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북방으로
처음에는 엘릭을 이쪽으로 회유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떠오르는 샛별, 라센트의 영웅이자 마도명문의 당대 가주, 그리고 ‘별의 마도사’ 우스던 메르빙거의 손자가 황태자를 지지한다?
이보다 아름다운 그림은 절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엘릭을 직접 만나고 난 뒤, 파트란은 그런 생각을 아예 접었다.
감찰국에서 직접 파악했던 것보다 엘릭과 네레스타 가문 간의 연결이 훨씬 끈끈했으니까.
‘지난 역사 동안 마도명문과 마탑 간의 거리를 고려해본다면 절대 가까울 수 없을 거라 여겼었는데… 그게 오산이었던 셈이지.’
감찰국과 마탑의 관계는 좋다고는 절대 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마탑과 사자공가가 벌이고 있는 신경전에 비하면 낫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감찰국에 있어서 마탑은 눈엣가시였다.
더군다나.
더 깊게 파고들자면, 감찰국의 입장에서 마도명문은 마탑보다 더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마도명문이 대마전쟁 때 보인 활약이 오죽 대단했던가?
그 때문에 우스던 메르빙거의 이름은 백성들 사이에서 거의 신격화되다시피 한 상황.
감찰국은 황실 인사가 아닌 다른 영웅 숭배가 벌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아니, 황실 인사라고 해도 황제가 아니라면 반드시 쳐내려고 한다.
그러니 엘릭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건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를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전하께서도 연적으로 생각하는 작자를 옆에 둘 생각도 없으실 테고.’
파트란이 ‘황태자와 엘릭이 태생부터 악연인 것 같다’는 생각이 괜히 든 게 아닌 셈이었다.
‘그러니 놈이 더 커지기 전에 반드시 찍어내야만 한다.’
이만한 사안을 국장이나 부장의 허락 없이 사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자칫 위험을 부를 수도 있었지만.
파트란은 ‘황태자를 위한 충성’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지로 전부 덮어버렸다.
‘이번 일이 잘 풀린다면,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 몸을 다르게 봐주실지도 모르고…!’
파트란은 마른 입술을 붉은 혀로 축였다.
‘그러고 보니 1부장이 지난 실수로 좌천되었다고 했었지? 어쩌면 이번 일로 실수들을 전부 덮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자리가 내 것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아니, 제4국장 자리가 내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의 신분은 4국의 2부장.
하지만 그의 야망은 여기서 멈출 생각 따윈 없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황태자의 심복이 되어 요원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을 ‘양지’에서 입신양명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한편.
‘이놈도 똑같군.’
제라이츠 황태자는 그런 파트란의 속내를 이미 눈치를 챘으면서도 모른 척 눈감았다.
굳이 자신을 지지하는 제4국이 아니더라도, 감찰국에서 이런 작자들은 아주 많았으니까.
그는 그런 이들을 도구처럼 편하게 부려먹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그냥 버리면 되었다.
그래서 황태자는 파트란이 앞으로 어떻게 나서려는 건지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을 보니, 무언가 괜찮은 계획을 획책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 전에… 놈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여기 온 목적부터 완수해야겠지.’
황태자는 마음 한편에 남아있던 이사벨에 대한 미련을 잠시 억눌렀다.
사랑을 버리고 선택한 자리다. 어떻게든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걸 거머쥐었을 때! 황위를 완전히 내 손에 넣었을 때, 당신을 다시 찾아갈 것이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이사벨.’
황태자는 주먹을 와락 쥐었다.
물론, 그사이에 이사벨에게 다른 연인이나 부군이 생겼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떤가?
황제만 될 수 있다면 그깟 놈들 따윈 몇이나 되어도 전부 치워버릴 수 있을 텐데.
“‘그리고리’의 끄나풀이 가롯 자작가라고 했던가?”
그런 황태자의 결의가 느껴졌던 걸까?
파트란의 고개가 더 아래로 조아려졌다.
“예. 토템과 관련된 모든 정황이 그곳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증거까지 확보하였사옵니다.”
“지원군은?”
“어사의 명령에 따라, 시위군(市衛軍)이 협조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좋다. 토벌을 진행하는 데 있어 절대 실수 따윈 없어야 할 것이다.”
“명에 따릅니다.”
“명에 따릅니다!”
파트란을 비롯한 요원들이 일제히 복명을 외쳤다.
황태자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그의 두 눈이 야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미처 보지 못했다.
아주 멀리 떨어진 맞은편 산등성이의 나무 위에.
박쥐 한 마리가 거꾸로 매달려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 * *
“…대박이군.”
길리티는 패밀리어(Familiar)로 삼았던 박쥐가 가져다준 소식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건 대체 어떻게 안 거냐?”
오거스틴을 비롯한 일행들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엘릭을 바라보았다.
파트란 등이 너무 의심스러우니 한번 뒤를 밟아보자고 의견을 내놨던 게 엘릭이었으니까.
항상 의심을 달고 사는 것이 감찰국의 요원이니만큼 감청에 어떻게든 대비를 할 테지만.
그들이 소지한 마도구보다 더 긴 사정거리를 가진 마법을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법이었다.
길리티가 나선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낮말은 새가,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은 항상 자신을 위한 말이라며 낄낄대던 것이 거짓말이 아닌 셈이었다.
엘릭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았던 건 아닙니다. 얼추 뭔가 있지 않을까 짐작만 했을 뿐이죠. 그런데 스승님도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까?”
요원 중에 황태자가 숨어 있던 걸 전혀 몰랐냐는 의미였다.
오거스틴이나 길리티 쯤 되는 인물이 그만한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 게 의아했으니까.
“감찰국의 변용술(變容術)은 마법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들었다. 그래도 그래봤자 단순한 잡기라고 내심 무시하고 있었는데… 흐흐! 이 스승이 한 방 먹었구나. 어떤 방식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우리가 자기네들 대화를 도청할 거라고 생각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겠죠.”
오거스틴은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할 거냐?”
그는 흥미진진한 얼굴이 되었다.
엘릭이 치는 사고는 90년 인생을 살면서 본 구경거리 중에서 가장 재미난 것이었다.
“뭘 어쩌긴요. 다 털어먹어야죠.”
“그러니까 어떻게?”
엘릭은 대답 대신에.
씨익!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가롯 자작가.
북부 지방에서도 아주 한적한 곳에 있어 중앙 정계는 물론, 인근 지역에서도 존재감이 아주 작은 곳.
하지만 소속 영지민들에게는 적은 세율과 가주의 소박한 성품으로 인기가 많은 곳이기도 했다.
‘…뭐, 그 모든 게 이쪽에서 일부러 의도한 것이긴 하지만.’
가주 수엔 가롯은 권태에 찌든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적당히 만만한 귀족의 인두겁을 쓰고서 이런 궁벽한 시골에 처박혀 있었는지도 어언 30년째.
마족이란 자고로 인간의 공포를 먹고 살아야 하건만.
그동안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이 평화에 찌들다 보니 몸도 인장도 계속 녹스는 것만 같았다.
만약 무너진 종족의 재기(再起)라는 원대한 목적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위대한 존재에 대한 철저한 신앙심이 아니었다면, 이런 자리 따윈 진즉에 박차고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조직은 늘 말하곤 했다.
언젠가 그분이 돌아오실 날, 그분의 옆자리에 앉을 영광을 얻지 않겠냐고.
수고스럽게 최전선에서 뛰어다니는 너희들만이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물론, 수엔 가롯은 바보가 아니기에 그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옆자리가 아니더라도 뒷자리, 아니, 그 뒤의 뒤라고 해도 자리에 앉을 정도쯤은 되지 않겠나? ‘고유’ 급의 인장도 갖지 못한 내가 그분을 배알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니까.’
그리고 지금.
수엔 가롯은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차사(差使)가 찾아갈 것이다.
오늘 새벽, 그의 앞으로 도착한 익명의 서신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장난으로 여길 법한 편지였지만, 수엔 가롯은 온종일 들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부에서… 드디어 사람이 온단 말이지!”
그렇지 않아도 ‘부활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다.
5년 전부터 외지에 토템을 심고, 생기를 수확하라는 명령이 주기적으로 내려왔었으니까.
그래서 아무런 차질도 없도록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는데, 드디어 중앙에서 사람이 내려온단다.
수엔 가롯은 그것이 자신의 충성을 치하하고 부활의 의식에 참여시키기 위한 중앙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어느 분이 오실까? 함? 샤나? 아니면 유다, 그분이 오시려나?”
수엔 가롯은 조직의 얼굴이라 할 수 있을 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면서, 어떻게 그분들을 모셔야 할지 계획을 되짚었다.
그럴수록 수엔 가롯은 조바심을 느껴야만 했다.
이런 가난한 시골에서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봐야 귀한 분들의 눈에나 차겠냐 싶었던 것이다.
‘차라리 단기간에 세율이라도 올려야 하나? 차사분들 중에 보물을 싫어하는 분들은 없었으니까…! 아니, 그보다 차사님이면 분명 수행원도 상당할 텐데, 몇이나 이곳에 오시려는 거지?’
수엔 가롯이 30년 동안 쌓은 민심을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자, 자작님! 크, 크, 큰일입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가 영지를 일구는데 전혀 관심이 없어 마을에서 적당히 뽑았던 인간.
하지만 적당히 영지 경영도 할 줄 알고, 아부도 잘해서 가까이 뒀었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옷이 온통 식은땀 범벅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구, 군대가 여, 여, 영지를 에워쌌습니다!”
“군대?”
수엔 가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 사람이라면 차사밖에 없을 텐데? 설마 군대라고 할 만큼 많은 수행원을 데려왔나? 아니, 그래서는 굼떠지기만 할 테니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뭔가 이상했다.
‘아니면 마군(魔軍)을…? 하지만 제국과 당장 전쟁을 치를 것도 아니라면, 그들은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일 테고…?’
도저히 이해 못 할 상황에 수엔 가롯의 머리가 복잡하게 굴렀다.
“자, 자작님!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요! 구, 구, 군대가 왔다니까요!”
수엔 가롯이 직접 확인해보겠다며 일어서려던 그때.
콰아아앙!
별안간 천둥이라도 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리면서 강한 충격이 그의 저택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창가 너머, 별관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게 보였다.
“이, 이게 무슨…?”
그제야 수엔 가롯은 뒤늦게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겁지겁 창가로 달려갔다.
폭음이 들린 방향.
사람 머리통보다도 훨씬 큰 화구(火球) 수십 개가 허공에 가득 정렬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일견 천 명도 넘는 중무장 집단이 있었으니!
그들의 머리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쌍두룡의 깃발과 감찰국을 의미하는 칼과 방패의 깃발이 같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곳은 마가 들끓는 마역이다. 영지 내에 있는 건 풀 한 포기도 남기지 말고 전부 싹 쓸어버려라.”
파트란의 명령에 따라, 감찰국 소속의 시위군이 일제히 진군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쿠웅-!
그리고.
“시작한 것 같으니까, 우리도 가죠.”
자작가 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풀숲.
엘릭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아주 사악하게 웃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면 얼마나 재밌게요?”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