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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71화 (71/405)

71화

타버린 설원

제국은 그 국민조차 국명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만큼, 대륙에서 가장 큰 영토와 성세를 자랑한다.

그들이 닿아있는 땅은 모두 대륙에서도 알짜배기라 할 수 있는 곳들이었으니.

이로 인해 아인종을 비롯한 여러 종족은 원래 살던 터전을 떠나, 자꾸만 변방과 외지로 밀려나야 했다.

‘금역(禁域)’이라고 표현되는 지역이 아인종과 이민족들의 터전이 된 것도,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그들이 원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수인족이었다.

현재 수인족이 살고 있는 ‘흑의 설원’은 원래 사시사철 땅이 독으로 썩고, 숲이 악취를 풍기며, 수많은 몬스터… 아니, 그마저도 아래로 보는 온갖 마물(魔物)들이 들끓는 곳.

당연히 흑의 설원과 접하고 있는 북부 제국령은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전사라는 수인족과 마물들에 대한 공포가 상당할 수밖에 없었고.

제국은 이들의 남하를 막기 위해 거대한 높이의 성벽을 길게 쌓아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장벽’이었다.

“요즘 이 ‘너머’는 많이 시끄럽소. 그래도 넘어가시겠소?”

장벽은 흔히 황실친위군과 함께 제국 내에서 가장 군기가 엄격하다는 국경수비군이 맡고 있는바.

제112관문의 초소장도 카를이 내민 국경 통과 허가증을 확인하는 내내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시끄럽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카를은 초소장에게서 허가증을 돌려받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장벽 밖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게 없으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좋았다.

“말 그대로요.”

“…?”

“최근 들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너머’가 아주 많이 소란스럽소. 하루에도 몇 번씩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지…. 그 때문에 몇몇 관문과 초소들은 비상대기령이 떨어진 상태요.”

“그럼?”

“아마 지금 넘어가면 변을 당할 가능성이 아주 크단 뜻이지. 원래는 허가증이 있어도 절대 통과가 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마탑에서 인준하였고 네레스타 가에서 파견되었다고 하니 그냥 통과시켜 드리는 거요.”

“흠.”

카를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매일 같이 흑의 설원을 마주하고 있는 베테랑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짜’ 무슨 일이 있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혼자서라도 넘어가시겠다고 하겠지.’

문제는 이 일행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게 엘릭이라는 점이었다.

대체 장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설명해주진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분명 중요한 게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가셔야 하나 보군.”

“그렇습니다.”

“그럼 만약 위기가 발생한다면 근방에서 가장 높은 나무 기둥에 달라붙어 있으시오.”

“음? 그런 곳에 있으면 구조라도 하러 오는 겁니까?”

“아니. 그래야 우리가 시체를 찾기가 쉬울 테니까.”

“….”

카를은 이게 농담인가 아니면 진담인가 싶어 묘한 얼굴로 바라봤지만.

초소장은 양털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 * *

콰아아!

지면을 뚫고 나온 샌드웜은 간만에 발견한 먹이를 한입에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쩍 벌렸지만.

“【끝없는 불길】!”

퍼엉-

키에에엑!

웬만한 사람의 머리를 두세 개 합친 것만큼이나 큰 불덩이가 대신 작렬하자,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한 번 붙기 시작한 불길은 도저히 꺼지지 않더니, 결국 녀석이 축 눌어진 뒤에야 잠잠해지고 말았다.

“대체 언제까지 나타나는 거야? 도저히 갈 수가 있어야지.”

션은 기가 찬다는 투로 투덜거리면서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도저히 쉴 틈을 주지 않고 마물이 줄지어 나타나니, 이렇게 틈만 나면 메모라이즈를 해둬야 했다.

그 때문일까?

투덜거리는 내내 입에서는 입김이 뿜어나왔다.

“거기다 춥기는 또 왜 이렇게 추워? 아무리 북단이라고 해도 더워야 정상일 텐데. 이게 말이나 돼?”

일행은 장벽을 넘은 순간부터 매서운 추위를 맛봐야만 했다.

흑의 설원이 ‘설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진짜 눈밭이 펼쳐진 게 아니라, 온갖 독물 따위로 땅이 항상 시커멓게 죽어 있으니 그렇게 불리는 것뿐. 실제로는 메마르고 딱딱한 암석 사막에 가까웠다.

거기다 지금은 슬슬 무더위가 찾아오는 6월. 흑의 설원이 철저한 대륙성 기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초소장이 말했던 ‘이상한 소동’과도 관련이 있는 건지.

하여간 상황이 이래서는 어떻게 길을 개척하기도 힘들었다.

“개새끼. 대체 이런 곳에서 뭘 찾겠다는 거야?”

션은 뒤쪽에 있는 마차를 홱 하고 노려 보면서 인상을 구겼다.

자신에게 이런 모진 고생을 시키고도 여전히 마차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 엘릭을 보고 있으려니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오거스틴도 똑같이 마차 안에서 던지고 있었다.

“네가 말한 가문의 안배라는 것, 정말 이곳에 있는 것 맞느냐?”

엘릭은 요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끼니도 거의 거른 채, 가만히 얼음 조각을 허공에다 띄워놓고 사유에 깊게 잠겨 있었다.

처음에는 오거스틴 등도 엘릭이 새로운 마법 체계를 만들려 한다는 말에 응원도 해주고,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며 배려도 해줬지만.

지금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조금씩 말도 걸고 있었고.

그러다 오거스틴은 궁금해졌다.

제국이 그동안 그토록 개척을 해보려 노력해도 번번이 실패만 했고, 깊숙한 내지로 들어가면 9써클의 절대자인 그도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악명이 자자한 흑의 설원에서.

과연 대체 엘릭이 어떻게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를.

그런데.

“저야 모르죠.”

“…음?”

엘릭은 여전히 얼음 조각에 시선이 단단히 붙들린 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거스틴은 순간 자신이 나이를 먹어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옆에 있던 헤이즈를 돌아봤다.

헤이즈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단호한 어투로 나무랐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똑바로 말 안 할래?”

엘릭은 그제야 사유를 중단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오거스틴을 바라봤다.

손 위로 얼음 조각이 툭 떨어졌다.

『하여간 예의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놈이로고.』

[그래도 누구처럼 첫사랑한테 차여서 천년 넘도록 징징거린 적은 없습니다. 그거 엄청난 무례란 거 알아요? 상대방이 알면 식겁할걸요?]

『그러니까 네놈이 생각하는 그런 게 절대 아니래도!』

[아, 눼이눼이.]

『으아아! 본 왕이 대체 언제까지 이놈에게 이딴 수모를 겪어야 한단 말이냐아!』

엘릭은 관자놀이를 쥐어뜯으면서 길길이 날뛰는 메피스토를 무시하면서 말했다.

“사실… 되도록 말씀드리지는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고도 계속 숨긴다는 게 이상하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거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북방으로 간다는 말만 들었지, 애당초 정말 장벽까지 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처음 엘릭이 행선지가 흑의 설원이라고 말했을 때는 다들 얼마나 경악했던지.

“저는 ‘꽃의 신전’을 찾을 생각입니다.”

“…응? 설마 이 늙은이가 아는 그건 아닐 테지?”

“맞을걸요?”

“허!”

오거스틴은 잠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때,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헤이즈가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할아버지.”

“그래, 아가야.”

“죄송하지만 혹시 할아버지의 소중한 제자의 뚝배기를 이 자리에서 깨버려도 될까요?”

“제자는 무슨. 방금 의절한 것을.”

“그렇죠?”

헤이즈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른손에는 거대 해머가 들려 있었다.

엘릭도 누이의 그림자가 얼굴을 덮어버린 뒤에야 경각심을 느꼈다.

“…잠깐만. 누나?”

“네 머리부터 옆에 내려놓으면 내려놓을게.”

“그거 내 머리 날려버리겠단 뜻이잖아!”

“어머, 들켰네?”

“누나가 그럴 때마다 진짜 무섭거든?”

엘릭은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 오거스틴과 헤이즈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꽃의 신전’이란 것은 원래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으니까!

옛날 아주 먼 옛날,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인 오랜 옛날, 지금은 썩은 악취와 독기만 풀풀 날리는 흑의 설원은 원래 수많은 꽃이 만발하는 화원(花園)이었으니.

그곳에는 역시나 수많은 꽃의 신들이 있어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는 동화.

그리고 그런 꽃의 신들이 살았다고 알려진 곳이 바로 ‘꽃의 신전’이었다.

오거스틴과 헤이즈가 그렇게 진지하게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엘릭이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농담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진짜야. 거짓말이 아냐.”

엘릭이 애원하듯이 부르짖은 뒤에야 헤이즈의 걸음도 뚝 멈췄다.

“자세히 말해봐.”

“안 그래도 하려고 했어.”

엘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슬쩍 오거스틴을 돌아봤다.

사실 가문의 안배에 대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아직까지 그밖에 알지 못하는 고민거리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꽃의 신전은 진짜 실제로 있어. 가문에 남은 기록들 싹 다 확인해봤고, 황립도서관에 있는 자료들까지 교차 검증도 끝냈어.”

“허! 그것이 사실이라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학계가 깨나 떠들썩해지겠구나.”

오거스틴은 구미가 당긴다는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역시 마법사. 새로운 지식에 대한 탐구심은 아주 컸다.

“꽃의 신전이 정말 전래동화에 나오는 대로 진짜 신적인 존재들이 머물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안배와 관련된 장소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찾으러 가는 겁니다.”

엘릭은 헤이즈가 자리에 다시 조용히 앉는 것을 본 뒤에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누나.”

“왜?”

“혹시 지금이라도 고향 돌아갈 생각 없을까? 누나 하던 일도 도중에 그만두고 나온 거라고 했…!”

스윽!

“…지만, 그래도 역시 누나가 있어야 내 마음이 편하지. 이번 일 끝날 때까지 나 좀 도와주라. 하하하.”

엘릭은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눈가에 맺힌 것은 절대 눈물이 아닌 땀이라고.

그러다 메피스토가 헤이즈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괜히 시비를 걸고 싶었다.

[남의 집 누이는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봅니까?]

『네 누이를 계속 연구해보다 보면 본 왕도 언젠가 네놈에게 말싸움으로 엿을 먹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호구 중의 상 호구가 진지한 어투로 저렇게 말하다니.

엘릭은 간만에 서열 정리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동안 제가 너무 안 굴렸죠?]

『흥! 애교 지옥이나 묵언 수행이라도 시키려 그러느냐? 그게 해제되려면 아직 한 달은 더 남았느…!』

[【물구나무 서서】, 【춤춰라】.]

『무, 뭐? 아아악!』

메피스토는 갑자기 몸이 뒤집힌 채로 탭댄스를 추게 되자, 괴성을 꽥꽥 질러대고 말았다.

‘이제야 속이 좀 편안하군.’

엘릭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오거스틴이 물었다.

“그럼 꽃의 신전은 어디에 있는 것이더냐? 단순히 기록만 갖고 찾기에는 거의 불가능할 텐데.”

금역이 괜히 금역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위치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어 길을 잃고 실종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수인족을 찾을까 합니다.”

“수인족?”

“예. 꽃의 신전을 그들이 보호하고 있다는 기록도 있어서요. 확인 좀 해보려 합니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해도, 이런 곳에서 사는 유일한 지성체이니만큼 뭔가 알고 있을 것 같구요.”

“하지만 그들은 인간에 대한 원한이 아주 깊은데. 괜찮겠느냐?”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기고 흑의 설원으로 도망치다시피 했던 수인족의 이야기는 마법 학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극히 드물 정도였다.

“뭐, 수인족이라고 해서 다 같은 종족은 아니니 그들 내에서도 파벌이 갈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혹할 만한 것도 있습니다.”

“호오? 혹할 만한 것?”

오거스틴은 궁금해 죽겠다는 투로 눈을 반짝였고.

엘릭은 대답 대신에 씩 웃었다.

수인족은 절대 자신을 배척하지 못할 것이다.

엘릭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에게는 그들이 백 년 넘도록 되찾기를 바랐던 ‘힘’을 갖고 있었으니까.

옛 수인족들의 왕, 호왕의 기예였던 강체술.

그것이 있잖은가?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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