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북방으로
“마, 마, 막아라!”
얼음장처럼 빳빳하게 굳었던 마족들은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친 소리에 후다닥 마기를 개방하려 했다.
하지만.
“늦었어, 새끼들아. 【주저앉아라】.”
1층의 로비를 에워싸고 있던 눈보라가 무너진 바닥을 따라 그대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빙판이 깔리고, 얼음 가시가 곳곳에서 갑자기 치솟았다. 삽시간에 지하 3층은 얼음으로 뒤덮인 지옥이 되고 말았으니.
운 나쁘게 얼음 가시에 찔린 마족들이 내지르는 비명으로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엘릭은 곧장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죽어!”
흉악한 인상을 가진 마족이 손톱을 바짝 세우면서 엘릭에게로 거칠게 휘둘렀지만.
“【무장 개방】.”
마투술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아귀감이 저절로 일어나면서 심안과 한껏 뒤섞였다.
‘우측 대각선!’
엘릭은 아귀감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허공에서 몸을 한껏 비틀었다.
그러자 마족의 손톱이 아주 아슬아슬하게 엘릭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고.
“너희처럼 엑스트라 같은 새끼들은.”
엘릭은 착지하자마자 오른쪽 다리로 바닥을 쓸었다.
“왜 이렇게 하나같이 특색이란 게 없냐?”
역시나 아귀감이 가르쳐준 방향.
그리고 강체술을 익히면서 단련했던 무예 동작이 섞여 있었다.
빠아악!
“크아악!”
마족은 마치 수인족을 연상케 하는 엘릭의 기민한 동작에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거기다 각력은 왜 그리도 센지, 무릎 아래 정강이뼈가 그대로 박살 난 것 같아 끔찍하게 아팠다.
하지만 녀석의 고통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 전에 의식이 끊어지고 말았으니까.
“시끄러우니까 이거나 처먹고 입 좀 다물지?”
퍼억!
엘릭은 바닥에 쓰러졌던 놈의 주둥이에다 얼음 화살을 직접 쑤셔 넣어주면서 차갑게 웃었다.
놈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파스스-
그대로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잘게 부서지고 말았다.
츠츠츠!
그리고 그 가루들은 일제히 흉포의 인장이 끄집어 올린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흉포의 인장 속 사념이 그럭저럭 괜찮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역시 녀석이 나서서 삼킨 것이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인장은 꽤 많이 흡수했는데, 왜 그대로인 거지?’
한순간, 엘릭은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쳐들어오고 나서 꽤 많은 마족을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손등과 팔뚝에는 다른 인장이 더 새겨지지 않고 있었다.
흉포의 인장이 인장과 마기의 대부분을 흡수하긴 했다지만, 전부 삼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흉포의 인장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종류는 따로 있는 건지, 갈수록 편식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면 녀석이 먹지 않은 인장은 그대로 새겨져야 하는데… 그러질 않으니.
‘나중에 따로 확인해봐야겠는데.’
엘릭은 어쩌면 안배와 어떤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지하 2층에 있는 마족들은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은 방금 죽은 녀석이 있던 자리를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아까 죽은 놈이 간부이기라도 했나?’
어쩐지 다른 놈들보다 제법 세더라니.
‘물론, 날 어떻게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엘릭은 내심 마음 한편에서 차오르는 뽕(?)에 한껏 자아도취하고 있었다.
“안 오냐? 그럼.”
그렇기에 엘릭은 다시 한번 더 냉혹의 인장을 더 크게 터뜨릴 수 있었다.
“내가 가지.”
쾅!
쩌저저적!
지면을 거세게 찍으면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어, 어어? 기, 기울어진다아!”
“으아악!”
빙판을 따라 균열이 삽시간에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겨우겨우 자세를 지탱하고 있던 마족들이 일제히 균형을 잃고 허우적댔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고, 균열 안쪽으로 발이 빠지는 등, 움직임에 큰 방해를 느낀 순간.
퍼퍼퍼퍽!
얼음 화살은 여지없이 그런 놈들의 목젖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마족들의 머리통이 줄줄이 박살나면서 피와 뇌수가 줄줄이 쏟아졌다. 새하얗고 투명하던 얼음 지대가 하나같이 붉은 꽃으로 뒤덮였다.
“그, 그, 그, 금고를 사수해라!”
“뒈지더라도 저놈 막으라고, 새끼들아!”
“거기구나?”
그리고 엘릭은 우왕좌왕하는 마족들을 보면서 원하던 대로 토템이 보관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혼란 중에도 어떻게든 보물을 지키기 위해 뛰어다니는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만큼 정확한 것도 없을 테니까.
결국 엘릭은 가로막던 녀석들을 차례로 베어내면서 단숨에 금고까지 다다를 수 있었으니.
“【터져라】.”
굳게 닫혀 있던 금고 문도 꽁꽁 얼렸다가 힘껏 부숴버리니 아주 쉽게 열 수 있었다.
안쪽에는 30여 개의 토템과 상당한 양의 서류들, 그리고 소량의 금은보화들이 담겨 있었다.
“빙고.”
엘릭의 입꼬리가 귓가에 걸렸다.
보아하니 토템은 상부에다 상납이라도 하려 했던 건지 생기가 꽉꽉 채워져 있다 못해 아예 인장의 조각까지 들어 있었고.
서류더미는 그동안 놈들이 받았던 지시 사항서들, 그리고 금은보화는 활동비로 주어진 것들 같았다.
감찰국이 본다면 두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을 완벽한 증거들.
‘내가 대가리에 화살이라도 맞았냐? 이런 걸 내가 왜 줘?’
파트란 등이 하던 짓이 재수 없기도 했지만, 애당초 엘릭에게 황실은 절대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는 족속들이었다.
자신들이 필요할 때나 마도명문이니 대마전쟁의 영웅이니 하면서 추켜세울 뿐이지, 정작 평상시에는 방치하다 못해 오히려 몰락을 조장하기까지 했던 놈들이었다.
‘내가 쓸 건 쓰고, 필요 없는 건 아주 비싸게 팔아주지.’
엘릭이 금고 안쪽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약속, 지켜라! 안 그럼 앞으로 거래 따윈 없을 줄 알아!』
메피스토가 다급한 어조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리부리하게 뜬 눈을 보니, 아무래도 이번에도 토템을 전부 흉포의 인장에다 던져줬다간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흉포의 인장, 꽤 많이 커졌는데. 조금만 더 먹이면 ‘진화’인지 뭔지 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으려나.’
사실 엘릭은 마음 한편에 실수인 척하고 흉포의 인장을 더 키워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차후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언령을 발동했다.
“【담겨라】. 그리고 【흡수되어라】.”
엘릭은 떠나기 전에 오거스틴이 특별히 던져주었던 마도구 ‘아공간 주머니’를 활짝 열어 서류와 금은보화를 싹 쓸어 담는 한편.
오른손은 활짝 펼쳐서 토템의 마기와 인장 조각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화아아-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림자가 금고 안쪽으로 파고들었지만.
터엉!
그림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을 만난 것처럼 입구쯤에서 크게 튕겨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림자가 잔뜩 벌어지면서 톱니 이빨이 훤히 드러났다. 마왕 휼의 사념이 엘릭에게 적의를 띠었다.
하지만.
“아가리 닥치고 들어가지?”
엘릭은 오히려 그런 놈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사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제어를 벗어나 흉포의 인장이 멋대로 활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습득한 인장이고, 빠르게 성장을 하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 둔 것일 뿐이지만.
만약 인장이 주인인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며 멋대로 구는 일개 기생충에 불과하다면 그냥 적출해 버릴 생각도 있었다.
물론, 그랬다간 마왕 휼과 경쟁을 하고 싶어 하는 오거스틴이 길길이 날뛸 것이다.
하지만 엘릭으로서는 아무리 날이 잘 든 무기를 가질 수 있다고 해도, 그 무기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면 절대 옆에 둘 생각 따윈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은 인외의 천적이라고까지 불리던 메르빙거의 당대 가주가 아니던가.
이제는 마왕은커녕 아귀밖에 되지 않을 사념 따위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쪽팔릴 일이지. 메피도 나한테 함부로 못 하고 있구만. 끗발이 떨어져도 한참이나 떨어지는 새끼가 어디서 개겨?’
메피스토가 엘릭의 생각을 읽었다면 자신이 언제 그랬냐며 길길이 날뛸 테지만, 엘릭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엘릭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휼의 사념은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아직은, 어쩔 수 없군.
곧 얌전히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여전히 말투 속에는 잔잔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엘릭은 그것만으로도 녀석이 더 이상 함부로 날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츠츠츠-
덕분에 토템 속 마기와 인장의 조각들은 속속들이 손끝으로 빨려 들어왔다.
『하하하! 마기, 마기가 들어오는구나! 드디어 그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아자젤 놈의 인장을 훔쳐볼…! 음?』
메피스토는 파안대소를 터뜨리다 말고 도중에 말을 뚝 그치면서 미간을 찌푸려야만 했다.
분명히 빠른 속도로 착실하게 토템을 흡수하고는 있는데… 이상하게 여전히 아무것도 원죄의 인장으로 흘러오진 않았다.
그러다 메피스토는 엘릭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면서 사악하게 웃고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감찰국과 마족 잔당을 통째로 뒤통수치겠다면서 보일 때 보였던 것과 똑같은 미소였다.
『네 이놈! 대체 또 뭘 하려고!』
[내놔요.]
『뭘!』
[트리거에 대한 정보, 먼저 내놓으라구요. 안 그럼 못 줘요.]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먼저 줘야 본 왕도 줄…!』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
『사내가 되어 두말할 셈이냐!』
[싫음 말던가.]
『썅!』
메피스토는 다시 욕지기를 내뱉어야만 했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엘릭의 호구였다.
* * *
“뭣이? 감찰국 요원들이 지하 금고를 찾았다고?”
수엔 가롯은 난데없이 수하가 올린 보고에 기겁하고 말았다.
“그놈들이 대체 거길 어떻게 알고…!”
지하 금고는 그동안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숨겨져 있었다.
보안도 아주 철저하게 이뤄지고 있는바.
출입 자격을 갖춘 자들부터가 일단 자신이 특별하게 아끼는 측근이거나, 조직에서 보내준 고위 인사 몇몇이 전부였다.
그래서 사실상 저택을 감찰국에 내어준다고 해도, 나중에 몰래 찾아올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그런 곳이 털리고 있다니!
“시간이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수엔 가롯은 당장이라도 금고가 있는 지하 3층으로 달려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수하의 애타는 만류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첩자! 조직 안에 첩자가 있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허망하게 들킬 리가…!”
“감찰국이 곧 저택을 전부 둘러칠 겁니다! 어서 서두르십시오!”
“제기랄!”
본부에서 출발했다던 차사만 하루빨리 출발했더라면…!
그랬다면 이딴 참상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미련을 가져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차후에 징계를 먹더라도 일단 몸부터 내뺄 생각이었다.
일단 살아남아야 훗날이라도 기약할 수 있지 않겠나.
“감찰국, 감찰국! 난 너희들이 너무나 싫다! 증오스럽다!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를 죽이기만 하려는 너희들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다 죽여버리고 싶을 뿐이다! 언젠가! 언젠가 너희들을 모조리 내 손으로 찢어 죽여버리고 말겠다!”
수엔 가롯은 울분을 터뜨리면서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콰아아앙!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거친 폭발이 일어나면서 그가 있던 방의 벽면이 통째로 터져나가고.
하늘에서부터 요원 다섯이 아주 민첩하게 내부로 침입을 시도했다.
마치 어둠 속을 유영하는 그림자처럼, 요원들은 폭발에 혼비백산하던 마족들을 재빠르게 제거하면서 목표였던 수엔 가롯에게까지 다다랐다.
콰르릉-
하지만 그들은 갑자기 터져 나오는 마기 파문(波紋)에 다시 간격을 벌려야만 했으니.
오로지 한 사람만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가르고서, 어느새 마족으로 변화를 마친 수엔 가롯과 충돌할 수 있었다.
채애앵!
요원이 휘두른 검이 날카로운 발톱에 가로막혔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수엔 가롯이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렸다.
“…파트란!”
“수엔 가롯이 누군가 했더니. 너였나, 카야?”
까만 가면 아래, 파트란의 눈꼬리가 크게 비틀렸다.
“잘 되었군. 매번 쥐새끼처럼 도망치던 걸 이제야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조직에 첩자를 심은 것으로도 모자라, 금고까지 갉아 먹은 놈들이 대체 누가 쥐새끼라는 것이냐!”
금고?
파트란은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뭐, 손발 다 잘라 놓고 심문하면 알아서 술술 불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곧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들고 있던 검 끝에 오러가 또렷하게 맺혔다.
“어사(御史) 파트란, 지금부터 제국과 황실과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역적 카야에 대한 처형을 집행하겠다.”
“헛소리! 너야말로 여기서 죽여주마!”
수엔 가롯, 아니, 마족 카야는 마치 자신을 다 잡은 사냥감처럼 취급하는 파트란에게 일갈을 터뜨리면서 인장을 발동시켰다.
쿠쿠쿠…!
마력과 마기의 충돌로 저택이 금세 내려앉을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