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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79화 (79/405)

79화

타버린 설원

“이대로 계속 두고만 보고 있을 거요?”

“친위대장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어서요!”

엘릭 일행이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간 직후.

안트로모프의 대신과 관료들은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이 되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남들이 본다면 왕의 안전을 걱정하는 영락없는 충신의 모습이었지만.

정작 본인들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젠장! 거기에 진짜 왕이 있었을 줄이야!’

‘인간 놈이 친위대장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기라도 한다면 나는 끝장이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아악!’

벨렌체 왕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별궁을 찾았던 대신과 관료들이 가졌던 생각이었다.

만약 벨렌체 왕이 모든 사실을 들었고, 돌아와서 이를 빌미로 칼을 휘두르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모두 끝장이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호왕은 호왕.

이따금 작고 어린 몸에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에 그들도 간담이 서늘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인질극 중에 벨렌체 왕이 ‘사고로’ 죽거나, 아니면.

‘완전히 사라지거나….’

둘은 언뜻 보기에는 같은 의미로 보일지 몰라도, 엄연히 달랐다.

전자는 정말 더 큰 혼란을 부를 것이었고, 후자는 그런 혼란 뒤에 자신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만한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이것만큼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이 밤만 무사히 넘어가자!’

‘내가… 새로운 호왕이 되는 거야!’

현재 그들의 품속에 공통으로 자리 잡은 얇은 책자가 그들 개개인에게 야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엘릭에게 아주 비싼 값을 치르고 샀던 책자.

그때.

그동안 조용히 대신과 관료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노루스 재상이 무심한 눈길로 그들을 쓱 훑어보더니 한 마디 툭 내던졌다.

“다들 이미 거래를 마친 거요?”

“…!”

“…!”

“…!”

“표정을 보아하니 맞군. 허! ‘강체술’을 갖게 된 수인이 이렇게 많아서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콰쾅!

강체술이 기술된 책자를 품고 있던 대신과 관료들이 널찍이 자리에서 떨어져서 재빨리 수화를 전개했다.

“젠장! 나만 거래한 게 아니었어?”

“빌어먹을 인간 자식! 역시 인간 따위를 믿는 게 아니었어!”

“이런 역적 놈들 같으니! 호왕가의 비전인 강체술을 탐내다니! 너희들이 그러고도 대 안트로모프의 신하라 할 수 있느냐!”

“닥쳐라! 너는 뭐가 다르냐! 어차피 강체술을 탐냈던 건 똑같으면서!”

“나를 네놈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나는 어디까지나 왕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손을 댄 것일 뿐!”

“미친 소리 하고 자빠졌네!”

살기와 투기가 쉴 새 없이 휘몰아치고, 고성과 비난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엘릭과 거래를 하지 않은 진짜 충신들은 재빨리 그들끼리 뭉쳐 역적들에 대항했으니.

회의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왕께서 지금 위험해지셨는데 한 뜻이 되어도 모자랄망정…!”

“그, 그게 아닌 것 같아! 뭔가 이상해!”

“저것들 설마 왕 몰래 반역 저지르려고 했던 거 아냐?”

밖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시민들은 금세 상황 판단을 마치고 싸늘한 얼굴이 되어 회의장을 에워쌌다.

안트로모프가 자중지란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

이 일의 시발탄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노루스 재상은 제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 * *

“…지금쯤 개판이 되었겠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곳에다 아주 기름을 붓다 못해 불까지 던졌어?”

“장작도 던졌지.”

“자랑이냐!”

션은 자신만만하게 웃어대는 엘릭을 보면서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야만 했다.

“대체 언제 철이 들래…?”

물론, 엘릭은 이번에도 친한 친구의 핀잔을 귓등으로 흘렸다.

대신 메피스토가 맞장구를 쳤다.

『평생 그럴 일 따윈 없을 것 같은데.』

[탭댄스?]

『철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의 사회가 강요하는 상식에 맞춰진다는 것이니, 신비와 이적을 쫓는다는 마법사에게는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닐 테지. 지금이 딱 좋다.』

엘릭은 갈수록 뻔뻔해지는 메피스토를 보면서 혀를 찼지만, 뭐라고 할 만한 대꾸가 없었다.

“괜찮… 을까요?”

그때, 업혀 있던 벨렌체 왕이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덧 흑의 설원과 도시를 구분 짓는 경계선인 비석이 보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들에게 나눠준 강체술은 앞부분만 그럴듯하지, 뒷부분은 전부 엉터리니까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벨렌체 왕은 힐끔힐끔 뒤쪽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쫓아오는 이리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어딘지 모르게 이전보다 더 어수선해진 것 같은 안트로모프의 정경도 살짝 비쳤다.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벨렌체 왕은 화들짝 놀라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릭이 엷은 미소를 띠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다고 말했던 건 저였고, 또 꽃의 신전으로 가는 길을 열어드려야…!”

“그런 조건들 말고. 그냥 지금 왕께서 가지고 계신 생각을 묻는 겁니다, 저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벨렌체 왕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그냥 등지고 떠나고 싶으십니까? 거기에 맞춰서 도와드리겠습니다.”

한순간, 벨렌체 왕의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 섞였다.

그는 엘릭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냥 떠나기만 하면 될 텐데 굳이 이런 건 왜 묻는 걸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주변이 온통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자신을 집어삼키려 드는 승냥이 떼로 가득한 왕궁.

그곳만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턱 하고 막힌다.

하지만 도시는?

‘시민들은… 달라.’

시민들은 항상 자신을 보며 웃어준다. 반갑게 맞아주면서 꽃을 건네주고, 시장하지 않냐며 아침에 딴 사과를 건네주기도 한다.

동장군이 찾아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해져도, 함께 힘을 쓰면 극복해낼 수 있을 거라며 밝게 웃던 이들이기도 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좋은 이웃들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그들을 내버려두고 안트로모프를 떠나버리게 된다면?

저렇게 혼란스러워진 상태로 둬버린다면… 거기다 동장군까지 엄습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 하나만 살자고 떠나버린다면, 안트로모프가 어떤 꼴이 될지는 불에 보듯 선명했다.

그리고 그런 벨렌체 왕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깊디깊은 에메랄드빛 눈이 동요하는 벨렌체 왕을 다시 담았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무엇입니까?”

“난…!”

결국 벨렌체 왕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치려 하던 바로 그때.

[전원 정지하십시오!]

선두에서 길을 열고 있던 카를이 갑자기 모든 일행에게 다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비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일행은 거짓말처럼 걸음을 멈췄고.

“호오? 공기가 좀 어수선한데?”

오거스틴은 고개를 살짝 들어 냄새를 맡아보더니 실웃음을 흘렸다.

길리티는 재빨리 바깥으로 패밀리어를 한껏 날려 보냈다.

푸드득!

새와 박쥐들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면서 살핀 광경은 그다지 긍정적이질 못했다.

“허!”

“왜 그러십니까?”

엘릭의 질문에 길리티가 쓰게 웃었다.

“검은 모래바람이 몰아오는구나. 거기다 얼어붙은 독이며 자갈까지. 저기 잘못 들어갔다간 그냥 피떡이 되고 말겠어.”

“동장군이에요! 동장군이 몰려오고 있는 거예요!”

“저것이 진짜 동장군의 정체인가 보오? 단순한 사풍이나 용권풍이 아니라, 저 정도면 거의 태풍 수준인데… 저런 기현상이 있단 말이지? 나중에 따로 연구해서 논문으로 써보고 싶어질 정도로군.”

길리티가 신기하다는 듯이 웃어댔지만, 하얗게 질린 벨렌체 왕의 안색은 돌아오질 않았다.

거대한 모래폭풍을 일으켜 앞에 닥치는 것은 모조리 갈가리 찢을 뿐만 아니라, 휩쓸고 지난 자리에는 강한 결빙과 독기를 남기면서 사지(死地)로 만들어버린다는 재해.

결국 그 사지에는 마물밖에 자라지 못하고, 더 억세지고 마니.

흑의 설원이 갈수록 금역이 될 수밖에 없는 데에는 바로 동장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안트로모프 근처까지 다가왔다?

안트로모프를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 일행으로서는 벽에 부딪힌 셈.

게다가 길리티가 말꼬리를 흘리는 걸 봐서는 문제가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저도 환안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무나.”

엘릭은 길리티에게 배웠다가 한동안 쓰지 못했던 환안(幻眼)을 전개했다.

짐승에게 일종의 최면을 거는 눈. 하지만 숙련도가 높아진다면 심령을 연결하여 패밀리어의 시야를 공유하는 것도 가능했다.

엘릭은 길리티의 도움으로, 그의 새와 박쥐들이 가진 시야를 볼 수 있었고.

거기서… 동장군의 모래폭풍을 등에 업은 채로 전진하고 있는 천여 명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드레이크나 호드 울프 따위의 탈것을 탄 채로 위풍당당하게 달려오는 군단.

그들의 머리 위로 나부끼는 깃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퓨리(Furry).

“어떻게 이쪽의 사정을 귀신같이 알고 퓨리가 군대를 보낸 것 같습니다.”

퓨리는 영호족이 호왕가를 등지고 일군 도시국가.

안트로모프에 있어 숙적이자 위협이라 할 수 있는 곳이 공격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퓨리가 어떻게…!”

벨렌체 왕으로서는 이 모든 것들이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안트로모프에 소란이 발생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멀리 있는 퓨리가 그걸 알아챌 수 있었던 걸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마물들도 행동을 중지한다는 동장군의 모래폭풍을 헤치면서 군대가 이동할 수 있단 말인가!

안트로모프로서는 누란의 위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벨렌체 왕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또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기 바빴다.

그러다 벨렌체 왕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엘릭의 에메랄드빛 눈이 웃음기를 머금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 설마 저를 퓨리에게 팔아넘기려고…?”

“굳이 그럴 것 같았으면, 그냥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그냥 전하를 저쪽에다 넘겼겠죠.”

“그럼…?”

“아까 전에 여쭈었던 질문,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무엇이냐는 질문.

벨렌체 왕은 한순간 입을 연 채로 아무 말을 하지 못하다 겨우 뗐다.

하지만.

어린 호왕의 두 눈은 다시 총명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저는… 망가지는 도시를 보고 싶지 않아요. 되돌아가서 시민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힘이 가득 실린 목소리.

엘릭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여기서부터 작전을 바꾸도록 하죠.”

“…!”

벨렌체 왕은 엘릭이 이렇게 순순히 의견을 받아들여 줄 줄 몰랐기에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곧 감사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도망치는 게 아니라 싸우는 쪽으로 바뀌는 거야?”

“더 재미있어지려나?”

푸른 매는 더욱 흥미진진한 얼굴이 되었고.

오거스틴은 묘한 얼굴로 엘릭을 바라봤다.

“제자야, 너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게로구나?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아주 큰 무언가’가 있어. 안 그러냐?”

“‘적’이 나타난 것 같으니 우선 같이 싸울 준비를 하는 게 어떨까요, 스승님?”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설명 안 해주면 훼방만 놓을 것이다만. 그래도 괜찮으냐?”

“…쳇.”

엘릭은 어물쩍 넘기려던 게 실패하게 되자, 벨렌체 왕을 바닥에다 내려놓고 천천히 마력을 개방하면서 말했다.

“재상과 거래를 했습니다.”

“응? 재상?”

“노… 루스 재상과요? 그가 무슨 말을… 하였나요?”

“예. 전하를 살려달라고 하더군요.”

“…!”

여태 노루스 재상을 배신자라고 생각했던 벨렌체 왕의 동공이 급격하게 떨렸다.

“뭐? 그 흑랑족 영감이 그럼 배반자인 척 했다는 것이냐?”

오거스틴은 영민한 머리로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대충 돌아가는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엘릭과 노루스 재상이 짜고 치는 카드놀이였던 것이다!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 노루스 재상이 별궁으로 찾아왔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거래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우리 어린 왕의 안전이오. 그에 소모되는 비용은 얼마든지 드리겠소.

-이곳 안트로모프의 왕궁에는 승냥이들이 많아도 너무 많소. 그들로부터 우리 왕을… 부디, 제발, 보호해주시오.

-이렇게 부탁… 드리오.

흑랑족의 늙은 재상은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조아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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