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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72화 (72/405)

72화

타버린 설원

물론, 엘릭이 가진 강체술은 아직 완전히 복구된 형태는 아니었다.

아직 손 볼 곳이 많고, 추가해야 하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거의 다 정립이 완성된 상태.

그것만 전달해주어도 수인족에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애당초 강체술은 수인족에게 맞게끔 탄생했으니까. 오히려 그들 덕분에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채우게 될지도 모르지. 나도 크게 영감을 받을 수 있을 테고. 흐흐.’

물론, 그로 인해 수인족의 전력이 전체적으로 향상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지만.

뭐, 어쩌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오히려 엘릭은 가능하다면, 자신이 새롭게 가꿀 가문의 협력자 혹은 동맹군으로 맞고 싶었다.

수인족은 한때 제국의 북방까지 위협했을 정도로 엄청난 성세를 구가했던 곳이었으니까.

‘지금은 비록 여러 파벌로 지리멸렬했다지만, 그래도 일부만 손을 잡아도 아주 큰 득이 되겠지.’

애당초 애국심이 크게 없는 엘릭으로서는 이게 당연한 거였다.

‘예전에는 다른 인간 세력들과 달리 본 가와 친하게 지냈었다던 기록도 얼핏 보기도 봤고.’

물론, 이제는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없는 까마득한 오래전의 일이니 그게 통용될 수는 없겠지만.

‘그나저나.’

엘릭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수인족은 또 어떻게 찾는다?’

오거스틴 등에게 큰소리를 떵떵 치긴 했다지만.

사실 엘릭도 어떻게 수인족을 찾아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흑의 설원은 아주 넓다. 그리고 복잡하다. 이런 곳에서 수인족만 골라서 찾기에는 모래사막에서 바늘 찾기, 혹은 망망대해에서 바위섬 찾기나 마찬가지겠지.

‘이게 무슨 반응을 보여주면 좋은데.’

엘릭은 혹시 어떤 힌트가 될까 싶어서 오래전에 오토 한에게서 받았던 빙정을 꺼내 보였다.

“제자야, 그건…?”

오거스틴이 빙정을 알아봤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화아아!

갑자기 빙정이 화사한 빛을 내뿜더니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시리고 차갑게만 느껴지는 빛.

그러다 빙정은 마치 나침반처럼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돌더니, 한쪽을 가리키면서 정지했다.

심안을 활짝 연 엘릭에게는 보였다.

빙정의 끝부분에서부터 결이 실처럼 어디론가 이어지는 것을.

“카를!”

엘릭의 다급한 외침에 카를이 무슨 일인가 싶어 마부석 문을 열며 이쪽을 보았고.

“우현으로 25도. 동북 방향으로 말을 몰아!”

“예? 예!”

카를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말 고삐를 잡아당겼다.

빙정이 언제까지 이렇게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니 그 안에 어떻게든 최대한 이동할 수 있을 만큼 이동해야 했다.

마물들이 계속 발목을 붙잡았지만.

* * *

엘릭의 추측대로, 빙정은 한 시간 정도 길을 가리키다가 다시 조용히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힘이 다한 것 같았다.

“과연 메르빙거라고 해야 하나? 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것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겠군.”

오거스틴은 흥미로운 눈길로 빙정을 바라봤다. 그러다 마치 밤이 찾아온 것처럼 어둡기만 한 주변 숲을 둘러보면서 미간을 살짝 좁혔다.

“한데… 여기가 대체 어디지? 아우, 뭔가 보이나?”

“아까 전부터 계속 패밀리어를 풀고 있는데, 숲을 벗어나는 족족 잡아먹히고 있수.”

길리티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흠.”

“여기서 빙정이 일단 끊겼으니까, 조금만 둘러보죠.”

엘릭의 의견에 따라, 일행은 마차를 천천히 몰면서 주변을 배회했다.

아직 장벽이 얼핏 보이는 초입 구역이라 그런지 아직 그다지 센 마물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슬슬 션과 카를로서는 버거운 개체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곳곳에서 이쪽을 호시탐탐 노려보는 시선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갈증과 허기에 잔뜩 미친 마물의 시선이었다.

그러던 그때.

“꺄아악!”

갑자기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엘릭과 오거스틴이 아주 잠깐 시선이 마주쳤고, 카를이 다시 고삐를 세게 잡아당기면서 그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거기엔 마물들의 틈바구니에 갇힌 여인이 있었다.

뾰족한 귀와 엉덩이에서부터 길쭉하게 나 있는 꼬리.

전체적으로 외형은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고양이의 인상을 덧댄 것처럼 보였다.

“…묘인족?”

수인족 중에서 제법 많은 개체 수를 자랑한다는 종족 명을 거론한 순간, 마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음. 저건, 좀….”

“허허! 너무 대놓고 수상쩍지?”

엘릭은 ‘너무 작위적인’ 상황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지만, 오거스틴은 가볍게 너털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래도 겨우 찾은 거니까, 일단 장단은 맞춰줘야겠죠.”

엘릭은 일행들에게 자신이 나서겠다고 말하면서 마차 밖으로 튀어 나갔다.

“이참에 개발해둔 것들도 한 번 실험해보고.”

엘릭은 냉혹의 인장을 발동시키면서 마력을 개방했다.

“【무장 개방】.”

화아아-

그를 중심으로 주변 배경과는 너무 대비될 정도로 새하얀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하고.

“【휘몰아쳐라】.”

엘릭은 최근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3개의 마법을 중심으로, 이것들을 수정 및 강화할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고.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얼음 화살’은 공격력을 최대로 증폭시키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단순히 무한정으로 얼음 화살을 뽑아 적에게 때려 박는 게 아니라, 주변에다 맹추위를 동반시켜 발까지 묶을 수 있다면 효율성이 증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눈보라’.

‘회오리치는 설풍(雪風)’과 ‘우박 소나기’를 덧댄 이 마법은, 일정 범위 내에서 극단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최고의 파괴력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휘휘휘!

한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한풍이 와류를 그리면서 마물들의 주변을 에워싸고, 하늘에서부터 단단하게 맺힌 얼음 화살과 우박이 일제히 쏟아져 난타를 시작했다.

콰콰콰쾅!

퍼퍼퍼퍽!

꾸에엑!

키에에엑!

마물들은 삽시간에 피륙이 꿰뚫리고 박살 나면서 바닥에 힘없이 대가리를 처박아야만 했다.

녹색 핏물이 흥건하게 쏟아져 검은 땅을 물들이는 가운데.

“젠장. 저딴 게 있으면 진즉에 좀 쓰지!”

“…허탈하네요.”

여태껏 마부석에서 마물들을 물리치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던 션과 카를이 허탈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션은 이따가 엘릭을 붙잡고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어야겠다고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쿵!

마지막 남은 마물이 그대로 쓰러지면서 소란이 거짓말처럼 끝났다.

“괜.찮.아.요? 많.이. 놀.랬.죠?”

엘릭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아있던 묘인족 여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션과 카를이 다시 몰래 속닥였다.

“진짜 많이 놀랐네요. 엘릭 도련님, 연기 못하시죠?”

“어. 교양으로 있었던 연극 수업에서도 C였어.”

“용케 낙제 안 하셨네요?”

“고급 와인 한 병 사 들고 가서 겨우겨우 사정했었거든. 마침 교수가 하던 연구 중에 막히던 게 있어서 도와주기도 했었고.”

“아하.”

어쩐지 너무 국어책 읽기 같더라니.

카를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감각이 타인보다 훨씬 예민한 까닭에 두 사람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어 속으로 울컥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다행히 묘인족 여인은 마물 사체에 정신이 쏠려 이쪽의 대화를 거의 못 들은 듯싶었다.

“다치신 곳이 있으시다면 치료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일어나시…!”

순간, 멍하던 묘인족 여인이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크게 뜨다가, 곧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인간 도움 따윈 안 받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쉬쉬쉭!

주변에 있던 나무 위로 상당한 수의 인기척이 나타났다.

“모두 손 위로 올리고, 무릎 꿇어.”

이미 엘릭 일행은 수인족들에 의해 에워싸여 있었으니.

수많은 활이며 쇠뇌가 전부 이쪽으로 겨눠져 있었다.

“셋 헤아릴 때까지 투항하지 않으면 저항으로 인식하고 공격하겠다. 하나, 둘….”

엘릭은 오거스틴 등과 일일일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냥 사로잡히라는 의미.

션은 영 불만 어린 얼굴이었지만, 엘릭이 ‘박쥐’라고 표현한 만큼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투항했다.

뒤이어 다른 일행들도 투항하고, 마지막으로 엘릭도 양손을 번쩍 들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항복.”

* * *

엘릭 일행은 곧장 수인족이 가져온 이동용 감옥에 갇힌 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웬 도롱뇽같이 생긴 마물이 끌어당기는 나무 감옥은 생각보다 튼튼해 보였다.

나무의 강도가 웬만한 강철보다 단단해 보여서 그런 걸까?

『마나 구속구까지 찬 걸 보니, 네놈이 겪을 미래가 복선으로 깔리는 것 같구나. 하하하!』

메피스토는 죄인의 몰골이 된 엘릭을 보면서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물구나무 탭댄스가 맘에 들었나 봐요? 한 번 더 콜?]

『…뭐냐? 너 어떻게 마력을 쓰는 거야?』

메피스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엘릭을 바라봤다.

수인족은 엘릭 일행을 사로잡자마자 바로 마력 구속을 시도했다.

마법 한 방에 마물들을 떼로 잡는 것을 보고, 혹시나 자신들도 다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엘릭은 전혀 아무 지장이 없는 듯 보였으니.

[이거 너무 조잡한데요?]

엘릭은 수갑을 흔들어 보이면서 콧방귀를 꼈다.

분명 마력은 조금씩 구속되고 있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도구로써의 성능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수인족 놈들은 원래 마법과 거리가 멀었지. 이런 외지로 내몰렸으니 그나마 갖고 있던 기술도 같이 퇴화해버렸을 테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이건 뭐요?]

『…꽃의 신전을 찾으려는 네게는 아주 커다란 호재가 분명하다, 그렇게 말하려 하였다.』

엘릭은 뻔뻔하게 말의 주제를 바꾸는 메피스토를 보면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예상했던 거긴 하지만, 거참 사람 산다고 하기엔 삭막하네요.]

어느덧 이동용 감옥은 수인족의 마을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라고 해야 할까?

겉보기엔 단순한 바위에 불과한 비석을 통과한 순간,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숲 한가운데에 대대적으로 벌목을 진행하여 만들어진 넓은 공터 위로.

수많은 건물이 빽빽하게 늘어서고, 저마다 다른 기능을 가진 구획으로 나뉜 것도 보였다.

족히 수천 명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지만.

문제는.

‘너무 난잡해. 금방 쓰러질 것 같고.’

모든 건물이 세월의 풍파라도 맞은 것처럼 금방 쓰러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곳곳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이 파괴된 흔적들도 보였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헐! 수색대가 잡아 온 게 설마…?”

“인간! 인간이야!”

“인간이 여기엔 대체 왜 온 거지? 설마 이 마을까지 침범하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대체 여긴 왜 데려온 거야! 그냥 죽여버리지!”

수인족들은 하나 같이 집 밖으로 나와서 경계에 찬 시선으로 엘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죽일 듯이 노려보네요?]

『너희 인간들이 터전을 잃게 만든 건 우리 같은 인외만이 아니다. 너희들이 ‘아인(亞人)’이라 부르면서 멸시하는 모두지.』

애당초 ‘아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에 버금가는’ 혹은 ‘인간에 다음 가는’ 종족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인간 중심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러니 죽일 듯이 노려볼 수밖에 없지. 선조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증오라는 건 그리 쉽게 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엘릭을 보는 메피스토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과연 네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하는 무시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군’이라는 기대가 섞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보죠, 뭐. 그래도 수인족도 종족마다 저희를 보는 시선이 조금씩 다 다른 것 같은데요?]

경계심이 많다고 알려진 묘인족은 자신들을 피하는 반면에, 서인족은 두려워하면서도 이따금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원래 수인족이라는 명칭부터가 너희들이 편하자고 뭉뚱그려 부르는 말에 불과하다. 저들은 모두 습성도, 문화도, 규율도 다 다른 이족(異族)이다. 저렇게 한데 뭉쳐 있는 것부터가 사실 잘못된 것이야.』

엘릭은 얼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궁금한 것이 있어서 가장 가깝게 있던 수인족 병사에게 물었다.

‘실수 안 하려면 일단 이 도시 내 세력 구도부터 파악해둬야겠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무엇이냐? 원래는 인간과 말을 섞는 것부터가 재수 없는 짓이지만, 어차피 곧 교수형에 처해질 테니 죽기 전에 한 가지 질문 정도는 대답해주마.”

엘릭은 ‘어이쿠, 무서워라’라며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이면서 놀란 척 떠는 연습을 했다.

수인족 병사는 엘릭이 정말 겁을 먹었다고 여겼는지 콧대가 저절로 높아졌다.

『…저딴 발연기에 넘어가다니. 이것들은 눈깔이 삐기라도 한 건가?』

메피스토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지만, 엘릭은 못 들은 척 무시하면서 물었다.

“저희는 앞으로 어디로 끌려가는 겁니까?”

“우리를 이끄시는 위대한 안트로모프의 왕께서 너희를 직접 심판하실 것이다.”

순간, 엘릭의 눈이 커졌다.

“…호왕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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