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타버린 설원
엘릭은 이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크게 놀란 상태였다.
‘잠깐만, 그럼 이 사람은?’
엘릭은 그러다 뒤늦게 이사벨을 등에 업고 있는 거구의 중년인이 누군지 깨닫고, 재빨리 예를 갖췄다.
“청사자 헤르만 바일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본인은 일개 백작 위를 받은 평범한 무부일 뿐이오. 찬성공작께서 그렇게 예를 갖추실 필요는 없다오. 여하간 만나게 되어 반갑소. 잠시 들어가도 되겠소?”
헤르만 바일은 듣던 대로 진중한 어투와 기품을 갖고 있었다.
기사도의 전형이라더니. 딱 그 말이 잘 어울렸다.
하지만 엘릭은 그보다 헤르만이 예리하게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런데 여긴 대체 어떻게…?”
“내 딸아이를 구해준 은인인 데다, 내 병을 치료해준 신의이기도 한 사람을 집에서 맞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었소. 그래서 직접 뵈러 황도로 갔더니 안 계시더군.”
“저는 답변이 없으시기에 잠시 생각이 길어지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인데, 길이 엇갈렸나 봅니다.”
“오히려 우리가 미안할 따름이오. 원래대로라면 찾아가겠다는 서신을 먼저 보냈어야 했는데, 서프라이즈로 뵙고 싶다는 생각에 말없이 불쑥 찾아간 것이니. 자리를 비우셔도 할 말이 없지요.”
헤르만은 이사벨과 함께 별궁으로 들어오면서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쪽으로 쏟아지는 시선들을 보고, 한쪽 입술 끝이 씰룩였다.
“한데, 여기에는 여러모로 익숙한 얼굴들이 좀 보이는구려. 회사자의 사냥개께서 이런 곳에 계실 줄은 몰랐는데?”
한순간, 헤르만의 시선이 날카롭게 헤이즈에게 꽂혔다.
헤이즈 역시 굳은 얼굴로 이미 해머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두 분이, 아시는 사입니까?”
“알다마다. 본인과는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기 바쁜 악우(惡友)가 한 명 있다오. 그 친구와 관련해서 몇 번 만났었지. 찬성공작과의 관계는…?”
“제 누이입니다.”
“으음? 설마 혈육이오?”
“그렇습니다만.”
“허! 메르빙거의 적녀가?”
헤르만의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헤이즈에게 꼿혔다.
헤이즈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사냥개, 그런 거 아니라고 누차 말씀드렸을 텐데요?”
“허, 허허!”
헤르만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자리가 자리라 굳이 꺼내지 않는 투였다.
“저쪽에는 네레스타의 노괴(老怪)도 계시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늙은 괴물을 그럼 노괴라 부르지 뭐라 부르겠소?”
긴장감이 돌던 헤이즈와 다르게, 오거스틴과는 살갑게 티격태격한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거기다 역적 무리의 간부에다 수인족까지…! 일행의 면면이 참으로 대단하구려.”
헤르만은 일행을 쭉 훑어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조합을 이렇게 만나게 되니 신기했던 것이다.
딱 봐도 엘릭을 중심으로 뭉친 것 같았다.
‘더 탐이 나는군.’
보통 이렇게 알게 모르게 특유의 매력으로 주변에 인재들을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는 하늘로 높이 오를 사람.
헤르만은 엘릭이 그런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아무래도 꼴도 보기 싫었던 황태자를 제쳐두고 곧장 장벽을 넘었던 게 신의 한 수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대체 여기까진 어떻게 오신 겁니까? 밖에 벌어진 일들은 또 무엇입니까?”
이사벨이 대신 나서서 대답했다.
“은인께서 장벽을 넘으셨다는 말을 112초소장에게서 듣고 난 뒤에 흔적을 따라 북상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이곳 안트로모프에 인간들이 억류되어 있단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요.”
흑의 설원으로 들어온 이후. 헤르만과 이사벨 일행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마물과 추위를 버텨내면서 잠시 몸을 쉴 곳을 찾아 안트로모프를 ‘몰래’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다 전날에 어느 인간들이 별궁에 억류되었다는 말을 수인족들의 대화에서 알게 되고, 시기상 엘릭 일행일 게 분명해서 사고를 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밖에서 일부러 수인족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저희 측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어요. 나가시려면 지금 나가셔야만 해요.”
엘릭 일행은 한순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우연히 벌어진 사달이긴 해도, 빠져나가려면 확실히 지금이 기회긴 하다.
하지만 벨렌체 왕이 문제였다.
“난…!”
어린 호왕은 어쩔 거냐는 무언의 시선을 받고,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주춤거리고 말았다.
그때, 엘릭이 조심스레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하셨죠?”
벨렌체 왕의 동그란 눈이 한순간 흔들렸다.
“그 다짐은 여전히 변화가 없으십니까?”
맑디맑은 동공에 엘릭이 푹 담겼다.
그러다 여전히 자신을 안고 있는 헤이즈에게로 향하고, 그녀가 괜찮다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눈매가 단단하게 변했다.
“나가고 싶어요. 꽃의 신전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왕이시여!”
펜이 걱정에 찬 얼굴로 바라봤지만.
“더 이상 이 도시에 남아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펜, 무작정 저를 따라오시라고 말씀드리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고려는 해주세요.”
“….”
펜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몇 살은 더 먹은 듯한 벨렌체 왕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엘릭이 씩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럼 같이 나가시도록 하죠. 대신에 거래는 거래니 연구동부터 먼저 들립시다.”
“연구동은 갑자기 왜 그러죠?”
벨렌체 왕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구 자료라면 제 머릿속에 다 들어 있는데요?”
“…!”
“…!”
“…!”
엘릭을 비롯한 이들은 놀란 나머지 입을 쩍 벌렸다.
강체술과 관련된 자료라면 양이 엄청날 텐데 그걸 다 기억한다고?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말똥말똥하게 뜬 눈을 보니 거짓말을 한 것 같지도 않았다.
“…왕족이 천재이기까지 하면, 그거 너무 사기인 거 아니냐.”
엘릭의 혼잣말에 션은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귀찮게 연구동을 가로지를 필요는 없어졌으니, 탈출이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았다.
“그럼 갑시다.”
일행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벨렌체 왕은 헤이즈의 등에 업힌 채 눈을 꼭 감았다.
“근데 이 소란에서 조용히 빠져나가기는 글렀는데.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냐?”
션의 질문에 엘릭이 히죽 웃었다.
“있다마다.”
그러면서 시선은 벨렌체 왕에게 꽂혀 있었다.
* * *
친위대장 이리나는 소동이 벌어지는 장소로 다급하게 이동하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게 다 인간을 도시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야! 그냥 설원에서 마물 밥이 되도록 던져놨어야 했는데!’
수인족은 대게 도시국가 생활을 하기에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서야 바깥의 변화를 전혀 알 수 없어서 이따금 이런 식으로 인간들을 잡아 오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리나는 그런 문화가 싫었다.
애당초 인간은 수인족에게 해만 끼치는 존재. 악귀 같은 놈들이었다. 괜히 데리고 있어봤자 해악만 끼치는 놈들일 뿐이었는데…!
결국 놈들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금발을 한 그 인간은 이런 일을 저지를 것처럼 보이지 않던데…!”
“정신 못 차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도 몰라?”
거기다 그사이에 얼마나 수하들을 홀려놨는지, 지금 벌어지는 소동이 인간들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수하도 더러 있었다.
전부 엘릭과 몇 마디씩 대화를 나눴던 수인족이었다.
대장이 크게 윽박지르니 그들도 자연스레 자라목이 되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놈들을 도로 도시 밖으로 내쫓던가 해야 해. 안 되면 죽이기라도 해야 한다!’
특히 벨렌체 왕이 인간들이 있는 별궁으로 찾아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는 이리나의 조바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하필이면 소동이 벌어진 쪽도 별궁이 아니던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친위대장으로서, 그분에게 해악이 미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별궁이 보인다. 전원 전투 준비!”
이리나의 명령에 따라 친위대원들은 일제히 마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두두둑, 두둑!
콰드드득-
그러자 인간 같은 외형을 띠던 몸이 일제히 동물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수화(獸化, Transfur)였다.
그리고 살벌한 투기가 사방으로 불어닥쳤으니.
휘휘휘!
친위대를 구성하는 모두가 안트로모프 안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들. 그것도 ‘투사’의 칭호를 받은 전사들이니만큼, 다 같이 발산하는 기세는 아주 대단했다.
그들은 이미 출동 전에 이리나가 내린 명령대로, 각 조별로 벨렌체 왕을 구하기 위한 임무를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동작은 거기서 멈춰야만 했으니.
“동작 그만!”
뾰족하게 서 있는 별궁의 첨탑 위에, 엘릭이 있었다.
벨렌체 왕을 인질로 삼은 채로!
“왕은 내 손에 있다! 왕을 살리고 싶으면 모두 하던 짓들을 멈춰라!”
당연히 친위대며 소란을 듣고 밖으로 나온 대신과 관료들, 시민들까지 전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와, 왕이시여!”
“저, 저 미친놈이 대체 무슨 짓을!”
“이놈! 감히 폐하의 옥체에서 손을 떼지 못할까!”
“옥체에 생채기 하나라도 났다간 네놈들을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수인족들은 하나같이 분노를 토했지만, 함부로 다가갈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혹여 다칠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역력했다.
야망과 욕심에 눈이 먼 관료들이라면 모를까, 안트로모프 시민들에게 있어 어린 호왕은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의젓했고, 시민들의 이름도 어떻게든 외워서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모습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단 왕가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그는 충분히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누가 전하를 구해주시오! 제발! 전하를 구해주시오오!”
그때, 별궁에서 펜이 허겁지겁 튀어나왔다.
얼굴에 온통 시커먼 그을음이 가득했고, 옷도 여기저기가 헤져 있어 누가 보더라도 안에서 고난을 겪었을 게 모습이었다.
“친위대장! 제발 우리 왕을 구해주시오! 제발 우리 왕을…!”
펜은 이리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서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이리나는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그를 달랬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들이…! 저들이 비겁하게도 친히 대화를 하러 오셨던 왕을 납치하고 겁박하려 들고 있소!”
“왜 저희 친위대를 대동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만 있었더라도 이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을!”
“미, 미안하오. 전부 나의 실책이오. 재상과 친위대장의 관계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에… 내가 그렇게 하시라고 추천을 드렸다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제가 재상님을 아버지처럼 모신다고 해도, 저는 이 직무가 먼저인 것을!”
“면목 없소이다. 내가 생각이 짧았소. 불상사가 벌어진다 하여도 젊은 시절에 투사로 지낸 적이 있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미안하게… 되었소. 이 죄는 달게 받겠소.”
고개를 툭 떨어뜨리는 펜의 모습은 영락없이 중죄를 저지르고 자백을 하는 이의 모습이었다.
“펜 님의 죄는 이 일이 전부 끝난 다음에 묻도록 하죠. 일단은 먼저 전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이리나는 이글대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엘릭은 생긴 것만큼이나 아주 사악하게 웃어 보이며-물론, 그녀의 시야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중이었다.
“길 열어! 그렇지 않으면 너희 왕이 다칠지도 모른다!”
이리나는 한순간 그냥 달려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끝내 고개를 가로저어야만 했다.
이미 강체술을 선보일 때 보였던 모습만 하더라도 엘릭은 절대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같이 있던 두 노인이며 여인도 저 금발 놈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해 보이지 않았어. 거기다 소란을 일으키는 침입자들에게도 투사들이 여럿 당했다고 하고…!’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어쩔 수 없다.’
이리나는 긴 고민 끝에 친위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원, 길을 열어라!”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