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타버린 설원
강체술은 총 5개의 전초식과 3개의 후초식, 그리고 이것들을 응용한 오의와 비기로 이뤄졌다.
이중 엘릭이 복구한 것은 바로 전 5초식이었다.
가진 기존 자료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마저도 상당수는 엘릭이 이론적으로 상정하여 넣은 것이 많았다.
부족분은 마투술의 마력 순환을 터득하면서 채우기도 했고.
하지만.
엘릭은 장담할 수 있었다.
진짜 강체술이 오더라도, 지금 자신이 보이는 형태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콰콰콰!
늑대 계통으로 보이는 수인족은 뭔가를 느꼈는지 몸을 급격하게 좌측으로 틀었다.
그런 그의 상체가 있던 위로 다섯 개의 칼바람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바닥과 벽면을 할퀴었으니.
“…!”
“…!”
“저, 저, 저건…!”
“설마…?”
투사는 물론, 이리나와 친위대원들, 그리고 대신과 관료들 할 것 없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한 그들이었기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선보인 엘릭의 동작에서 풍기는 짙은 호기(虎氣)를!
벨렌체 왕마저 언젠가 선조들이 남긴 책자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눈을 동그랗게 떠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경악에다 종지부라도 찍겠다는 듯이.
엘릭은 재차 새로운 동작을 선보였다.
강체술.
아호심양(餓虎尋羊).
두 번째 초식은 ‘배고픈 범이 양을 사냥한다’는 뜻처럼, 일방적인 공세로만 구성된 연환 초식이었다.
파파파팟!
퍼퍼퍼펑!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방출된 마력이 허공에서 연거푸 터져나가고,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들썩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동작이 빠른 건 아니었지만, 하나하나가 충분히 위협적이어서 투사로서는 겨우겨우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 역시 친위대에서 촉망받는 실력자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쉽게 믿을 수 없는 일.
더군다나 타인의 접근을 막듯이 휘몰아치는 한파는 다른 친위대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크르르르!
그 한파 속에서 깊게 묻어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살기는 원초적인 공포를 조금씩 건드리고 있었다.
본능이 자꾸만 울어댔다.
놀이를 즐기는 듯한 저것을 깨워서는 안 된다고.
강체술.
흑호좌동(黑虎坐洞).
그러다 마침내 범이 사냥을 끝내고자 무겁게 내려앉았을 때.
콰앙!
“컥!”
투사는 결국 거세게 누적되었던 마력의 충격을 모두 버텨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면서 주저앉아야만 했다.
“펠!”
친위대장 이리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엘릭에게 대신 달려 드려던 순간.
“그만!”
벨렌체 왕의 호통이 중앙 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리나의 칼이 엘릭을 공격하려다 말고 도중에 멈췄다.
엘릭도 똑같이 손날로 무기에 맞서려다 정지하면서 천천히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씩 웃으면서 잔뜩 굳은 얼굴을 한 벨렌체 왕을 돌아봤다.
“물건이 확실하단 건 보여드렸습니다. 왕께서는 사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중앙 홀을 가득 메우던 호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사라졌다.
벨렌체 왕은 입을 꾹 다물었고, 대신과 관료들도 한동안 충격에 너무 젖은 나머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한 건지 물을 수 있나?”
그러다 던진 어린 호왕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가계에서도, 수인족 사이에서도 단절된 강체술이 어떻게 인간에게 남아있냐는 의미.
“마법입니다.”
여기에 엘릭은 적당히 양념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놈, 또 약 팔기 시작하는군.』
엘릭을 여러 번 겪은 메피스토만이 그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댔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 그의 혜안(?)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 법?”
“마법은 모든 진리를 관통합니다. 아직까지 인간이 밝혀내지 못한 자연의 신비를 벗기고, 그 속에 담긴 이치를 조합할 수 있습니다.”
“강체술도 그런 식으로 복원했다는 건가?”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럴 수가!”
엘릭은 벨렌체 왕의 두 눈이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여느 7살 어린 아이처럼 별무리를 쏟아내는 것을 보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이게 먹히네?’
처음 마법에 관심이 있는 듯 보여서 적당히 섞어본 거였는데.
그게 어린아이의 가슴에 정확하게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수인족은 마법과 거리가 멀기도 하고. 신비감만 잔뜩 포장해주면 선후 관계는 알아서 포장하겠지.’
우리 인간들이 당신네들 수인족의 터전을 마구 짓밟아 기록들을 빼앗고, 일부는 노예로 삼아서 이것저것 연구한 일지가 마탑에 아주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보들을 토대로 제가 복원했습니다.
미쳤다고 이딴 말을 이들 앞에서 떠들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한편.
일행들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것, 참.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저거 약 판 거죠, 도련님?]
[하여간 주댕이질은…. 저 인간,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흘흘! 그래도 상황이 아주 편하게 돌아갈 듯하니 다 좋은 것 아니겠냐.]
[그런데 혹한 건 왕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오거스틴과 길리티는 벨렌체 왕과 마찬가지로 다른 대신과 관료들도 어느새 엘릭의 화술에 완전히 넘어간 듯한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똑같이 눈을 반짝이며 혹한 모습이었으니까. 몇몇은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헛기침을 하기도 했지만, 힐끔힐끔 엘릭을 훔쳐보기 바빴다.
‘이거… 설마 왕이 넘어온 게 어려서가 아니라, 그냥 종족 특성이 그런 거 아냐?’
그런 공통된 생각이 일행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수인족은 원래 너무 순수해서 탈이다.』
메피스토는 그런 엘릭의 의문을 덜어주듯이 콧방귀를 끼면서 말했다.
[저도 그런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정도가 심한데요?]
『그러니까 망했지.』
아주 시니컬한 대답.
엘릭도 쓰게 웃고 말았다.
[그 정돕니까?]
『때로는 책에서 보던 것보다 현실이 더 시궁창인 법이다.』
[등쳐먹기 딱 좋네.]
『아무리 사기꾼이라 하여도 이럴 때는 참 안타깝다는 동정심이 들기 마련인데, 너는 아예 반대구나?』
[그렇게 보이는 걸 뭐 어쩝니까?]
『아주 뻔뻔한지고.』
[탭댄스?]
『그래서 아주 바람직한 자세로고.』
엘릭은 이제 얼굴에다 철판을 깔기 시작한 메피스토를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뭐, 하여간 그런 종족 특성에다가, 흑의 설원에 갇혀서 타 집단과 그렇게 교류도 많지는 않았을 테니 다들 딱 산골 영감님 수준이라 보면 되겠네요. 그런데 이거 보긴 좀… 그렇다.]
벨렌체 왕은 어리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이도 지긋하게 먹은 영감님들이 하나 같이 반짝이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니 영 기분이 좋지를 않았다.
슬슬 종지부를 찍어야겠단 생각에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제가 알기로 강체술은 위대한 왕가의 비전이라 알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마법을 궁구하여 이것을 가져왔다고는 하나, 어찌 원주인의 손에 들어간 것보다 가치가 빛을 발하겠습니까? 좋은 칼은 좋은 주인을 찾아가야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엘릭은 ‘봐라. 내가 익힌 것만 해도 투사 한 명 때려잡을 정도로 강하지 않냐. 하지만 호왕, 너희들이 가져가면 아주 다를걸?’이라는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던졌고.
이미 반쯤 혹했던 벨렌체 왕과 대신 관료들은 이제 완전히 뒤로 넘어갈 기세였다.
“그러니 이 거래를 통해 왕가는 새롭게 일어날 기반을 닦으시고, 저희는 좋은 기회를…!”
“거기까지 하면 되었다.”
그때, 여태껏 말이 없던 노루스 재상이 엘릭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그대는 우리가 실전했던 강체술을 비싼 값에 팔고 싶다는 게 아닌가?”
다른 영감님들과 다르게 이 영감님은 안 쉽겠는데.
엘릭은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가능하다면, 다른 정보도 같이 받고 싶습니다.”
“정보?”
“꽃의 신전으로 가는 길을 알고 싶습니다. 안내를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구요.”
순간, 대신과 관료들이 어수선해졌다.
“꽃의 신전? 거길 왜 인간이…?”
“난 인간이 그게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안 것부터가 신기하군.”
“흠! 그런데 어쩐다? 그곳은…!”
저들끼리는 조용히 속삭인답시고 속삭였지만, 엘릭의 기민한 감각은 그것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노루스 재상은 손을 높이 들어 중요 부분에서 끊어버렸다.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강체술에 대해 토설할 때까지 강제로 억류할 수도 있다만?”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만?”
엘릭은 양 손목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너무 쉽게 부서진 마나 구속구를 말한 것이다.
노루스 재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들유들하기만 한 엘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노려봤지만, 곧 손사래를 쳤다.
“좋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우리도 ‘대가’에 대해서는 논의를 나눠봐야 하니 우선 물러나 있어라. 친위대장, 이들을 별궁으로 안내해주도록.”
이리나와 친위대가 다가오는 것으로 협상은 끝났다.
“그럼 쌍방 간에 만족할 만한 아주 현명하고 유용한 판단 기대 하겠습니다.”
노루스 재상은 ‘뭔 저런 놈이 다 있냐?’는 얼굴이었지만, 엘릭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일행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헛웃음을 흘렸고.
그러다 친위대의 안내에 따라 중앙 홀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데.
『저놈.』
메피스토가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마족이다.』
* * *
“….”
“….”
“….”
엘릭 일행이 친위대와 함께 나간 뒤에도, 중앙 홀은 여전히 침묵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만큼 강체술의 등장이 그들에게 던진 충격은 너무 컸다.
“받읍시다.”
누군가가 툭 던진 말은 고요함을 다시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받아야지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호왕의 혈통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기회인데 고민할 게 뭐가 있습니까!”
“하지만…!”
“다들 무얼 걱정하시는 겁니까? 인간과 손을 잡는 것 때문에 그럽니까? 물론, 저도 인간이 증오스럽습니다. 하지만 전 그보다 ‘퓨리’가 더 혐오스러운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랫동안 안트로모프에 있어 숙적이자 역린이었던 도시국가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 몇몇 대신과 관료들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친애하는 왕이시여. 저들의 거래를 받아들이십시오. 꽃의 신전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조건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만한 사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얀 깃털이 인상적인 백오족(白烏族)의 수장, 펜은 벨렌체 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저 ‘퓨리’가 항상 내세웠던 명분이 ‘호왕의 기상이 부족하다’였으니, 그 부족한 기상을 채워버린다면 저들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벨렌체 왕은 한동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말문이 턱 하고 막혀왔으니까.
퓨리는 원래 안트로모프와 함께 ‘수인 연합’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도시였다.
특히 그곳의 영주인 영호족(令狐族)은 원래 노루스 재상이 속한 흑랑족과 함께 왕가인 호인족의 양팔이라 할 수 있던 곳.
하지만 영호족이 따로 갈라진 것은 호인족이 강체술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부터였다.
강체술은 단순히 왕가의 비술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수인족을 하나로 묶는 상징성이었고, 그들의 이탈을 방지하는 억압책이기도 했다.
그런 것을 잃어버렸으니. 퓨리가 ‘호인족은 더 이상 수인족을 이끌 자격이 없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독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도시국가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이탈을 선언해버렸고.
결국 수인 연합은 연합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안트로모프와 근방에 있는 소도시 두어 곳만 남아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가조차 계속 몰락을 거듭하면서 이제 벨렌체 왕만이 남은 상태.
그런데 그런 과거를 지적했으니, 벨렌체 왕도 저절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왕가를 재건하여다오.
그것이야말로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화병으로 돌아가신 선대 왕의 마지막 남은 유훈이 아닌가.
결국.
벨렌체 왕은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펜의 말마따나 강체술이야말로 안트로모프가 다시 부흥할 기회였다.
하지만.
“안 됩니다.”
그 전에 노루스 재상이 딱 잘라 말했다.
아주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하면서. 흔들리는 눈을 가진 벨렌체 왕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인간과의 거래는 절대 안 됩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