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타버린 설원
“무슨 소립니까? 그건 안 됩니다!”
“대장! 그래서는 왕께서…!”
친위대원들은 명령에 크게 반발했다.
왕은 인질로 잡혀 있는데, 친위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선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전하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다! 책임은 전부 내가 질 테니까 물러나! 뭐해! 어서 길 안 열고!”
결국 이리나의 호통에 따라 친위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친위대원들의 얼굴에는 수치와 치욕, 그리고 분노가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선은 엘릭에게로 쏟아졌다.
* * *
“…저, 정말 이래도 되는 거겠죠?”
엘릭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안, 벨렌체 왕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로 살짝 떨었다.
처음 엘릭이 자신을 인질로 삼을 거란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정신이 아찔해지던지.
아무리 의젓한 척을 하려 해도 그때만큼은 쉽게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졌던 엘릭의 한 마디가 벨렌체 왕의 마음을 다잡고 말았으니.
-그래야 너희 쪽 사람들이 안 다치는데?
엘릭의 논리는 아주 간단했다.
아무리 대신이며 관료들이 뒤로 다른 꿍꿍이를 지니고 있다 해도, 아직 벨렌체 왕에게 정통성과 권위가 있는 한 함부로 해치지 못한다.
아니, 그럴 마음이 있다고 해도 안트로모프의 시민들이 전부 지켜보는 상황이라면 절대 함부로 마음을 먹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왕이 이쪽에 있는 한 무력 부대인 친위대도 함부로 덤비지 못할 테니, 큰 소동 없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결국 엘릭의 말대로 인질로 잡혔고,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첨탑 위에서 모든 시민들이며 친위대까지 보고 있노라니, 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찔했다.
말은 못했지만, 사실 벨렌체 왕은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도 별다른 충돌은 없잖아요?”
끄덕끄덕.
벨렌체 왕은 더 이상 차마 밑을 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나저나 저 아저씨는 참 연기도 잘하시네.”
그런 벨렌체 왕의 고역(?)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릭은 여전히 이리나의 바짓가랑이에 달라붙어 엉엉 눈물을 터뜨리고 있는 펜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같이 나갈 거냐는 질문에 자신은 이곳에 남겠다고 했었지. 그래야 인질극이 성공할 것이라고.
그리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고 있었다. 대화가 제대로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친위대가 섣불리 덤비지 못하게 적절하게 공포도 조성하고 있었다.
‘나중에 어떻게 배워볼 기회 없으려나. 당장 제국으로 가셔도 대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엘릭은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던 중에 눈을 반짝였다.
이리나의 명령에 따라 친위대가 길을 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니 어서 전하를 풀어드려!”
이리나가 목소리에 마력을 잔뜩 실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얼마나 소리가 컸던지 도시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였다.
‘아줌마 목청도 좋으시네.’
엘릭은 이리나가 들었다면 더 크게 노발대발할 말을 아무렇게나 속으로 하면서 최대한 악당다운 미소를 선보였다.
『누가 봐도 악당이 맞는데 ‘다운’이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우리가 너희를 뭘 믿고? 왕은 도시를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한다! 왕을 풀어주는 건 바로 그 뒤! 그때까지 쫓아올 생각은 마!”
“우리가 너희들이 왕을 풀어드리란 것을 뭘 보고 믿으란 것이냐! 무슨 해코지를 할 줄 알고!”
“그럼 목청 좋은 아줌마만 따라와. 거리는 충분히 벌리고. 그럼 되지?”
“아, 아줌마?”
순간, 이리나의 관자놀이가 툭 튀어나왔지만,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꼼수 부려서 다른 친위대원들이 몰래 쫓아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마법사인 거, 안 잊었지?”
“…알겠다.”
“대장!”
“너무 위험합니다, 대장!”
친위대원이 모두 위험하다고 소리쳤지만, 이리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이미 내가 내린 결정이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알아서 책임을 지고 사임할 테니 이곳을 지키고 있도록.”
친위대는 저마다 이를 악물면서 더 뒤로 물러나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엘릭은 눈을 반짝이면서 다른 일행들에게 어서 저쪽으로 빠져나가라고 턱짓을 했다.
[허허허! 정말이지 너와 같이 있으면 심심할 날이 없어서 즐거워 죽겠구나!]
오거스틴이 가장 먼저 메시지를 보내면서 히죽 웃었다.
[조심해서 와.]
[하여간 어떻게 네 옆에 있으면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니? 더 이상 이런 곳에 휘말리기 싫었는데… 미치겠다, 진짜. 하아!]
헤이즈의 걱정에 찬 시선과 션의 한숨소리까지.
헤르만 등도 전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엘릭을 바라보다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렇게 난리를 피우고 정말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마지막 남은 엘릭에게 벨렌체 왕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그렇게 물었지만.
“기호지세(騎虎之勢) 모릅니까? 달리는 호랑이 위에 올라타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그 호랑이가 저인 것 같은 건 착각이겠죠?”
엘릭은 어린 호왕이 어쩐지 예리하단 생각을 하면서 일행들의 뒤를 바로 쫓았다.
약속대로 친위대와 시민들은 도시에 남고, 이리나만 일정한 거리를 벌린 채로 쫓아왔다.
* * *
“푸하하! 라센트의 영웅이 우스던 아카데미에서도 유명한 꼴통이었다더니!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합니다?”
헤르만의 의형제, 둘째 라셀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달리는 내내 파안대소를 멈추지 못했다.
셋째 하만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형제가 한창 뛰어다닐 때에도 별의별 사건 사고들을 많이 일으켜봤습니다만… 이렇게 왕을 직접 납치하고 도망친 적은 없었죠?”
“그러니까 내 말이. 캬! 우리 이사벨 조카님,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절대 우리 같은 놈팡이들은 만나지 않을 거라고 박박 우기더니. 거봐. 우리 같은 매력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니까?”
여전히 헤르만의 등에 업혀 있던 이사벨이 그 말을 듣고 발끈했다.
“엘릭 님이 어떻게 숙부님들과 같을 수가 있어요? 애당초 동기부터가 다르잖아요. 숙부님들은 그냥 소란스러운 거고, 엘릭 님은 정의로운 거죠!”
“에이!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지, 무슨. 우리도 그렇게 나쁜 짓은 안 하고 다녔다?”
“얼굴이 나쁘잖아요!”
“…우리 조카님, 인신공격하기 있기 없기?”
“있기!”
“제기랄! 이건 뭐 할 말이 없네!”
처음 이사벨이 도와달라고 전령을 보냈을 때까지만 해도, 의형제들은 그동안 잠자코만 있던 큰형님이 대체 무슨 일이신가 싶었다.
맏이인 헤르만을 제외하면 나머지 다섯은 원래 젊은 시절에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을 만큼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었던 놈팡이들이었고.
나이를 먹고 나서도 그런 기질은 버리지 못해서 결국 ‘은둔’을 택한 헤르만을 내버려두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헤르만이 언젠가 다시 자신들을 찾아주기만을 고대했으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헤르만과 함께 했던 시절이 가장 유쾌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헤르만의 이복동생인 파울 바일이 주제도 모르고 청사자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들리긴 했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주제도 모른다며 콧방귀를 끼기에 바빴다.
그러던 중에 그런 전령을 받았으니….
당시에는 얼마나 놀랐던지.
뒤늦게 헤르만이 입마증에 빠져 목숨의 위기를 겪었고, 그사이에 파울이 이사벨을 노리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감히 자신들이 존경하는 큰형님을 죽음의 위기로 내몬 것으로도 모자라, 어여쁜 조카를 위험에 빠뜨린 파울을 용서할 수 없노라고.
만약 거기서 헤르만이 파울의 모가지라도 따오라고 한마디만 했다면, 즉각 움직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헤르만은 그러지 않았다.
바일 가문의 일은 어디까지나 바일 가문의 소속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 외인들이 참견할 문제가 절대 아니라고 말이다.
성격 급한 라셀과 하만은 분통 터지는 소리 하지 말라고 고래고래 역정까지 냈지만, 헤르만이 가진 특유의 쇠고집은 도저히 끝나질 않았다.
대신에 헤르만은 의형제들에게 다른 부탁을 했다.
-딸을 지켜다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 몸이 아직 다 낫질 않아 치료가 좀 필요할 듯하니 같이 옆에서 말동무도 좀 되어주고.
그러면서 의형제들은 헤르만을 따라 황도로 가고, 거기서 다시 흑의 설원까지 오게 되었다.
워낙에 너무 먼 길을 돌아왔기에. 과장 좀 보태서 대륙을 3분의 1쯤 종단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대체 자신들을 이렇게 똥개 훈련시키는 엘릭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나보니.
‘골 때리잖아?’
헤르만을 제외한 다섯 의형제들은 모두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놈이다.’
‘분명해! 우리와 동류다!’
‘푸하하하! 우리 같은 사람 찾기 쉽지 않았을 텐데. 대체 이런 인재를 어디서 찾아낸 거야?’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설마 자신들이 빚어낸 소란을 이렇게 더 크게 키워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얼굴만 우리 계통이면 금상첨화인데! 으음! 그건 좀 아쉽단 말이지?’
이사벨이 얼굴이 죄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엘릭의 얼굴과 자신들이 뭐 얼마나 차이가 있냐고 말하려 해도 그건 차마 양심상 꺼낼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래저래 전장을 뒹굴면서 인상이 포악해진(?) 자신들과 달리, 엘릭은 누가 봐도 귀족가의 자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으니까.
빛이 쏟아질 것 같은 금발이며 에메랄드라도 박은 듯한 녹안까지.
저게 인형 얼굴이지, 어디 사람 얼굴이냐.
‘하긴 그러니까 우리 조카님이 마음에 둔 거겠지만.’
그래도 의형제들은 샌님만 아니면 된다는 주의였다.
앞으로 같은 한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왕이면 같이 사고를 칠 수 있는 사람이면 좋지 않겠나!
“…음?”
엘릭은 한순간 헤르만과 의형제들-‘푸른 매’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들-이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왜 그러나 싶은 얼굴이 되었지만.
『동종 업계의 사람을 만났을 때의 얼굴이로군.』
[무슨… 소립니까?]
『아주 반가워한다고. 흠! 이런 놈이 여섯이나 더 있다니. 이거 아무리 봐도 좀 위험한데.』
그동안 엘릭에게 너무 많이 당했기 때문일까.
메피스토는 엘릭의 냄새(?)가 아주 강하게 풍기는 푸른 매를 탐탁지 않은 눈길로 바라봤다.
엘릭은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푸른 매는 명성만큼이나 악명도 아주 자자했으니까.
‘산적들 모아다가 세계제일 산적대회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걸 열지 않나, 대나무 낚싯대로 크라켄 잡아보겠다면서 망망대해에 한 달 동안 떠 있질 않나… 그런 온갖 기행(奇行)을 벌이고 다녔던 아저씨들이랑 내가 어떻게 비교되냐고!’
하지만 엘릭은 그런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한쪽에서 션이 썩은 동태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뭐야, 그 얼굴은?]
[난 전혀 모르고 있었다.]
[뭘?]
[세상은 아주 넓다는 걸.]
[…무슨 의미냐?]
[그리고 그만큼 기인이사도 모래알처럼 많다는 것도.]
[그러니까 무슨 말…!]
순간, 션의 입가에 썩은 미소가 걸렸다.
[정말 모른다고 할 건 아니지?]
[….]
엘릭은 차마 션의 시선을 더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리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보다 어떻게 할 거야? 저 친위대장인지 뭔지 하는 사람은 계속 쫓아오고 있고, 안트로모프에서도 어떻게든 손을 쓰려 할 텐데.]
수인족은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 이런 수모를 겪은 이상, 절대 그들 일행을 순순히 보내주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 그거. 걱정 마. 아무도 안 쫓아올 테니까.]
“무슨 소리야? 아무도 안 쫓아올 거라니?”
션은 메시지 마법으로 나눌 대화가 아니라고 여기고 육성으로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저절로 엘릭에게로 향하고.
그런 이들을 보면서 엘릭이 싱긋 웃으면서 아직 끝나지 않은 계획들을 털어놨다.
그럴수록 일행들의 얼굴은 점점 묘하게 변하더니, 나중에는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마왕보다 더 마왕 같은 놈이로다. 샤이탄 놈이 이놈을 먼저 알았더라면 실직했을 게 분명해.』
메피스토는 기가 찬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마왕 중에서 가장 사악하다 알려진 존재도 여기에 비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이걸로 끝난 게 아녔어? 더 재미난 게 있다고?’
‘맞네. 우리랑 동류.’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지.’
‘이사벨에게 말해야겠어. 이 남자는 절대 놓치면 안 돼! 우리의 뒤를 이을, 아니, 이미 넘어선 인재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푸른 매들은 더더욱 반짝이는 눈으로 엘릭을 바라보았다.
“…혼란하다, 혼란해.”
반대로 션의 시름은 한층 더 깊어졌지만.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