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장벽(長壁)
“…개판이로군.”
검은 장발. 싸늘한 눈.
아자젤의 추종 세력, ‘그리고리’의 차사인 유다는 폐허가 된 가롯 자작가의 저택을 보면서 기가 찬다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대제사장의 명령에 따라 다급하게 이곳으로 오긴 했다지만.
정말 그가 본 ‘계시’가 사실이 되어버릴 줄이야.
조직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계획이 어그러진 것도 문제였지만, 이곳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아직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건대, 상당한 숫자의 병력이 기습을 벌인 건 확실한데.
그 이상을 알 수 없단 점이었다.
“일단 왜 이렇게 되었는지부터 파악해야겠군.”
유다는 좋은 ‘재료’가 없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곧 시선이 어딘가에 멈추면서 차갑게 웃었다.
“마침 좋은 게 오는군.”
휘휘휘!
유다는 검은 바람이 되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곧 그가 있던 자리로,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대체 뭘 찾으라는 건지. 하아!”
감찰국 요원, 헬은 현장을 보면서 짜증 섞인 투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사 파트란이 그에게 새롭게 내린 명령은 외부에서 개입했다는 제3자에 대한 수색.
문제는 며칠째 사람을 동원해 뒤져봐도 이렇다 하게 발견되는 단서가 없다는 점이었다.
녀석들이 움직였을 거라고 추정되는 경로까지 싹 뒤져봐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이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다가 되돌아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
그래도 명령이 명령이니, 지푸라기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이곳에 다시 찾아온 거였다.
“이번엔 부디 뭐가 있으면 좋겠는데.”
헬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전에 발견해두었던 금고 밀실을 다시 파헤치려는데.
“뭐가 있긴 있지.”
“누…!”
헬은 귓가를 파고드는 담담한 목소리에 허리를 쭈뼛 세우다가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서부터 유다의 손가락이 튀어나오면서 머리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었으니까.
헬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차갑게 웃고 있는 유다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츠츠츠-
헬은 그대로 잘게 부서지면서 고스란히 유다에게로 흡수되었다.
마치 맛난 음식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유다는 느긋하게 헬을 먹어치우다가 한참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단 말이지?”
유다의 인장은 ‘소화(消化)’.
한 번 집어삼킨 것에 대해 기억을 일부 흡수하고, 능력도 조금씩 모방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유다는 헬이 갖고 있던 기억을 바탕으로 전후 사정을 전부 파악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제3자.
갑자기 금고에서 토템과 서류를 전부 훔쳐 갔다고 하는 자들.
하지만 유다가 알기로, 가롯 자작가에서 도주에 성공한 동족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카야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다른 아군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가 모르는 다른 내막이 있는 건지.
“자세한 건 좀 더 족쳐보면 알 수 있겠지.”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감찰국이 있었다.
유다의 신형이 다시 검은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 * *
짜아악!
코끼리 힘줄을 엮어 만든 채찍이 파트란의 뺨을 거칠게 후려갈겼다.
살점이 찢어지면서 피가 튀었다.
엄청 고통스러울 법도 한데, 파트란은 이를 악물기만 하고 있을 뿐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
“….”
오히려 자리에 있던 다른 요원들이며 시위군 병사들이 못 본 척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누구도 그 상황을 뜯어말릴 생각 따윈 하지 못했다.
그만큼 제라이츠 황태자는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한 번 더.”
물론,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신분인 그가 직접 손을 더럽힐 수는 없는 일.
요원, 요트가 황태자의 손을 대신하고 있었다.
짜아악!
요트는 직속 상사를 자신의 손으로 ‘벌’을 내린다는 사실에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이러지 않으면 자신이 대신 벌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한 번 더!”
짜아아악!
그렇게 몇 번을 갈겼을까.
파트란의 맨 얼굴은 완전히 뭉개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코는 내려앉았고, 한쪽 눈은 완전히 망가진 상태.
따로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완치는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그만.”
요트도 서서히 힘들어질 무렵에야 겨우 채찍질을 멈출 수 있었다.
뚝.
뚝.
파트란은 피가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서도 일절 찡그리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옆에 두었던 가면을 도로 얼굴에 썼다.
“전하의 아량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난 그대를 용서해준 적이 없다.”
“알고 있나이다.”
“치료는 허락지 않겠다. 오늘 입은 상처를 평생 간직하며 너의 죄가 무엇인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나이다.”
파트란은 양손을 바닥에다 짚으면서 머리를 지면에다 처박았다.
오체투지. 자신의 모든 충성은 그에게 바친다는 굴종의 자세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참이지?”
그들이 지난 몇 년간에 걸쳐 비밀리에 진행했던 계획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리도 지금쯤이면 감찰국에서 자신들의 턱 밑까지 쫓아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 더더욱 깊게 숨을 것이고.
4황자를 비롯한 다른 황위 계승자들도 시위군을 동원한 사실을 보고 받았을 테니, 즉각 어떤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아무 소득도 성과도 없이 적들의 경계만 사게 된 셈.
황태자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리와 관련하여 4국에서 파악한 정보는 가롯 자작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들을 일시에 들이쳐서 그리고리의 본단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겠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놈들도 바로 꼬리를 자르려 하지 않겠느냐?”
“아닐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이쪽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도 같은 시간대에 한꺼번에 들이쳤기 때문입니다.”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황태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파트란의 머리가 더 아래로 깊숙하게 가라앉았다.
“저 역시 오늘 아침에야 하달받은 정보였습니다.”
사실이었다.
-‘검은 토끼’를 잡는 동안, ‘토끼 사냥’을 시작하였다.
그것이 비밀리에 파트란에게 내려진 제4국의 지시서 내용이었다.
검은 토끼는 가롯 자작가를, 토끼는 파악된 그리고리의 모든 지부들을 의미하는바.
-새로운 사냥을 준비하고 있으라.
파트란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가장 주도적으로 활동한다고 믿고 있었던 자신은 사실 들러리에 불과했단 사실을.
“왜 내가 모르고 있었던 거지?”
황태자의 시선도 저절로 싸늘해졌다.
“저 역시 국장님과 차장님의 혜안을 짐작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예측하기로….”
“말하여도 좋다.”
“이중 작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중 작전?”
“예. 전하께서 오로지 이번 임무에만 집중하실 수 있게 쓸데없는 정보는 모두 차단하고, 모든 일에 대한 처리가 끝난 뒤에야 전하께 사정 설명을 드리고 모든 공을 드리려 하였을 것입니다.”
황태자가 가롯 자작가의 습격을 실패하더라도, 그리고리 지부의 대대적인 토벌에 성공한다면 작은 ‘작전 실수’에 불과하게 된다.
반대로 토벌이 전부 실패하더라도, 황태자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단순히 제4국이 저지른 실책이 되는 것이니. 황태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진다.
황태자는 그런 전말을 전부 눈치채고, 비교적 시선이 한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다른 작전은 전부 성공했단 말이로군?”
“그렇다고 합니다. 곧 전하께 따로 보고서를 상신할 것이란 전언을 받았습니다.”
“그럼 되었다.”
황태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여전히 엎드려 있는 파트란의 눈에 분노가 흘렀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은 황태자가 미끼였던 거겠지.’
파트란은 ‘토끼 사냥’이 동시에 이뤄졌다고 했지만, 실은 한 박자 늦게 진행되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황태자가 가롯 자작가에 들이쳐서 그리고리를 포함해 황실 내 정적들까지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게 한 뒤, 다른 지부들을 털어버리면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이다.
제4국이 모두 주도한 판이었던 셈이고, 황태자는 그 위에서 움직인 장기 말에 불과했던 셈이지만.
저 멍청한 황태자는 모든 게 잘 풀렸단 사실에 기뻐,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까지 그리 취급한 것이고….’
애당초 감찰국 요원이라는 직함은 한낱 상부가 움직이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파트란도 야망은 갖고 있을지언정 여태 거기에 대해 별다른 불만은 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쌓았던 모든 게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놀림까지 당해서 그런 걸까.
기분이, 아주 나빴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나만 모든 책임을 독박 쓰고 좌천되고 말겠지. 다른 방책을 생각해내야 한다.’
파트란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멍청한 끈을 계속 쥐고 있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콰콰쾅!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엄청난 크기의 화구가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기습이다!”
“마족이 기습을 해왔다!”
“시위군은 전원 진형을 갖추어라! 전하를 보호하라!”
척후가 내지른 고함과 함께 시위군이 허겁지겁 무기를 들고,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저 멀리, 상당수의 마족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시위군들을 빠른 속도로 처치하는 것이 보였다.
“이, 이게 무슨?”
“전하! 몸을 숨기셔야 합니다!”
여태 마족들을 공격할 생각만 했지, 공격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황태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파트란은 어쩌면 이것이 새로운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황태자의 손을 잡아끌면서 발치에 구르고 있던 검을 뽑았다.
채애애앵!
검이 거세게 울리면서 도중에 가로막혔다.
“제법이로군?”
황태자가 있던 자리로, 유다가 형상을 갖추면서 차갑게 웃었다.
황태자는 자신이 당할 뻔했단 사실에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계속 제법일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은데.”
“어사 파트란, 황실 인사를 시해하려 한 역적에게 처형을 집행하겠다.”
파트란은 주문과 함께 ‘제도’를 발동시키면서 거센 속도로 유다를 몰아붙였다.
채채채챙!
삽시간에 두 사람의 거센 충돌이 벌어지고.
“전하! 어서 이곳으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아, 알겠다!”
황태자는 호위 병력의 도움을 받아 허겁지겁 자리를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많은 마족이 동원된 건지, 그들의 숫자가 계속 불어나고 있었으니까.
결국 황태자는 얼마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도중에 퇴로가 막혀야만 했다.
“저기 있는 게 황태자인가 보군?”
“저 인간의 모가지만 들고 간다면, 새로운 인장을 주신다는 말씀이 진짜겠지?”
“차사님께서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으신가?”
“없지. 그러니 우리가 여기에 온 거잖나!”
다섯 명의 마족들이 낄낄 웃으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네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길을 함부로 막…!”
병사 중 한 명이 용기를 갖고 그들을 물리치려 했지만,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머리통이 분리된 채 바닥에 구르고 있었으니까.
“키키킥! 우리가 찐따라서 그런가 잘 안 들리는데?”
“야, 야. 너무 놀리지 마라. 우리 귀한 황태자 전하께서 많이 놀라시잖아?”
“아, 그런가? 이런 죄송하나이다, 전하.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뫼실 테니 같이 가시지요.”
녀석들의 노골적인 조롱에 황태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뭐라고 호통을 치고 싶어도 경각에 달한 위기감이 그의 목을 꽉 하고 옥죄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무는데.
쿠르르릉!
“감히- 누가 있어- 사자의 앞길을- 가로막는가-!”
마치 천둥이 울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사자후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오러가 소나기처럼 빗발쳤다.
콰콰콰콰-
기습해온 마족 중 상당수가 그대로 쓸려나갔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무용(武勇).
감찰국 요원, 시위군, 마족,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든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곳에 깃발이 크게 하늘에 나부끼고 있었다.
푸른색 바탕에 검을 문 사자의 문장.
“청사자! 청사자가 나타났다!”
전혀 예기치도 못한 청사자 헤르만 바일의 등장에 마족들이 당황해하는 동안.
황태자는 볼 수 있었다.
위풍당당하게 걷는 청사자의 옆.
그토록 꿈에 그리던 옛 정혼자가 서 있는 것을.
이사벨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