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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76화 (76/405)

76화

타버린 설원

벨렌체 왕은 처음 엘릭이 본격적으로 흥정을 하기 전에 잠시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어보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재미난 광경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재미난 광경’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는 어린 마음이 상처로 난도질 되고 말았으니.

“와, 왕이시여.”

펜은 그런 어린 호왕의 마음을 달래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려야만 했다.

그 역시 최근 들어 퓨리의 야욕이 나날이 거세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장군까지 찾아오면서 신하들 사이에 좋지 않은 기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펜에게 있어 가장 큰 충격은 노루스 재상이 찾아온 것이었으니.

강체술을 자신에게 팔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도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갈 뻔했었다.

수인 연합이 갈가리 해체되고 난 뒤, 거의 무너져 갈 뻔하던 안트로모프를 겨우 살리고, 호왕의 혈통까지 보존시켰던 충신이 이럴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자신조차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진대, 하물며 벨렌체 왕이 받을 충격은 얼마나 클지… 도저히 짐작도 가질 않았다.

이미 벨렌체 왕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었다.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 버티고 있지만, 촉촉하게 젖고 있는 눈가가 더더욱 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얼마에 주실 수 있을지 여쭙고 싶습니다만.”

그러다 엘릭이 대답을 재촉하자, 펜의 인상도 와락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천박한 장사치 같으니! 지금 왕께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보고도 값을 흥정하려는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두 가지를 정정해드려야겠군요. 하나는 전 장사꾼이 아니라 마법사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저는 흥정을 하는 게 아니라 권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뭐라?”

“정치가 어디 소꿉놀이인 줄 아십니까?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달래주면 상황이 나아지기라도 합니까? 결국 정치는 힘의 논리입니다.”

여태껏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헤프게 웃던 엘릭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펜은 한순간 별궁 내에 흐르던 공기가 무거워진 것에 움찔하고 말았고.

벨렌체 왕은 어딘지 모르게 홀린 눈으로 엘릭을 바라봤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나 권위가 있어도, 결국 그걸 지탱할 힘이 없으면 무시당하고 저마다 사분오열하고 마는 게 세상사입니다.”

엘릭은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지켜봐야만 했던 광경이었으니까.

마도명문이라 추켜세우지만 뒤로는 무시하기 바쁘던 사람들.

가문의 오랜 우방이니 도움을 좀 달라하였더니 거리낌없이 등을 돌리던 귀족가들.

뒤통수를 때리고 남은 재산을 가지고 사라지던 봉신들.

부활할까 싶어 언제나 견제하기 바쁘던 황실.

어떻게든 마도명문의 권위와 정통성을 빼앗으려던 마탑….

특히 절맥증을 앓아서 마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니 비웃던 동기들은 엘릭이 라센트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안면을 싹 바꿔 찾아오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베럭스 교수에게 엿을 먹이고, 오거스틴과 길리티의 눈에 띄는 등 좋은 일만 겪고 난 뒤로, 엘릭은 그만큼 힘이 없는 자에게 세상이 얼마나 척박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엘릭은 힘이 없다는 게 얼마나 나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발톱을 기르십시오.”

“발톱… 을?”

벨렌체 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엘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호랑이시잖습니까?”

벨렌체 왕은 점점 엘릭의 말에 홀리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발톱을 기르십시오. 그리고 그게 다 자랐다 싶을 때, 단번에 휘둘러서 전부 차지하십시오.”

엘릭은 천천히 벨렌체 왕에게 다가가 무릎을 살짝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그에게 손을 내밀자, 벨렌체 왕은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맞잡았다.

엘릭의 모습이 담긴 작은 동공이 이제 크게 격동하고 있었다.

[이 각도 어때요? 아니면 이 각도가 낫나?]

『아예 영혼을 홀려 놓는군.』

[이래야 제일 비싸게 먹죠. 어때요? 이 정도면 완전히 뻑 간 거 같죠?]

『네놈은 마족이 되면 크게 대성할 것이다. 마족에게 있어 간교함이란 아주 중요한 소양이니까.』

[칭찬 감사합니다.]

『미친놈.』

메피스토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놈도 어떤 면에서는 참 솔직하지 못하군. 일부러 어려운 길을 가고 있고.’

그는 사실 엘릭이 이러는 것이 말과 다르게, 벨렌체 왕에게 강한 자극을 주기 위한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비싼 값을 받고 팔 거라면, 귀찮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냥 노루스 재상을 찾아가 흥정을 더 크게 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엘릭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외로워 보이는 벨렌체 왕에게 스스로가 투영되었기 때문이겠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엘릭에게는 헤이즈라는 든든한 지원자가 있어 큰 굴곡 없이 이만큼 클 수 있었던데 반해, 벨렌체 왕은 그런 게 전혀 없다는 것 정도?

원래대로라면 노루스 재상이 헤이즈의 역을 맡은 것이겠지만.

‘그런 재상이 마족이란 것을 알고 완전히 눈이 뒤집혔었지.’

마족이 배신의 증거가 되다니. 메피스토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하여간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전과 별 차이가 없다면, 그건 호왕의 운명도 그뿐이라는 거겠지.’

메피스토는 팔짱을 끼며 냉정한 눈으로 벨렌체 왕을 바라봤다.

저 어린 아이는 과연 자극을 제대로 받고, 강체술이라는 발톱을 길러서, 다시 선조들과 같은 위엄을 드러낼 수 있을까?

“…장벽 이남에, 율호왕(律虎王)께서 남기셨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벨렌체 왕은 뭔가를 굳게 다짐한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순간, 엘릭의 눈이 크게 빛났다.

율호왕은 역대 호왕들 중에서도 가장 사납고 수인족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던 존재.

장벽을 몇 번이나 넘어 한때 북방 지역을 수인족의 영토로 만들 뻔한 적도 있었던 만큼, 재화도 상당히 많이 모았을 게 분명했다.

“왕이시여! 하지만 그건 우리 안트로모프가 다시 부흥하였을 때 사용해야 할…!”

펜이 기겁한 얼굴이 되어 소리쳤지만, 벨렌체 왕은 손을 뻗어 그의 말을 막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 위치가 그려진 지도를 드리죠. 대신에 강체술을 제게 넘겨주세요.”

엘릭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건 후불입니다만? 거기다 지도가 진짜인지 이쪽에서 확인할 수도 없잖습니까?”

“그도 그렇네요. 그럼… 우리네 종족이 강체술을 복원하기 위해 연구한 자료들이 있는데, 그것도 같이 공유해드릴게요.”

“좋습니다.”

엘릭이 강체술을 어느 정도 복원했다지만, 아직도 결여된 부분이 많았다.

이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 없는 자료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채울 수 있다면, 어쩌면 오의와 비기까지 포함한 후초식까지 전부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 아아…!”

그리고 펜은 드디어 강체술이 호왕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또한, 꽃의 신전도 열어드릴게요.”

“동장군 때문에 닫혔다고 들었습니다만?”

“호왕은 대대로 꽃의 신전의 지킴이를 자처해왔어요. 선대의 인연이 있으니, 제가 직접 찾아가 부탁한다면 문을 여는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예요.”

엘릭은 이 말이 곧 자신을 무사히 안트로모프에서 빼내 달라는 뜻이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하긴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몰래 발톱을 기르기엔 좋지 않겠지.’

차라리 몸을 숨겼다가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생긴 것만 귀여운 줄 알았는데. 제법 똑똑하잖아, 이 꼬맹이?’

펜이 알았다면 왕 모독이라며 펄펄 날뛰었을 생각을 함부로 하면서.

엘릭은 어리지만 어리지 않은 호왕의 손을 꽉 쥐었다.

“거래는 성립되었습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가 씩 웃었다.

* * *

“….”

모든 거래가 끝난 뒤.

벨렌체 왕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와, 왕이시여!”

“괜찮아요. 잠시 쉬고 싶을 뿐이니 걱정 마세요.”

펜이 화들짝 놀랐지만, 벨렌체 왕은 손을 뻗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왕의 얼굴에 잔뜩 드리운 수심을 알았기에 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답답한 마음을 대체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 건지.

그러던 그때, 헤이즈가 조용히 다가왔다.

“당신은…?”

펜은 인간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 경계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헤이즈가 벨렌체 왕의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울고 싶다면 마음껏 울렴. 억지로 참는 건 좋지 않단다.”

따스한 목소리.

머리를 쓰다듬는 정겨운 손길.

벨렌체 왕의 얼굴이 한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 무엄합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 보여도 안트로모프의 왕…!”

헤이즈가 뒷머리를 쓰다듬자, 벨렌체 왕은 한순간 말을 뚝 그쳐야만 했다.

어쩐지 그 손길이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와 너무 많이 닮았으니까.

결국.

“으아앙!”

벨렌체 왕은 헤이즈의 품에 안긴 채로 눈물을 쏟아야만 했다.

* * *

“그러고 보니 고양이가 뒷머리를 긁어주는 걸 그렇게 좋아한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호인족은 호랑이가 아니냐?”

“같은 고양잇과니까 비슷하지 않을까요?”

엘릭과 오거스틴이 잠깐 생산성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벨렌체 왕이 겨우 머리를 들었다.

부끄러웠던지 두 눈만큼이나 얼굴도 빨갰다.

헤이즈는 그래도 괜찮다는 듯 자상하게 웃으면서 여전히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지만.

뭐랄까, 마치 나이 차 많이 나는 막냇동생이라도 달래는 듯한 모습 같았다.

벨렌체 왕도 기분이 좋은지, 엉덩이에 달린 꼬리가 쉴 새 없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음.”

엘릭은 이상하게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심통이 났다.

“눈이 좀 많이 부으셨습니다?”

벨렌체 왕은 헤이즈의 손길을 느끼면서 잠시 고양이처럼 작게 하품을 하다가, 엘릭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다시 헤이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귀가 더 빨갛게 익어있었다.

“엘릭, 너!”

대신에 헤이즈의 도끼눈이 날아들자, 엘릭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요. 친위대는 같이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펜은 벨렌체 왕을 걱정스레 보다가, 엘릭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자 황급히 정신을 차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오. 친위대장인 이리나는 노루스 재상의 수양딸이오. 처음에는 대대로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재상이 붙인 감시역인 셈이지.”

“어? 그럼 재상이 이미 왕께서 여기 있는 걸 아는 거 아닙니까?”

“일단 궁을 나올 때 친위대도 몰래 나오긴 했소. 하지만… 지금쯤이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음! 역시 몰래 빠져나가는 건 힘들려나.”

노루스 재상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과 관료들도 별궁 근처에다 눈을 숨겨뒀을 게 분명했다.

움직이는 순간 발각되겠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럼 투명화 마법을…? 아냐. 그건 더 수상쩍어. 투사 대부분이 감각도 무척 예민하고. 금방 들킬 거야.’

엘릭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냥 깽판 치고 나가는 수밖에 없으려나?’

어차피 무력 충돌을 한다고 해서 크게 힘들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트로모프가 아무리 왕국이라고 해도, 이미 몰락할 대로 몰락한 도시에 불과한 반면에, 이쪽은 9써클 대현자까지 있는 먼치킨이었으니까.

‘여차하면 하늘로 날아버려도 되고. 좋아. 밤늦게 깽판을 쳐서 도망치는 걸로 하자.’

흑의 설원으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이상 저들도 함부로 뒤쫓지는 못할 테지.

엘릭은 그렇게 내린 판단을 일행들에게 전해주려 했다.

그러던 그때.

댕댕댕-!

갑자기 도시가 떠나가라 곳곳에서 알람이 울렸다.

“비상 경종이에요! 무슨 일이지? 설마 퓨리라도 쳐들어왔나?”

벨렌체 왕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펜이 허겁지겁 창문 쪽으로 달려가 커튼을 옆으로 넘겼다.

엘릭 일행도 퓨리라는 곳이 안트로모프와 가장 갈등이 심한 수인족 세력이란 것을 진즉에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란 얼굴이었다.

동장군이 찾아올 때면 모든 도시와 세력들이 싸움을 멈추고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하지 않았나? 오히려 그걸 이용해 노린 걸까?

하지만 퓨리가 쳐들어왔다면 벨렌체 왕이 도시를 나가려 하지 않을 게 뻔했다.

엘릭은 창문을 활짝 열었고, 도시가 곳곳에서 벌어진 폭발과 소란으로 시끄러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포탄처럼 이곳으로 날아오는 커다란 두 개의 인영(人影)도.

“무, 뭐야?”

엘릭은 적의 기습인가 싶어 황급히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곧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엘릭? 엘릭 맞죠?”

탁!

창문 턱에 착지한 거구의 사내 등에서 누군가가 얼굴을 빼꼼 내밀면서 반갑게 소리쳤다.

“이, 이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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