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장벽(長壁)
청사자 헤르만 바일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순간부터, 딸 이사벨과 함께 엘릭을 직접 만나기 위해 황도로 움직였다.
이동하는 내내 이사벨은 아버지의 병이 다시 나빠지는 게 아닌가 싶어 크게 걱정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오히려 골방에 계속 틀어박혀 있으려니 더 죽을 것 같더구나.”
헤르만은 오히려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몇 번이나 그런 딸을 달랬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황도로 이동하는 내내 실제로 하루가 다르게 계속 건강해지는 것이 보일 정도였으니.
언제부턴가 오러를 크게 뽑아도 힘들어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정말이지 신기하단 말이지.”
“뭐가요, 아버지?”
“아니. 그 메르빙거의 가주가 가르쳐주었다는 치료법 말이다.”
헤르만은 아직 전성기 시절의 5체인(Penta-Chain)까지 뽑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익스퍼트 이상의 힘까지는 찾은 듯 보였다.
“보다시피 오러가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느냐. 메르빙거 가주, 본인도 입마증과 비슷한 증상을 겪어서 치료법을 알고 있다고는 해도, 원래 무도가와 마법사 간에는 마력 운용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을 텐데도… 치료법이 내게 너무 잘 맞았단 말이지. 마치 내 증상을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 이사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씀은 그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신가요?”
“응? 허허!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냐? 그런 뜻이 전혀 아닌데. 음,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만큼 무도가와 마법사 간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오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
“그러니까 마나나 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높다는 뜻이란다. 그리고 사람 개개인이 갖고 있을 체질에 대해서도.”
“그러고 보니… 치료법을 말씀해주기 전에 아버지의 식습관이나 생활 습관에 대해서 이것저것 여쭤보긴 했었어요.”
“그래. 바로 그것이란다. 진단을 내리기 전에 상대의 체질을 먼저 파악하고, 거기에 알맞은 치료법을 내놓았단 뜻이지.”
이사벨은 헤르만의 설명을 듣는 내내 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명석한 그녀이니,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어쩐지.
이사벨은 그게 자신이 직접 칭찬을 들은 것처럼 마음 한편이 들떴다.
“천재… 네요.”
“천재지. 비단 마법뿐만 아니라 무도에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고, 체질이 가진 개별적 차이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 청년. 이런 사람이 어디 흔할까? 그리고 절맥증까지 나았다면서? 절맥증은 본래 마나의 축복이 너무 심한 나머지 하늘이 시기하여 내리는 병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니…!”
헤르만은 말을 잇는 내내 두 눈가에 열의가 충만했다.
“천재를 넘어선 천재일 게 분명하다. 마법만이 아니라, 무도에도… 검술에도 대단한 재능을 지녔을 게 분명하다.”
“…!”
헤르만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우리 가문은 그동안 몇 대에 걸쳐 청사자의 자리를 도맡아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후인을 두지 않았지. 다른 하나 있는 동생이라고는 내 목을 원하니, 어쩌면 좋을까?”
“아, 아버지 그, 그 말씀은?”
이사벨은 더 이상 자신이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헤르만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좋다는 듯, ‘쉿!’하고 엷게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검지를 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직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으니 더 말하지는 말려무나. 지금은 이 아비만이 가진 생각일 뿐이고, 상대도 아직 이렇다 할 의사를 말하지 않았으니.”
“…네, 네!”
이사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황도로 향하던 부녀에게 하나둘씩 사람이 붙었다.
젊은 시절 헤르만과 함께 세상이 좁다며 같이 떠돌아다녔고, 정의와 협행을 실천하던 ‘푸른 매’들이었다.
* * *
하지만 당연히 황도에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엘릭은 이미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엘릭 군이라면 이미 북방으로 갔습니다만.”
“북… 방이요?”
“예. 그곳에 볼일이 있다고 해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희에게도 자세한 건 말씀해주시지 않아서. 그런데 청사자의 영애께서 그를 왜 찾는 거죠?”
북방은 아주 넓다. 거기서 어떻게 엘릭을 찾아야 하나 싶던 이사벨은 자신을 곁눈질하는 타샤를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어쩐지 생선을 뺏길까 경계하는 고양이 같은 시선이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엘릭이 네레스타 가문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니, 수소문해보면 금방 찾을 거라 여기며 북방으로 향했고.
어쩌다 보니 그들은 뜻하지 않게 황태자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흐음!”
헤르만은 갑자기 팔짱을 낀 채로 콧김을 뜨겁게 뿜었다.
“이사벨, 형님이 왜 저러시냐? 갑자기 뭔가 단단히 심통이 나신 것 같은데?”
“형님도 참, 보고도 모르오? 사윗감 보러 가나 싶었는데, 갑자기 재수 없는 낯짝을 보게 되었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응? 황실과 무슨 일 있으셨나?”
“엥? 모르고 있었소?”
“무슨 일인데?”
헤르만의 의형제 중 그동안 세상사에 무관심했던 이들은 그제야 이사벨과 황태자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듣고 잔뜩 분개했다.
“뭣이! 황실이 정신이 헤까닥하기라도 했나!”
“우리 이사벨이 뭐가 모자라서 파혼이여! 얼굴이면 얼굴, 재지면 재지, 품성이면 품성! 빠진 게 하나도 없고만!”
“형님, 저 눈깔 삔 놈을 도와줄 필요가 있소?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갑…!”
“나는 기사다. 황실과 제국의 안녕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서약한 기사. 비록 불민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의무를 저버릴 수는 없다. 너희들은 기사가 아니니 빠져도 좋으니 물러나 있어라.”
헤르만은 그렇게 말하면서 검을 뽑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한순간 하늘에서부터 오러가 빗발치면서 마족들이 깡그리 쓸려나갔다.
마치 사자가 양 떼 사이로 뛰어들어 날뛰기라도 한 듯한 광경.
그만큼 헤르만이 상당한 힘을 되찾았다는 증거였다.
“…하여간 우리 큰형님, 참 고지식 하시단 말이지. 어째 그냥 모른 척하면 편할 것을, 꼭 저러신다니까.”
“그런 면모 때문에 우리가 형님에게 반해서 따랐던 것 아니오? 그만 투덜대고 도울 거면 빨리 도웁시다. 그래야 가던 길마저 갈 것 아니오.”
헤르만의 뒤를 이어 의형제들까지 전투에 뛰어드니, 전황은 단번에 감찰국 쪽으로 뒤집혔다.
푸른 매는 하나하나가 전부 최소 익스퍼트나 마스터 급에 다다른 고수들.
이미 일인군단(一人軍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전력들인 것이다.
“…흠.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보군. 어쩔 수 없지.”
유다는 더 이상 기습이 효과가 없다고 보이자, 망설이지 않고 즉각 퇴각 신호를 내렸다.
황태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만 해도 경고는 충분히 한 셈이니. 이 이상 전력을 손해 보는 것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헤르만과 푸른 매도 굳이 도망치는 녀석들을 뒤쫓지 않았다. 감찰국과 시위군도 혼란을 수습하기 바쁜 나머지 그럴 힘이 없어 보였다.
“고맙… 소.”
황태자는 헤르만과 만난 자리에서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황실에서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혼하고 난 뒤 처음으로 만난 자리가 하필이면 구명이었으니.
그는 차마 장인이 될 뻔했던 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냥 자존심이 상했다.
더군다나 황태자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이사벨…!’
그녀는 똑같이 헤르만의 옆에서 인사를 하면서도,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분노도 미련도 없었다.
그냥 무감각했다.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본 듯한 모습.
반갑다거나, 그동안 잘 지냈느냐는 듯한 인사도 없었다.
그래서 황태자는 자신이라도 말을 붙이려 했지만.
“크게 다치신 곳이 없으신 듯 보여 다행입니다, 전하. 제국의 신민이라면 응당 전하께서 안전하게 황도로 귀환하실 수 있도록 저희가 도와드려야 할 것이나, 이미 주변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으신 듯하니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헤르만은 그 전에 힘 있는 목소리로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군신의 예.
사자 중에서도 기사도 정신이 가장 강하다는 청사자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것이 거리를 유지하려는 헤르만의 의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텁텁한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래도 여전히 목소리에는 미련이 가득 남아있었다.
“…가던 길이 바쁜 듯하니 그러도록 하시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비밀이 아니라면 어디로 가던 길인지 여쭈어도 되겠소?”
헤르만은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황실과 감찰국에 굳이 숨길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엘릭 메르빙거를 찾고 있습니다.”
“…마도명문의 당대 가주 말이오?”
“잘 아시는지요?”
“그런 것은 아니나… 아니오. 워낙에 근래 들어 명성이 자자한 영웅이라 들어.”
황태자는 그렇게 떠나는 청사자 일행을 가만히 바라봐야만 했다. 이사벨은 그때까지도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잊지 않았다.
헤르만이 엘릭 메르빙거를 언급했을 때, 이사벨의 입가에 엷게 퍼지던 미소를.
그것이.
황태자의 가슴 속에 불을 지피고 말았다.
‘엘릭 메르빙거! 또 너란 말이지! 감히 내 여자에게 손을 대? 절대 용서치 않겠다!’
이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점들까지 더해져, 그의 마음속에는 엘릭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 * *
‘용해율이 올랐어.’
북방으로 다시 오르는 길.
엘릭은 치료가 모두 끝나고 난 뒤, 명상에 잠겨 있다 말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현재 마정석의 용해율은 14%.
단 몇 달 사이에 4%나 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마투술과 강체술을 익히면서 마력 효율성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최근 토템에서 인장 조각과 마기를 끌어모으면서 생긴 결과였다.
‘당장 인장은 새기지 못해도, 인장을 회수하거나 인장의 성취도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용해율은 꾸준히 올라간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해.’
엘릭은 인장이 더 늘지 않는 것이 선조들이 남긴 어떤 모종의 장치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인장을 너무 많이 새겨도 마력 운용에 있어 비효율적일 테니까.
흉포의 인장처럼 사념이 묻어 있어 반발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엘릭의 육체가 내용물인 인장을 수월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조금씩 조절 하는 것일 테지.
다행인 건, 그렇게 새기지 못하고 그냥 저장해두기만 해도, 성장에는 지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엘릭은 마력 순환에 한껏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건 아니야. 마력에만 기댈 수는 없으니까.’
이번에 카야와 일대일 전투를 치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단순히 ‘싸우는 방법’만 안다고 강해지는 건 아니다.
진짜 강해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내가 가진 것들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해.’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나만의 마법을 만들자.’
다른 마법사들이 들었다면, 다들 미쳤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는 결심이었다.
새로운 마법 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아니, 새로운 학파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릭도 그걸 몰라서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가전 마법, 언령, 인장, 흑마술, 마투술, 강체술… 거기다 앞으로 내가 습득할 것들이나 연구할 것들까지 합쳐지면, 정말 중구난방이 되기 일쑤일 거야.’
이와 비슷한 생각은 청연의 미궁에서도 이미 했던 것이니.
‘다행히 녹야의 마력 순환으로 아주 큰 틀은 전부 잡은 상태야. 여기에 세세한 부분들을 조정해나가면서 큰 흐름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틀어가면 되겠지.’
당연히 지금 당장 새로운 체계를 만들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러기엔 깨달음도 부족하고, 마법 실력도 모자라다. 아직 배울 것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준비해 둔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가장 먼저 개발할 마법들도 내정해둔 상태였다.
‘얼음 사슬, 얼음 화살, 얼어붙은 손길… 이것들부터 조금씩 손을 보자.’
엘릭이 그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거의 다 다르고 있었다.
저 멀리.
제국의 북방과 대륙의 ‘북단’을 경계 짓는다는 장벽(Great Wall)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