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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73화 (73/405)

73화

타버린 설원

“아국 내 영토에서 인간들이 발견되어 압송 중이라 들었는데. 맞나요, 재상?”

도시국가 ‘안트로모프’의 왕, 벨렌체가 던진 질문에 재상 노루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그런데 왜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죠?”

“신경 쓰실 사안이 아니라 판단이 되어 보고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신경 쓸 사안이 아니라니! 우리네 종족의 영원한 악적이자, 본 왕가를 파멸로 이끈 원수들이 감히 국령에 함부로 발을 들였다는데, 신경 쓸 사안이 아니라니요! 저는 어리지 않습니다! 충분히 이런 사안을 보고 듣고 판단 내릴 자격이 있단 말입니다!”

벨렌체 왕의 호통에 노루스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일곱 살 먹은 새끼 호랑이가 어리지 않다면, 대체 누가 어리다는 것입니까?’

노루스가 몸담은 흑랑족(黑狼族)은 대대로 왕가 혈통인 호인족(虎人族)을 옆에서 시중해온 봉신 가문이었다.

그는 선조들이 남기신 유지에 따라 손자보다도 훨씬 어린 주군을 모시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 그것이 부쩍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자신의 나이도 나이거니와, 어린 왕과 도시를 둘러싼 여러 정쟁(政爭)들이 자꾸만 그의 기력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이 빌어먹을 것도 그러하고.’

두근!

노루스는 터질 듯이 거칠게 뛰는 왼쪽 가슴을 벨렌체 왕 몰래 움켜쥐면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벨렌체 왕은 평상시처럼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을 줄 알았던 늙은 재상이 별다른 말이 없자 조금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인간들은 어떻다던가요?”

노루스는 벨렌체 왕의 어린 눈망울에 맺힌 호기심을 놓치지 않았다.

말로는 종족의 악적이니, 왕가의 원수이니 떠들어댔지만.

사실 벨렌체 왕은 으레 그 나이대 어린 아이들이 그렇듯, ‘바깥세상’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

“별것 없었다고 합니다.”

“고향은 어디라고 합니까?”

“아직 모릅니다.”

“나이는?”

“아직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몇 명이나 됩니까? 마법사가 있다던데, 진짜 있답니까?”

“역시나 모릅니다.”

질문을 던지는 족족 모른다고 하니, 벨렌체 왕도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댈 수밖에 없었다.

“재상이 대체 아는 게 뭔가요?”

“많은 걸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그게 뭐냔 말입니다.”

“왕께서 어젯밤에 요에다 지도를 그리셨다는 것 정도면 많이 알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이익! 그거 왕 모독죄입니다!”

“이런! 소신이 큰 실수를 하였나이다. 허니, 죄를 청하고 이만 사직을 할까 합니다. 윤허해주시지요.”

“이이이익!”

벨렌체 왕은 차마 그러라고 말하지 못하고 애꿎은 옥좌만 주먹으로 쿵쿵 내리쳐야만 했다.

언제나 그렇듯, 노루스는 이쯤에서 어린 왕을 놀리는 걸 그쳐야겠단 생각에 슬그머니 한 발을 뒤로 뺐다.

“죄인들이 곧 이곳 왕궁까지 압송될 것입니다. 그때 직접 문초를 해보시지요.”

“이, 인간이 여기로 온다구요?”

벨렌체 왕은 순간 복잡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난생처음 보게 될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선조 때부터 들어온 악명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의지까지.

‘그래. 이것이겠지. 내가 날이 갈수록 이놈에 잡아먹혀 가면서도 억지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이분의 미래를 보기 위해서…!’

노루스는 자그마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벨렌체 왕을 보면서 몰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10년만… 아니, 5년만 더 버틸 수 있기를.’

두근!

두근!

그런 노루스의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심장은 더 거칠게 날뛰었다. 그 때문에 손등 위로 핏대가 잔뜩 돋았다가 겨우 가라앉았다.

* * *

“안트로모프의 왕께서 너희를 직접 심문하시고자 기다리신다. 예의를 모르는 너희 인간들이라고는 하나, 만약 왕께 불경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즉결 처분을 가할 것인 줄 알아라.”

엘릭이 직접 구해주었던 묘인족 여인이 사실 친위대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자신을 ‘이리나’라고 이름 밝힌 묘인족 여인은 엘릭 일행을 한껏 노려보면서 병사들에게 그들을 직접 왕 앞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흠! 늙은 몸으로 찬 감옥 바닥에서 잘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무릎이 시려오는구만.”

“형님도 그렇수? 나도 그런데. 허어!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흑의 설원에 와서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인지.”

오거스틴과 길리티는 대체 언제 이 재미도 없는 연기를 그만둘 것이냐며 하나뿐인 제자에게 눈치를 팍팍 주었지만.

엘릭은 그런 스승들의 시선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은 일이 생각보다 훨씬 순조롭게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직 남은 호인족이 있었단 말이지? 지금부터 그놈을 만날 수 있는 거고?’

대대로 수인족의 ‘왕족’을 자처해왔던 호인족은 갖은 전란으로 결국 멸종했다….

그것이 그동안 마법 학계에서 정립된 통설이었다.

실제로 마지막 호왕이 죽은 뒤, 북방에서 수시로 제국을 위협하던 수인족은 내분으로 지리멸렬하면서 이제는 한낱 외지의 종족으로만 남았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이거… 어쩌면 뜻하지 않게 잭팟일지도?’

호인족의 혈통이 아직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수인족의 통합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라면.

그건 분명히 강체술을 실전하면서 그럴 힘이 없어져서가 분명했다.

혈통이 가지는 권위도 결국 힘이 없으면 빛이 바래는 법일 테니까.

그런 왕가에 권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때, 강체술이 갖게 될 가치는 얼마나 될까?

“흐흐흐!”

『아주 비싼 값에 팔 생각으로 신나 죽으려고 하는군.』

이미 엘릭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던 메피스토는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흔들어댔지만.

[듣기로 백토족(白兎族)은 금광에다 토굴을 파는 습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죠? 서서족(西鼠族)은 유독 반짝이는 것만 모은다고 했었고. 또….]

『어찌 이런 부분은 그리도 선조들과 똑같은 건지. 쯧!

아무리 몰락했어도 왕가이니만큼 보유한 유산은 많겠지.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중앙 홀에 입장했다.

“죄인들을 압송해 왔나이다.”

이리나와 병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예를 취하자, 옥좌에 앉아있던 벨렌체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래에는 십여 명 정도 되는 관료들이 줄지어서 그들을 한참 노려보고 있었다.

“고생하였다.”

‘꼬맹이잖아?’

제 딴에는 의젓한 척하려 목소리에 힘을 잔뜩 주었지만, 어린 티는 전혀 숨기지 못했다.

‘그런데, 귀엽… 네?’

많이 잡아봐야 일곱 살쯤 됐을까?

어린 호왕은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뾰족한 송곳니를 지니고 있지만, 찐빵처럼 부푼 토실토실한 볼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귀여운 것이라면 거의 사족을 못 쓰는 헤이즈의 눈이 벌써부터 커지고 있는 게 보였다.

‘이거, 어떡하지?’

엘릭은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비싼 값에 강체술을 팔아치울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제값이나 받을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옥동자처럼 귀여운 저 꼬맹이가 당장 강체술을 익혀서 날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해봐야지, 뭐.’

수인족은 개개인이 대부분 투사라고 알려진 만큼, 자신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들 수도 있었지만.

오거스틴과 길리티가 있으니 여차하면 도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대들이 인간인가? 장벽 아래에서 살고 있다던 그대들이 왜 우리네 영역을 침범하였는지 이유를 묻고자 한다. 거짓 없이 성의껏 대답해야 할…!”

벨렌체 왕은 마치 국어책을 읽듯이 국문(鞫問, 죄인을 심문하는 일)을 진행하려다 말고, 도중에 그쳐야만 했다.

엘릭이 갑자기 말허리를 잘라버렸으니까.

“왕이라고 하셨지요?”

옥좌 옆에 있던 대신이 나섰다.

“놈! 무엄하도다! 인간 주제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빳빳하게 고개를 드는…!”

“영감님은 옆으로 빠지시고.”

“여, 영감님?”

“지금 그쪽 왕님이랑 이야기 나누려고 하잖아요? 이런 거 도중에 끼어들면 왕 모독죄, 그런 거 해당 안 되나 몰라?”

“저, 저, 저…! 고얀!”

늙은 대신은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아직 이놈은 시작도 안 했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두어 마디만 나누면 아예 뒤로 쓰러지겠어. 쯧쯧! 나약한 놈 같으니라고. 그리 위풍당당하던 수인족이 천년 새 많이 약해져 버렸군.』

자신 때문에 어느 대마왕에게 종족 평가가 일제히 절하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채, 대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친위대장! 대체 뭘 하느냐! 저 죄인을 당장 끌어내지 않…!”

“한, 그만하세요.”

“하지만 왕이시여!”

“제가 대화를 나누도록 하죠. 그래.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벨렌체 왕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도중에 잘랐으니 화가 날 법도 한데도, 어쩐지 궁금해하는 투에 가까웠다.

의젓한 티도 제법 났고.

‘이거 생각보다 설득이 좀 더 쉬울지도 모르겠는데?’

엘릭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물었다.

“마법을 아십니까?”

“조금 흥미는 있다만… 인간의 기술이라.”

엘릭은 순간 어린 호왕의 눈동자가 별을 쏟아내다가, 힐끗 바로 옆에 있던 대신을 훔쳐보고 가까스로 겨우 가라앉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아무리 호왕이라고 해도 마법에 흥미가 안 생길 리가 없지. 그나저나 저 깐깐해 보이는 영감이 여기 실세구만?’

실세는 무슨 생각인지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다음에 이어진 엘릭의 말에는 흔들리고 말았다.

“그럼 강체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벨렌체 왕을 비롯한 모든 대신과 관료들이 일제히 격한 반응을 보였고.

“그걸 팔겠다면 얼마에 사시겠습니까?”

엘릭은 거기다 아예 폭탄을 던져버렸다.

대신들은 일제히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것이냐며 버럭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엘릭이 움직였다.

콰직!

양손을 묶고 있던 구속구에 힘을 세게 주는 순간, 구속구가 금세 박살나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전하를 보호하라!”

“죄인이 구속구를 풀었다! 서둘러 제압해!”

대신과 관료들이 어린 호왕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왕좌왕하는 동안, 이리나와 친위대는 다급하게 엘릭에게로 달려들었다.

“흘흘. 이제야 좀 갑갑한 걸 풀 수 있겠구나. 어쩔까? 도와주랴?”

오거스틴은 이제야 좀 지루함을 덜겠다는 듯이 씩 웃으면서 똑같이 구속구를 바로 부숴버렸다.

“아뇨.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수인족들이 그렇게 만만치는 않을 텐데?”

“그래도 물건은 제가 팔아야 하잖습니까? 그리고 계속 싸워봐야 마투술이 는다면서요?”

“원래 젊었을 때는 치고받고 많이 싸워봐야 최고니라.”

“그러다 골병들지나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엘릭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이쪽으로 달려오던 친위대에 몸을 날렸다.

마력이 개방되고, 냉혹과 흉포의 인장이 동시에 발동되면서 매서운 한파가 중앙 홀을 삽시간에 가득 메웠다.

무력 시연을 통해 강체술을 직접 수인족에게 팔아버릴 참이었다.

“에휴! 그럼 그렇지. 어째 여기까지 조용하게 오기에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

“그래도 이제 엘릭 도련님의 발연기는 더 이상 안 봐도 되잖습니까? 전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내 동생이지만, 공감이야. 여기도 금세 소란스러워지겠지?”

뒤따라 션과 카를, 헤이즈가 잇달아 구속구를 아무렇지 않게 해제하고.

“파하하! 난장판이야말로 내가 아주 좋아하는 광경이지!”

길리티는 금세 마법 무장을 갖춘 제자를 보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만큼 일행들을 속박하던 구속구는 저급이었다.

한편.

졸지에 하나뿐인 왕을 자객(?)들에게 노출하게 된 친위대는 금세 엘릭과 맞부딪치고 있었다.

콰아앙!

쩌저저적-

선두에 있던 병사… 아니, 투사와 엘릭의 주먹이 맞부딪친 순간, 강한 폭음과 함께 그들이 딛고 있던 대리석 바닥이 얼어붙으면서 삽시간에 빙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흡!”

투사는 강한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는 데 반해, 엘릭은 전혀 그런 기색 따윈 없었다.

쐐애액-

오히려 몸을 바짝 앞으로 붙이면서 안쪽으로 구부린 다섯 손가락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마치 그 모습이.

사냥을 개시하려는 호랑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강체술(强體術).

맹호출현(猛虎出現).

수백 년 만에 완전한 강체술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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