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타버린 설원
순간, 벨렌체 왕과 펜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잇는 내내 노루스 재상의 얼굴 표정은 담담했다.
“강체술의 중요성은 두 말 필요할 것 없이 아주 중요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거래를 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는 법입니다. 여태껏 우리 수인족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는 모두 그런 거래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나중에 가서는 정말 다시 위험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왕가의 상징성을 이대로 놓는 건 말이 안 될…!”
“더군다나 지금 흑의 설원을 뒤덮고 있는 ‘동장군(冬將軍)’으로 인해 꽃의 신전은 굳게 문이 닫혀 있는 상태. 그곳으로 길을 열어줄 수도 없잖습니까?”
이 순간, 펜도 뒤로 주춤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거래는 절대 안 됩니다.”
노루스 재상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 순간, 벨렌체 왕은 그동안 친할아버지처럼 가깝던 노루스 재상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됩니다.”
* * *
“왕이시여! 이렇게 기회를 보내셔서는 안 됩니다!”
조회가 모두 끝난 뒤.
펜은 따로 벨렌체 왕을 찾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비록 노루스 재상이 가진 발언권이 너무 큰 나머지 당시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 생각도 펜의 생각과 같아요.”
그러다 펜은 벨렌체 왕이 한참 고민하던 끝에 내놓은 대답에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시다면 무를 것 없이 바로 인간들을 이곳으로 부르시는 것이…!”
“하지만 노루스 재상이 반대하네요.”
“왕이시여!”
“펜도 아시다시피 재상은 결코 이유 없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저는 지금도 재상이 어떠한 이유로 반대했을 거라 믿는 중입니다. 실제로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중이기도 하고요.”
순간, 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왕이시여. 아무리 노루스 재상이 ‘검은 현인(賢人)’이라 불릴 정도로 오랫동안 안트로모프를 평화롭게 운영하셨다지만, 이제는 나이도 나이이시니만큼 이따금 그릇된 판단을 내릴 때도 있을 수 있…!”
“펜, 말조심하세요.”
벨렌체 왕이 차분한 목소리에 펜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순간, 벨렌체 왕은 어린아이답지 않은 위엄이 묻어나고 있었다.
“…소신이 실언 하였습니다.”
“그분은 제게 사사로이는 대부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판단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고개를 숙인 펜의 두 눈은 여전히 불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벨렌체 왕도 그런 펜의 반응을 눈치챘지만 못 본 척했다.
“그래도 직접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단순히 인간이라고 해서 배척할 필요는 없겠죠. 그곳으로 갑시다.”
“옳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제가 길을 앞장서겠습니다!”
펜은 고개를 숙였다.
벨렌체 왕은 씁쓸한 얼굴이 되어 노루스 재상이 있을 방 쪽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동장군이 있으면 길을 함부로 열기 어렵단 말씀이시지요?”
“그렇다. 그동안에 흑의 설원은 사실상 ‘겨울’이 되어 모든 것이 얼어붙고, 메마르며, 마물 외에는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대지가 되어버린다.”
엘릭이 맞장구를 칠 때마다 친위대원은 잔뜩 들뜬 표정이 되어 묻지 않은 것까지 이것저것 늘어놓기 바빴다.
친위대장이 절대 인간들과 말을 섞지 말라던 엄포는 머릿속에서 전부 잊어버린 뒤였다.
“그동안에는 우리 안트로모프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이며 흑의 설원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영역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바깥으로 일절 나서질 않지. 모든 교류가 단절되고, 이동 수단이 중단된다. 그리고 그건 허기와 가뭄의 계절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그렇다는 건 꽃의 신전으로 가는 길도 막혔단 뜻이겠군요?”
“막힌 게 아니라 아예 신전 자체가 닫혔을 것이다. 모든 꽃이 동장군 앞에서는 지기 마련이니.”
“그렇겠지요. 그나저나 정말 말씀 감사합니다요. 역시 깃털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분이시라 그런가, 박식하기도 이리 박식하시니…!”
“흠흠! 우리 종족의 깃털이 좀 많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긴 하지. 그중에서도 내가 좀 독보적이긴 하지만.”
친위대원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더 떠벌리다가,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고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이제 교대해야 한다.”
“아쉽습니다. 투사님 덕분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그대와 같이 겸손하고 차분하다면 참 좋을 것을.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조심해서 가십시오.”
엘릭은 퇴근을 준비하는 친위대원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다가, 곧 보이지 않게 되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저거 새대가리 맞네. 대체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거야?”
방금 전 친위대원이 조인족에 해당하는 홍학족(紅鶴族)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수인족들, 이래도 되는 걸까? 몇 번 비위를 맞춰주니 하나같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태세니.
“그런데 꽃의 신전으로 가는 길이 닫혔다고? 이거 어떡하지? 그래도 그냥 가야 하나.”
하지만 덕분에 엘릭은 현재 흑의 설원을 뒤덮고 있다는 이상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꽃의 신전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까지도.
문제는 상황이 이래서야 그곳으로 가는 것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건데.
“어떻게 할 생각이니? 너무 무리할 생각은 하지 마.”
헤이즈도 메르빙거의 일원이니만큼 가문의 안배를 어떻게든 푸는 것이 좋았지만, 여태껏 여정에서 엘릭이 보인 태도들을 보니 또 무리를 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걱정 마.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될 것 같으니까.”
“…너 그걸 말이라고!”
“내가 언제 해결 못하는 거 봤어? 그런 표정 짓지 말래도. 누나, 나 몰라? 엘릭이라니까?”
헤이즈는 여태 그러했던 것처럼 큰소리를 뻥뻥 치는 엘릭을 보면서 노파심이 들면서도, 정말 그가 알아서 처신을 잘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딱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누가 딴죽을 건다고 해서 호인족이 진짜 강체술을 놓칠 것도 아니고. 설사 진짜 협상이 결렬된다고 해도 빙정이 있으면 어떻게든 길은 찾겠지.’
물론, 그 대책이라 할 만한 걸 헤이즈가 들었다면 경악할 만큼 조악했지만.
바로 그때.
“저 봐, 바로 손님 오네.”
“응?”
헤이즈는 엘릭이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인물이 서 있었으니까.
“…신변 이동이 자유롭지 않아 많이 갑갑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굳이 그렇지는 않나 보군.”
노루스 재상은 영 언짢다는 투로 주변을 둘러봤다.
엘릭은 마치 장사꾼처럼 손을 비비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재상이 아니십니까. 이곳까지 어쩐 일로? 거래라도 하러 오셨습니까?”
“거래라면 거래일 것 같소만. 들어가도 되겠소?”
“어이쿠! 누추한 곳이지만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카를, 뭐하냐! 귀한 분이 오셨는데 차 안 내오고!”
노루스 재상은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엘릭을 보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이런 사람이 정말…! 허!’
정말 낮에 중앙 홀에서 친위대원을 상대로 강체술을 보이며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그 사내가 맞나 싶었으니까.
엘릭 등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강체술은 원래 아주 큰 전설을 품고 있었다.
세상을 파멸로부터 구하고.
일족의 성세를 이끌어낼 영웅왕(英雄王)에게만 내려진다는 전설.
물론, 그것이 진실이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만큼 강체술이 수인족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대단했다.
처음 엘릭이 강체술을 선보였을 때 관료와 대신들이 크게 혹했던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으니.
‘그래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겠지. 허허실실이란 말이 있으니. 무엇보다 저 눈빛… 절대 만만한 인간이 아니다.’
노루스 재상은 스스로 안목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었고, 그런 눈으로 봤을 때 엘릭은 절대 호락호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엘릭의 주변을 채우고 있는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
어쩌면 옛 영광을 잃어버린지 오래인 안트로모프 따위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노루스 재상이 내린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두근!
두근!
이들을 만난 뒤부터 발작이라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었다.
그사이 카를이 준비했던 차를 내오고.
노루스 재상은 차향이 제법 깊다고 생각하면서 엘릭을 바라봤다.
엘릭이 말했다.
“이곳에 직접 오셨다는 것은 거래를 재개하고 싶은 쪽으로 생각이 바뀌신 것 같습니다만. 말씀만 하시죠. 값을 어떻게 치를 생각이신지?”
“왕실과의 거래는 없소.”
한순간, 엘릭의 눈이 반짝였다.
아까 전과 똑같은 말인 것 같았지만, 실은 큰 차이가 있었다.
“거래 내용을 바꾸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소. 값이라면 얼마든지 쳐드리지. 잘 모르겠지만, 본인은 오랫동안 이 도시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비축해둔 재화도 꽤나 되오. 꽃의 신전으로까지 가는 길도 편하게 갈 수 있도록 열어드리지.”
“값만 제대로 쳐주신다면야,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그런데 어떤 내용으로 바꾸시겠단 건지?”
순간, 노루스 재상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강체술, 나에게 파시오.”
* * *
“이 정도면 맛집 아닙니까? 그새 대체 몇 명이나 오는 거야?”
노루스 재상이 다녀간 뒤.
엘릭 등이 있는 별궁은 꽤 많은 사람들로 문턱이 닳아야 했다.
하나 같이 누군가 보고 있을까 싶어 경계하면서도, 동공 한편에는 야망을 숨기지 않는 이들.
“호왕의 혈통이 이미 망가진지 오래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오거스틴은 언제 구했을지 모를 곰방대를 입에 물면서 어이없다는 투로 혀를 내둘렀다.
그도 황실에 대한 충성과는 거리가 먼 마탑 소속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역을 저지르겠다거나, 정권을 휘어잡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노루스 재상을 기점으로 쏟아진 손님들은 하나 같이 강체술만 얻을 수 있다면, 왕좌는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만큼 강체술이 가진 권위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왕좌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째 씁쓸한 마음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자신들이 있을 장소를 별궁으로 점지해둔 게 이런 걸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었을까?
“답은 전부 미뤘었지?”
“예. 이런 건 원래 가장 비싸게 팔아치워야 하는 법이잖아요?”
“누구한테 넘길 거냐?”
“아직까지는, 재상이요.”
“이유는?”
“제일 값을 크게 불렀으니까?”
오거스틴이 피식 웃으면서 되물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엘릭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그렇지. 오거스틴은 그런 표정을 지었지만, 엘릭은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에 메피스토에게 확인 절차를 거쳤다.
[재상 맞죠? 마족이라고 했던 거.]
『그래. 정확하게는 ‘감염’된 것이지만.』
[감염? 그게 뭡니까?]
『깃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마족이 놈의 육체를 강탈하려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실패해서 심장 쪽에 똬리를 틀고 있더군. 그러다 서서히 동화가 이뤄진 듯하니, 그놈도 똑같이 마족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흠! 확실히 그래서 그런가? 누구랑 동족 아니랄까봐, 어떻게 저렇게 음흉한 건지.]
『…그 누가 본 왕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그렇게 들리셨다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겠죠.]
『제기랄!』
엘릭은 주먹을 부르르 떠는 메피스토 너머로 보이는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처음 메피스토에게서 노루스 재상이 마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겁했던지.
인두겁을 쓰는 것처럼 마족이 수인으로도 변할 수 있는 거냐는 질문에 뭐라고 말했더라?
-흥! 인외는 항상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법이니라.
어쩐지 이해가 되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인간으로 위장이 가능하다면 수인족이라고 안될 것도 없겠지.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메피스토의 말마따나 마족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미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건지도 몰랐다.
뭐, 덕분에 그럴듯한 계획을 짤 수 있었던 거지만.
“…아무튼 보다시피 강체술을 원하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값이 예상보다 많이 비싸졌는데. 왕가에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호왕 전하?”
엘릭은 몸을 반대로 돌렸다.
때마침 별궁의 한쪽 구석에 마련된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곳에는.
“….”
여태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벨렌체 왕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