수인족은 더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데 다짜고짜 왕의 안전을 거래하자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했듯 내가 그동안 모은 재산은 상당하오. 그걸 모두 드릴 터이니 강체술을 사겠소. 또한, 강체술의 오의(奧義)도 넘겨드리겠소.

노루스 재상과 엘릭은 남들이 들을 수 없게 전음으로 빠르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오의가 남아있습니까?

-그렇소. 정확하게는 오의‘만’ 남아있지. 전반부와 후반부를 모두 잃어버려서 별 쓸모도 없는 것이지만.

-…!

-어떻소. 이만하면 그대에게도 괜찮은 거래가 될 텐데?

-대체 저의 뭘 믿고 이런 걸 맡기시는 겁니까? 저는 당신들이 증오하는 인간입니다만. 돕겠다고 말하고 입 싹 닦으면 어쩌시려구요?

그 순간, 노루스 재상이 피식 웃었다.

그동안 보였던 딱딱한 모습과 전혀 다른 푸근한 모습.

-그거 아오?

-…?

-그대는 그대의 조부와 아주 똑같이 생겼다는 것?

-…!

-백금에 가까운 금색 머리하며 녹옥 같은 눈까지…. 우리네는 그대가 가진 눈을 보고 보석안(寶石眼)이라고 부른다오. 보석처럼 맑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이란 뜻이지. 보통 그런 눈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세상을 반짝이게 만드오. 그런 것만 눈에 담고 있기 때문이지.

엘릭은 한순간 깊게 숨을 삼킨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존경하는 조부님의 자취를 만나게 된 셈이니까.

-그대의 조부가 그러하였소. 아주 아름답게 반짝이는 보석안을 지니고 있었지. 당신이 목에 매단 것과 같은 목걸이를 하고서, 우리네 도시를 찾아왔었다오.

-….

-그리고 아무 조건도 없이, 아무 친분도 없이 우리를 도와주었소. 단절된 줄로만 알았던 호왕의 가계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전부 그대의 조부 덕택이었지.

-…!

-당시 젊었던 나는 물었소. 우리를 왜 도와준 것이냐고. 당신네들 인간은 아주 증오스러운 존재일진대, 왜 우리를 돕는 것이냐고. 그랬더니 뭐라고 하였는지 아시오?

-뭐라고… 하셨습니까?

-‘친구라서’.

-친… 구?

-그렇소. 친구. 그렇게 말하더군. 해서 물었소. 우리가 왜 당신의 친구냐고. 그랬더니 그러더군. 지금은 기억하는 이가 드물어도, 원래 메르빙거와 수인족은 친구였다고.

-…아.

-알고 있는 눈치로군?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소. 벌써 3백년도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지. 그런데 친구라 도와주러 왔다고 하니 놀라울 수밖에. 그러면서 이 말까지 덧붙이더이다.

노루스 재상은 한순간 당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별무리가 쏟아질 것처럼 아름답던 밤하늘 아래.

퓨리의 거듭된 공세 앞에서 다 쓰러져가던 안트로모프를 구해내고, 친구이니 돕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고 말하던 우스던 메르빙거의 모습이 바로 눈앞의 엘릭 위로 겹쳐지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고. 너무 늦게 찾아와서.

그때, 노루스 재상은 생각했다.

우스던 메르빙거가 ‘별’을 닮은 것 같다고.

너무나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훗날에 그가 ‘별의 마도사’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아무 대가도 없이 훌쩍 떠났던 게 당신의 조부님이요. 나에게는 한평생 우상으로 남았던 순간이었지. 그런 은인과 똑같이 생긴 그대가 누군지 내가 어찌 모를까?

-…그렇습니까?

-메르빙거에 닥친 환난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소. 원래대로라면 도우러 갔어야 하지만, 내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지. 우리네 사정도 여전히 좋지 않기도 했고. 그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못처럼 박혔소.

-….

-그런데 이렇게 또 도움을 달라고 하는 것, 염치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부디 도와주시오. 의지할 데라고는 그대밖에 없소.

-메르빙거의 후손이여.

엘릭의 말이 끝났을 때.

“허!”

“확실히 우스던, 그가 난 놈이긴 했었지. 그런데 이런 곳까지 왔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걸.”

“역시 별의 마도사…! 엘릭 님은 확실히 조부님의 피를 이으신 거로군요.”

일행 모두가 감탄을 터뜨렸다. 특히 이사벨은 더욱더 동경에 찬 눈으로 엘릭을 바라봤다.

헤이즈도 이런 곳에서 조부님의 흔적을 발견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다만, 션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엘릭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너희 조부님은 그토록 위대한 영웅이신데, 너는 왜…?”

“내가 뭘?”

“아냐. 됐다.”

엘릭은 한숨을 내쉬는 션은 무시하고, 마저 설명을 이어나갔다.

“재상은 자신이 도시 안에서 혼란을 부추길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왕의 안전을 부탁했구요.”

대신과 관료 중 상당수는 퓨리와 맞닿아있다. 아마 지금쯤이면 퓨리 측에서도 강체술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테니, 군단을 움직일 것이다.

그것이 노루스 재상의 예측이었다.

“혼란이 극심해지면 극심해질수록 피아를 구별하는 것도 훨씬 쉬워질 것이라는 게 재상의 의견이기도 했습니다.”

일행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수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이때. 그들을 솎아내려면 확실히 충격 요법만한 것이 없었다.

“그 뒤에는 일망타진할 생각이로군?”

“예. 그런 듯합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솎아내고 있는 중이겠죠. 퓨리가 온 걸 알면 더 뒤집힐 테구요.”

오거스틴이 알겠다는 듯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다시 벨렌체 왕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과거 수인족과 메르빙거 간에 맺었던 우방 조약(友邦條約). 세월이 지나면서 사문화되고 말았던 그 조약을 다시 살리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벨렌체 왕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떨리는 동공 속에는 여러 감정이 뒤엉키고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는 힘도 부족하고, 더 이상 드릴 것도 없는데 어떻게 더 도와달라고 할… 아악!”

따악!

벨렌체 왕은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다 말고, 한순간 눈앞에 별이 쏟아지자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딱밤이었다.

작은 손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왜 그러냐고 올려다보는데.

“친구 간에는 그런 거 재는 거 아닙니다. 그냥 딱 한 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

“도와달라고.”

“…!”

“도와달라는 한마디만 하시면, 어디든 달려가는 게 친굽니다.”

엘릭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벨렌체 왕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션에게 물었다.

“그렇지?”

“너랑 친구 되긴 싫은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션까지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벨렌체 왕은 떨리는 심장을 겨우 누를 수 있었다.

“저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친구가 뭐 별겁니까?”

엘릭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어느덧 비석 바깥을 향해 있었다.

“마음 맞고 같이 놀 수 있으면 친구지.”

어느새.

동장군의 모래폭풍과 함께 퓨리의 군단이 비석까지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 * *

쿵!

쿵!

‘퓨리’라고 적힌 깃발 아래, 퓨리의 투사들은 모래폭풍을 등에 진 채로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축이 크게 몇 번씩이나 요동쳤다.

“켈켈켈! 안트로모프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 속도에 박차를 가하라!”

일개 도시국가로 전락하고만 안트로모프와 다르게.

퓨리는 사실상 연합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웅족(魔雄族)이나 귀오족(鬼烏族)같이 싸움과 약탈에 미친 수인족 뿐만 아니라, 자질구레한 여러 도시국가까지 합쳐진 연합체.

흑의 설원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수인족 중 60%는 이미 그들의 손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과거 호왕 아래 결성되었던 수인 연합의 복원도 이제 계단 한 턱만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퓨리는 바로 그 한 턱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턱’의 이름은 바로 호왕가였다.

“단장님, 그런데 안트로모프에 강체술이 있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입니까?”

“왜? 한낱 인간이 강체술을 가져왔다는 게 믿기지 않느냐?”

“예. 아무래도 그런 하급 종족이 위대한 비술을 갖고 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아서…!”

퓨리가 자랑하는 ‘맹수단(猛獸團)’의 단장, 마운트는 부관 효고가 던진 질문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은 수인족의 노예로 부려져야 하는 열등 종족이다.

그것이 퓨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사상이었으니.

“켈켈! 물론, 그건 나 역시 너와 생각이 같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그게 설사 거짓이라 하여도 안트로모프에 적지 않은 혼란이 있는 건 사실인 것을. 이런 아주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느냐?”

“하긴. 그도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만약 진짜 강체술이 돌아온 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하늘의 뜻을 잃어버린 호왕가에 그것을 쥐여줄 수는 없는 일!”

단장 마운트의 두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이제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것은 우리들의 왕이신 혈미왕(血尾王)이실지니! 강체술을 빼앗아 그분께 진상하는 것이야말로, 그리하여 그분께서 흑의 설원에 다시 위대한 제국을 세우시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일 것이다!”

“혈미왕이시여!”

“혈미왕이시여!”

퓨리의 투사들은 하나같이 ‘혈미왕’이라는 이름을 주문처럼 되뇌면서 투기를 발산했다.

심지어 그 속에는 광기마저 상당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이 혈미왕에 대해 가지는 충성심은 아주 대단했다.

영호족의 서자로 태어나 원래 왕좌와 거리가 멀었지만, 오로지 자신의 카리스마만으로 왕권을 틀어쥔 영웅.

그리고 그는 퓨리를 단기간에 확장시켜 흑의 설원 중 상당수를 제 손에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대다수의 수인족이 무릎을 꿇었고, 본능만 남아있는 마물들까지 혈미왕과 퓨리를 피해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혈미왕은 정복욕의 마지막을 안트로모프로 장식하고자 했다.

거의 망가지다시피 한 호왕가의 도시를 먹어 치울 수 있다면, 이제 수인족 내 유일한 왕가는 호왕가가 아닌 영호족의 것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혈미왕의 확장세는 안트로모프에서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함락 직전의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어느 마법사 때문이었다.

그때의 패배로 혈미왕은 가지고 있던 8개의 꼬리 중 5개를 잃어버려야만 했고, 퓨리의 군단은 거의 괴멸되어 도망쳐야 했으니.

혈미왕이 당시에 입은 상처를 복구하는 데에만 걸린 시간이 장장 40년이었다.

한 세대가 교체되는 것보다도 훨씬 긴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런데도 혈미왕은 겨우 3개의 꼬리만 되찾은 상태.

퓨리도 전력을 원상 복구하지 못했으니, 원래대로라면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었지만.

혈미왕은 도중에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강체술! 강체술을 내게 가져오라! 그것만 있다면 나는 충분히 남은 2개를 복구할 뿐만 아니라, 그토록 바라던 마지막 9번째 꼬리까지 가질 수 있을지니! 나의 군단이여! 어서 안트로모프로 가라! 내게 영광을 가져오라!

그렇게 출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마운트를 비롯한 맹수단과 다른 군단의 투사들은 이번 임무가 나뭇가지를 꺾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여기고 있었다.

원래부터 안트로모프와 퓨리 간에는 절대 넘볼 수 없는 전력 차가 있었던바.

그동안 안트로모프를 가만히 내버려 뒀던 건, 어디까지나 지난 패전에 큰 충격을 받은 혈미왕의 의심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사라진 이상,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동장군도 이렇게 등에 업고 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을까!

“켈켈켈! 뭣들 하느냐! 짐승들이여! 어서 달려라! 호왕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겐 천금을 주시리란 혈미왕의 약속이 있으셨다!”

“가자!”

“달리자!”

두두두두-

쿵쿵쿵쿵!

저 멀리, 안트로모프의 영역이 보이기 시작하자, 맹수단은 일제히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탈것을 거칠게 몰던 기수(騎手)들이 앞으로 멀리 튀어 나가며 뒤에서 따라오는 보병들에게 비웃음을 던지던 순간.

“【얼어붙어라】-!”

어디선가 발동된 언령 마법과 함께.

쩌저저적!

기수들 앞으로 갑자기 엄청난 두께와 크기의 빙판이 깔리더니… 그대로 벌러덩 나자빠지고 말았다.

우당탕탕!

“이, 이게 무슨…?”

“아악! 내 팔! 내 파아알!”

“두, 뒤! 당장 머, 멈추… 컥!”

쿠에엑!

히히히힝!

끼에엑!

수백 마리에 달하는 탈것과 기수들이 볼썽사납게 빙판 위를 나뒹구는 모습은 경악스럽기 그지없었으니.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달려오던 후열의 기수들도 그들을 마구 짓밟거나, 똑같이 뒤엉키면서.

맹수단의 전열은 삽시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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