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장벽(長壁)
『분명하다. 저놈은 절대 정상이 아니야. 감히 만마를 다스리던 본 왕의 앞에서 저딴 말을 지껄인다니…!』
카야와 부딪치는 엘릭을 보면서.
메피스토는 미간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하나라도 더 많은 마를 축출할 수 있게 되어 메르빙거로서 기쁘다.
엘릭의 입장에서는 그 말이 아주 당연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메피스토에게는 배려하는 마음 따윈 전혀 없단 뜻이기도 했다.
엘릭이 아무리 오만하고 제멋대로라고 해도 과연 그것을 모를까?
메피스토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흔히 천재들은 일반인과 전혀 다른 감수성을 지녀 공감 요소가 적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엘릭은 션이라는 친한 친구를 옆에 두고 있다. 대외적으로 친분도 나쁘지 않다.
즉, 저 말은 다분히 의도적이란 의미였다.
비록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같이하고 있다지만, 선은 계속 확실하게 지키겠단 뜻이겠지.
메피스토는 그것이 메르빙거로서 아주 올바른 자세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본 왕도 마찬가지니라. 애송아.’
엘릭의 뒷모습을 보는 메피스토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콰아앙!
첫 충돌에서 카야를 힘껏 밀어내고 난 뒤.
엘릭이 느낀 감상은 간단했다.
“와우! 강한데?”
이미 감찰국 요원들에게 크게 다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카야의 마기는 제법 강렬했다.
폭압적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뜨거운 불을 품고 있는 것처럼 강렬하기까지 했다.
아자젤의 진명은 광기. 그런 놈을 숭배하는 만큼 마기의 성질도 그런 쪽을 닮은 것 같았다.
‘거기다 독취(毒臭)까지 있단 말이지? 이거 까딱하면 위험하겠는데.’
엘릭은 찌르르 저리는 왼팔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 모공을 통해 독이 파고들었다.
아주 극미한 소량이었기에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독효도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는 않았고, 체내에서 활동하기 전에 바짝 얼려두긴 했으니 아무 이상도 없었지만.
만약 눈치채지 못했다면, 독이 계속 누적되어 몸을 망가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역시 마족. 다양한 놈들이 있구나. 책으로 접했던 거랑은 완전히 달라.’
그래서일까?
‘재밌… 는데?’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냥 재미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이래서 선조들이 그렇게 마족 놈들을 때려잡으러 다니셨나?’
지금은 책자에만 기록되어 있지만, 메르빙거에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가문의 어른과 함께 마족을 사냥하러 가는 것.
성인식과 관련된 의식이기도 했다.
탕마가 가문의 유지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식으로 안전하게 실전 감각을 길러주기 위함이었는데….
엘릭은 바로 그런 전통을 지금 직접 체험해본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거저거 많이 시험해볼 수 있겠는데?’
엘릭의 눈이 호승심으로 빛났다.
그리고.
“웃어? 감히!”
카야는 직감적으로 엘릭이 자신을 두고 ‘실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저 면상을 찢어놔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화아아!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카야의 우측 어깨에 새겨진 인장이 화려한 빛을 토해냈다.
모든 모공이 활짝 열리면서 지독한 악취를 자랑하는 검은 매연이 확 하고 퍼졌다.
독 안개.
일정한 범위에 걸쳐 적을 중독시키려 할 때 그가 주로 사용하는 흑마술이었다.
키킥! 위험하군…?
“흡!”
엘릭은 흉포의 인장이 경고한 대로 재빨리 입가를 소매로 가리면서 간격을 벌렸다.
하지만 독 안개가 퍼지는 속도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라 순식간에 그 속에 갇혀버렸다.
휘휘휘!
“죽어라!”
카야가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비웃음을 던진 순간, 독 안개는 갑자기 와류를 그리면서 하늘 높이 치솟았다.
“【얼고】, 【돌아라】!”
까만 매연으로 시야도 가려지고, 와류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엘릭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냉기를 크게 흩뿌렸다.
따다다당!
까가가강-
그러자 독취 중 일부가 급속도로 얼어붙으면서 얼음 결정이 피어나고.
그것들은 엘릭의 의지에 따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와류에 거칠게 저항했다.
독취와 결정이 서로 간에 허공에서 충돌하면서 스파크가 튀었다. 독이 덕지덕지 묻은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와류는 엘릭에게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한 채 그렇게 찢겨나가다가.
“【퍼져라】.”
엘릭의 세심한 조작에 따라 폭발했다.
방향을 잃은 독취가 그대로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대지를 때리고, 허공을 아무렇게나 할퀴어댔다.
그리고.
“【뒤집혀라】.”
그것들은 도중에 방향을 저마다 다르게 꺾었다.
목표는 카야였다.
“이, 이게 무슨!”
카야는 당황하고 말았다.
저놈을 잡기 위해 발생시킨 마법이 도리어 시전자를 공격하고 있으니!
그로서는 엘릭이 심안을 통해 결을 직접 매만지고, 마정석의 막대한 마력으로 결의 방향을 강제로 꺾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으니 생긴 결과.
아니, 알 수 있다고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렇게 긴박한 순간에 마력장을 이만큼이나 직접 세밀하게 제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그야말로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고 평가받는 메르빙거이기에 해낼 수 있는 기예였다.
“【묶어라】.”
“흡!”
카야는 재빨리 뒤로 내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엘릭이 이미 눈치를 채고 다른 마법을 발동시켜버렸으니까.
촤르륵, 촤륵!
빙판에서 여러 개의 사슬이 일제히 튀어나오면서 순식간에 카야의 손발을 칭칭 감아버렸다.
하나같이 얼음 고리로 이뤄진 사슬들.
‘얼음 사슬’. 5써클에 해당하는 마법으로, 결박되는 순간 상대가 동상을 입게 만들어 구속력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엘릭은 여기다 마법을 한 가지 더 추가했다.
빙독(氷毒).
단순히 동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동사(凍死)하게 만든다는 독.
‘얼어붙은 손길’이었다.
“크아아악!”
카야는 가뜩이나 다 낫지 않았던 상처들이 바짝 얼었다가 터지면서 고통스러운 마당에, 빠른 속도로 체내에 냉기까지 파고들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콰콰콰!
거기다 뒤이어 독을 머금은 돌풍까지 휘몰아치자, 전신은 삽시간에 상처로 도배되고 말았다.
“헉, 헉, 허억…!”
내뱉는 숨결에는 새하얀 입김과 지독한 악취가 가득 풍겼다.
하지만.
“야. 그걸로 그렇게 아파하면 쓰냐?”
엘릭은 어느새 카야의 품으로 바짝 붙으면서 차갑게 웃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는데.”
쾅!
손바닥을 활짝 펼치면서 그대로 복부를 후려쳤다.
손바닥 자국이 낙인처럼 찍힌 채로, 카야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높이 붕 떠올랐다.
얼음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일제히 부서졌다.
얼음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운데.
새파래진 카야의 몸뚱이도 중력의 법칙을 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꿰뚫어라】.”
엘릭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얼음 화살을 무더기로 소환해서 녀석에게다 연달아 꽂아 넣었다.
부서진 손발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날개가 와르르 아래로 무너졌다.
바닥에 완전히 떨어졌을 때. 녀석은 이미 몸뚱이의 절반 이상이 전부 파괴된 뒤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반격을 가해보겠다면서 남아있던 ‘맹독의 발톱’을 있는 힘껏 엘릭에게로 휘둘렀지만.
촤아악!
엘릭은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공격을 피해내는 것과 동시에 ‘얼음칼’을 뽑아 녀석의 남은 손목을 댕강 잘라버렸다.
그야말로 동물적인 감각.
흉포의 인장이 한껏 예민하게 만들어주는 아귀감과 심안이 상대의 투로를 빠르게 예측하고, 강체술이 거기에 맞춰 몸을 반사적으로 움직여준 덕분이었다.
청연의 미궁에서 죽을힘을 다해 구르면서 얻은 전투 감각은 아주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카야의 몸에서는 치사량 이상의 피가 줄줄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숨통이 붙어있는 것은 마기가 뭉쳐져 만들어진 영체이기 때문이겠지.
“대, 대체 어, 어떻게 인간인 네가 설산왕의 이, 인장을…? 그리고 휼의 힘을 사용하는 거냐…!”
카야는 추위에 덜덜 떨면서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엘릭을 올려다봤다.
오랜 기억 속. 거룡 산맥을 지배했던 군주와 오랫동안 동부의 공포로 자리매김했던 마왕의 힘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마족의 힘을 인간이 사용한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엘릭이 인두겁을 쓴 동족인가 싶기도 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특히 인장을 사용하는 방식은 언령 마법인 것 같아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
하지만 엘릭은 녀석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는 듯, 얼음칼을 길쭉하게 뽑아 그대로 미간에다 박아 넣었다.
퍽!
파스스-
카야의 이마에 붉은 점이 생성되면서 머리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동시에 육체를 구성하고 있던 마기가 흩어지면서 고스란히 엘릭에게 흘러들었다.
“후우…!”
엘릭은 그것을 있는 힘껏 빨아들였다.
여전히 새로운 인장은 새겨지지 않았지만, 나중에 쓸 수 있도록 마정석 옆에다 한데 모아두었다.
그리고.
“으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모든 흡수가 끝났을 때, 엘릭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태껏 아무렇지 않던 피부가 삽시간에 단풍잎처럼 울긋불긋하게 변했다.
내뱉는 숨결에 단내가 섞이고, 미간도 고통으로 찌푸려져 있었다.
“괜찮으냐?”
어느새 옆에 다가온 오거스틴이 히죽 웃으면서 등에다 손길을 가져다 댔다.
화아아!
따스한 마력이 체내로 스며들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독기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헤이즈와 션도 다급하게 달려와 응급조치를 취한 뒤에야, 엘릭의 안색은 한결 편해졌다.
“…전혀요.”
“그래. 그렇게 보이는구나.”
겉보기엔 전투가 끝까지 엘릭이 카야를 압도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엘릭은 몇 번이나 위기의 순간을 가까스로 넘겨야만 했다.
“이놈들, 원래 이렇게 강합니까?”
독을 물리쳤다고 해도 전부 물리친 것은 아니었다.
엘릭은 싸우는 내내 시야가 흔들리고, 손발이 저려서 컨트롤 미스가 생기는 것을 겨우겨우 막아야 했다.
마지막에는 마나 로드까지 막혀서 얼음 사슬이 캔슬될 뻔하기도 했고.
카야가 조금이라도 더 버텼더라면, 승부는 뒤집혔을지도 몰랐다.
“강하지. 강하고말고. 우리가 가진 상식과는 전혀 다른 체계로 움직이는 것이 인외일진대.”
오거스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만약 녀석이 조금만 더 몸 상태가 온전했더라면, 너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운이 좋은 줄 알고, 더욱더 정진하여라.
오거스틴은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아뇨. 그건 아닙니다.”
“…음?”
“그래도 제가 이겼을걸요?”
엘릭의 뻔뻔한 대답에 오거스틴은 ‘허!’하고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문제는 엘릭이 오기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
“저니까요.”
오거스틴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아닌가.
문제는 엘릭이 저러니 어쩐지 신뢰가 간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어쩌면 엘릭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길 방법을 찾을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런 만용이 모두에게 통하는 건 아니었다.
짜아악!
“아악! 누나! 갑자기 왜 때려!”
“누나가 함부로 몸 굴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너는 어떻게 된 게 진짜!”
“아, 알았으니까, 그만 때려! 아악! 아프다고! 진짜 아파! 아아악!”
엘릭은 걱정에 가득 찬 누이의 매운 손길을 몇 번이나 온몸으로 맛봐야만 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