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북방으로
엘릭이 노리는 바는 간단했다.
-마족 잔당들과 감찰국 요원들이 아웅다웅하는 동안, 어부지리를 취합시다!
정확하게는 가롯 자작의 저택 어딘가에 남아있을 토템을 전부 몰래 꿀꺽하자는 소리였다.
그것만 해도 엘릭에게는 상당한 소득이었으니까.
처음 이 계획을 꺼냈을 때, 일행들의 반응은 아주 다양했다.
오거스틴과 길리티는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하며 무릎을 탁 쳤고, 션과 카를은 ‘또 저놈이 사고를 치는구나’하는 생각에 손으로 얼굴을 덮어야만 했다.
헤이즈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여전히 자신의 잔소리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고.
하지만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찰국이 엘릭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상대가 죄 없는 민간인들을 희생시키려 했던 마족 잔당이었으니, 더더욱 이용해 먹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럼 나와 길리티가 망을 보는 동안, 너와 헤이즈, 션이 몰래 숨어서 토템을 쓸어온다는 말이렷다?”
“예.”
오거스틴이 던진 물음에 엘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거스틴이 히죽 웃었다.
“하지만 마족들이고 감찰국이고 그리 만만한 놈들은 아닐 텐데? 이 스승이 진짜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같이 뛰어들 수 있다!”
길리티는 뜨거운 콧김을 마구 뿜어대면서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기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거스틴의 말마따나 사실 일이 그리 순조롭게 풀릴 거란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파트란… 그 사람은 못해도 부장급 인사는 될 테니까. 확실히 지금 당장 내가 정면에서 부딪치기에는 위험해.’
엘릭이 파트란의 위압을 꺾을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가문의 배경과 오거스틴 등의 도움이 있어서일 뿐.
파트란이 황태자의 수행원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만큼 감찰국 내에서도 고위 인사란 뜻이었다.
마탑으로 치면 최소 7써클 대마도사에 해당하는 실력자….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거기다 마족들의 실력도 약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토템이 가진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위험하겠지. 저들 중에 나보다 하수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해.’
그러니 오거스틴과 길리티가 도와준다는 말은 그만큼 무게가 무거웠다.
하지만.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하긴 한데… 괜찮습니다.”
오거스틴이 묘한 미소를 띠었다.
“어째서?”
“제 일이니까요.”
“호오?”
“그리고 도움을 크게 받으면 그만큼 페널티가 있을 것 같아서요. 망을 봐주신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오거스틴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익살맞게 웃었다.
“페널티라면 페널티이긴 하지. 이 늙은이가 나서게 된다면 강의를 도중에 중단하려 했으니까.”
“그럴 줄 알았습니다.”
엘릭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마투술은 거듭 실전을 겪어야만 발전할 수 있는 학문이다. 입문부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시험을 주었던 것부터가 그렇지 않던가.
그러니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어도, 스승의 실력에 기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축하한다. 방금 여섯 번째 시험을 통과했구나.”
“…갖다 붙이시긴. 하여간 다녀오겠습니다.”
엘릭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가볍게 투덜거리고는 앞으로 튀어 나갔다. 션과 헤이즈도 다녀오겠다며 꾸벅 목례를 취하고 뒤를 따랐다.
그들은 어느새 얼굴에 감찰국 요원들과 똑같은 새카만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가면이었지만, 날이 어두워서 그런지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오거스틴이 가볍게 중얼거렸다.
“정말인데. 흐흐!”
과연 엘릭은 알기나 할까?
녹야의 입문 시험은 완전한 졸업 때까지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한 번이라도 실격한다면 바로 전승자의 자격이 박탈당한다는 것을 말이다.
오거스틴은 엘릭이 그런 사실을 몰라도, 본능적으로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제자는 학파가 세워진 이래 들어온 최고의 천재였으니까.
* * *
콰르릉!
감찰국의 공세는 폭격(爆擊)부터 시작되었다.
화염계 마법을 수도 없이 퍼부어 영지를 잿더미로 만들고, 마지막에 지상군을 투입하여 남은 잔당들을 쓸어내는 것.
그것이 감찰국이 ‘반란 세력’이라고 낙인찍은 대상을 토벌하는 방식이었다.
쿠쿠쿠쿠!
그 때문에 가롯 자작가의 영지는 삽시간에 초토화되고 있었다.
“사람 살려!”
“아인 아버지, 아인 아버지! 정신 차려! 왜 이러는 거야!”
“왜, 왜 갑자기 우리에게 이런 일이…?”
“시위군이 왜 우리 마을을 공격하냐고! 대체 왜!”
마을 사람들은 하나 같이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시골 마을이 아니었나.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터지고 말았으니,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콰쾅, 콰콰쾅!
하지만 감찰국은 그런 영지민들의 사정 따윈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화염계 마법을 계속 쏟아내고 있었다.
영지 밖으로 도망치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이미 주변 일대는 시위군들로 포위망이 촘촘하게 세워진 상태였으니.
울며불며 통사정해도 철벽처럼 서 있는 병사들은 절대 영지민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이따금 무기를 가져와 저항이라도 하려면 창칼에 찔려 사살되고 말았다.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따로 필요 없을 혼란 상황 속에서.
“…나는 뭘 하면 되는 거지?”
션은 엘릭, 헤이즈와 함께 자작의 저택으로 달리다 말고, 인상을 굳히면서 엘릭을 돌아봤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토템을 읽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너랑 누나는 방해꾼들을 치워줘.”
쉽게 말해 보디가드를 하면 된다는 말.
션은 다른 할 일은 없냐고 물으려다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더 나가는 건 주제넘은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계획이 어그러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살려 달라 비는 영지민들에게 고정된 시선은 도저히 떨어질 줄 몰랐다.
“션.”
“…왜?”
“저기 있는 사람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선량한 사람들 아니야.”
“그게 무슨…?”
션은 엘릭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좁혔지만, 이미 엘릭은 어느새 저택에 도착하고 있었다.
“【쏟아져라】!”
냉혹의 인장을 발동하는 순간, 그의 앞으로 무수히 많은 얼음 화살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흔히 알려진 얼음 화살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단단한 화살들.
숫자도 이전보다 훨씬 많았다.
청연의 미궁에서 이뤄낸 수련 성과가 드디어 처음으로 빛을 본 것이다.
콰콰쾅!
차라리 소낙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많은 얼음 화살들이 저택의 지붕과 벽을 두들겼다.
와르르, 쿠르르!
결국 한쪽 벽이 폭삭 무너지고.
“이, 이게 무슨…?”
“가, 감찰국이 벌써 여기까지?”
저택 안쪽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던 가솔들은 전부 식겁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엘릭 등은 감찰국과 닮은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 오해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것들 전부 마족인데? 하하!』
메피스토는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비록 인두겁을 쓰고 있다지만, 그의 예리한 눈까지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나 같이 아자젤을 닮은 마기를 품고 있는 게 보였다.
메피스토에게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다.
콰콰콰!
퍼퍼펑-
엘릭은 별다른 말 없이 다짜고짜 녀석들에게 얼음 화살을 퍼부었다.
녀석들이 마족인 걸 안 이상, 굳이 대화를 섞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크악!”
“젠장! 내 팔! 내 팔이…!”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죽여주마!”
감찰국이 ‘사형’을 시작하면 인근의 생명체는 전부 죽고 만다. 마족들은 그렇게 판단하고,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일제히 마기를 개방했다.
육체가 뒤틀리고,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는 등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죽어라, 인간!”
그중 엘릭과 가장 가까이 있던 녀석이 박쥐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와락 달려들었다.
웬만한 인간의 머리통쯤은 쉽게 뽑아버릴 것 같은 힘이 풍겼지만.
“【휘몰아쳐라】.”
엘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냉혹의 인장에다 마력을 더 한껏 쏟아부었다.
그러자 얼음 화살이 부서지면서 바닥에 쏟아졌던 얼음 조각들이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천장까지 치솟았다.
‘얼음 회오리’. 4써클에 해당하는 기본 마법이었지만, 마정석의 마력이 한껏 들어간 만큼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회오리 속에 갇힌 마족이 그대로 갈려 나가고 말았으니까.
마치 믹서에 넣어진 야채처럼 시체조차 온전하게 남기지 못한 모습에 다른 마족들의 인상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형편없는 맛일 테지만….
그래도 먹지 않는 것보단 훨씬 낫겠지.
더군다나 흉포의 인장이 발동되면서 엘릭의 그림자가 꿈틀대고, 끝내 죽은 마족의 마기까지 전부 먹어 치우고 말았으니!
마족이 아닌 인간이 마기와 인장을 먹어 치우는 이상 현상에 마족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원래 미지(未知)라는 것은 그들을 존재케 하는 근간이 되건만. 오히려 그들이 이해 못 할 상황이 되니 패닉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엘릭은 바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몰아치고】, 【또 몰아쳐라】.”
얼음 회오리가 삽시간에 범위를 여러 배로 확장하면서 마족들을 쓸어내고.
[여기 있는 놈들, 거의 마족들이 대부분이야. 진짜 인간도 섞여 있긴 하지만 그들은 전부 도망치고 있으니까, 덤비는 놈들만 쳐내면 돼.]
엘릭의 지시에 따라, 션과 헤이즈도 건물 내부로 뛰어들었다.
특히 션의 두 눈은 분노로 일렁거렸다.
“개새끼들…!”
그가 보는 이들이 전부 선량한 사람은 아니라던 엘릭의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으니까.
네레스타 가문의 특기는 바람. 미리 메모라이즈 해뒀던 ‘칼바람’이 잇달아 쏟아지면서 마족들의 손발이 뭉떵뭉떵 썰려 나갔고.
퍼퍼퍽!
헤이즈는 슬렛지 해머를 가볍게 뽑아 마족들이 달려드는 족족 피떡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머리통만 골라 부셔대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생력을 지닌 마족이라고 해도 즉사할 수밖에 없는 위력.
“나쁜 악당들은 일단 뚝배기부터 다 깨버려야지. 안 그래?”
피바다 위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헤이즈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도, 도대체 이놈들은…!”
상황이 그렇게 되자 당혹스러운 건, 가롯 자작가의 마족들이었다.
그들도 최전선에서 뛰어다니는 만큼 제법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건만.
이들 세 인간 연놈들에게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대로는 정말 감찰국이 저택을 금세 장악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위기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엘릭이 심안을 활짝 연 채로 저택 내부를 빠르게 훑으면서 사기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랏, 메이더! 너로 정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메피스토는 이제 아예 대놓고 레이더 취급하는 엘릭에게 짜증이 났지만, 도저히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으! 하여간 조금 전에 했던 약속 꼭 지켜라! 이번에 습득한 아자젤의 마기와 인장은 반드시 본 왕의 것이다! 알겠느냐!』
엘릭이 던진 당근이 맛있어 보여도 너무 맛있어 보였다!
[알았으니까 걱정 말라니까요! 대체 몇 번을 묻는 겁니까? 이제 마기 골라서 흡수하는 방법 아니까 빨리 찾아요! 다른 놈들 오기 전에!]
『젠장! 매번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본 왕의 처지가 불쌍할 따름이도다!』
메피스토는 신세 한탄을 하면서 빠르게 내부를 훑었고.
『지하! 3층!』
[오케이! 접수 완료!]
엘릭은 마력을 있는 힘껏 뽑아 올리면서 양 손바닥에 모았다. 성에가 잔뜩 끼고, 한풍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다 내리찍었다.
“【터지고】, 【또 터져라】!”
삽시간에 바닥에 빙판이 깔리고, 폭발했다.
콰콰콰쾅!
메피스토가 말했던 지하 3층까지 수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생성되고 말았다.
구조상 외부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도록 설계된 암실.
그곳에서 주요 서류와 마도구들을 바쁘게 정리하고 있던 마족들이 황망한 얼굴이 되어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