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북방으로
“…할아버지.”
“어이쿠! 우리 헤이즈의 고운 얼굴을 누가 이리 엉망으로 만들어 놨누?”
오거스틴은 엘릭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헤이즈에게도 마음을 활짝 연 상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엘릭은 처음에 단순히 그가 지닌 천부적인 재능이 탐났던 것에 반해, 헤이즈는 고운 성미가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싹싹한 성미하며 어른들에게 보이는 예의 바른 태도까지.
보면 볼수록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나오는 아이였다.
손녀 같다고 해야 할까?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만약 자식이 있어 또 자식을 낳았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이 아이를 집안 식구로 맞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것만 해도 본 가로서는 여러모로 아주 대단한 홍복이 아니겠나!’
슬렛지 해머를 가볍게 다루는 걸 봐서는 전사로서 닦은 경지도 상당한 것 같고.
그래서 오거스틴은 어느새 헤이즈를 손자며느리 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녀석이 좋을까? 벤타? 아냐. 그놈은 너무 무뚝뚝해. 우리 헤이즈가 상처만 입을 가능성이 커. 그럼 요한…? 음, 그놈은 너무 비실한데. 샌님이고. 아니면 션과 친한 것 같으니, 션도 후보군에 둬볼까?’
헤이즈는 오거스틴이 상상 속에서 자신을 몇 번이나 이미 시집을 보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딱딱한 얼굴을 한 채로 말했다.
“이 일을 꾸민 사람들, 벌을 내릴 방법이 없을까요?”
오거스틴의 상상은 거기서 뚝 끝내야만 했다.
그리고 똑같이 인상을 굳혔다.
그들 앞에는 색만 조금씩 다를 뿐, 똑같은 모양을 한 토템이 줄지어 놓여 있었으니까.
요 며칠 사이, 북방으로 가던 그들의 발길을 붙잡게 만든 원흉이었다.
엘릭 등은 산맥을 따라 곳곳에 숨겨진 화전민촌을 일일이 찾아 방문했고, 어렵지 않게 숨겨진 토템을 다수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을들은 하나 같이 서로 다른 이상 현상을 겪고 있었다.
첫 번째 마을처럼 지독한 기근을 겪는 곳이 있는가 하면, 한밤중에 서리가 짙게 껴 농작물을 망치거나 동사자가 속출하는 경우도 있었고, 갑자기 원인 모를 이유로 산사태가 벌어져 마을이 통째로 쓸려나간 경우도 있었다.
전부 짧게는 3년에서 많게는 6년 안팎으로 벌어진 피해들.
사망자 수도 상당했다.
‘더 큰 문제는 지방 행정국에서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지만.’
그동안 신고조차 이뤄지지 않았던 건, 피해 마을이 전부 무거운 세금을 피해 산속으로 숨은 유랑민들이 세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행정국의 손길이 닿기도 어렵고, 그럴 의사조차 없는 곳들.
이 일을 꾸민 놈들도 일부러 그런 약점을 노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거스틴이 자신의 직함을 이용해 지방 행정국을 한바탕 뒤집어놨으니, 이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될 게 자명했다.
마기를 품은 토템. 마족이 다시 준동할지도 모른다는 증거이니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했던 이 지역의 행정국 인사들은 줄줄이 모가지가 날아가겠지만.
그거야 오거스틴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고.
‘그나저나.’
오거스틴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 늙은이도 찾지 못하는 것을, 제자 녀석은 어떻게 그리 귀신같이 찾아내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사실 토템을 찾아낸 건, 전부 엘릭의 귀신같은 솜씨 덕분이었다.
‘본인은 아귀감이라고 그러는데, 분명 그런 건 없거늘. 아니면 메르빙거의 기질과 섞이면서 새로운 특성이 개화된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좋은 게 좋은 것이니만큼 더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지만.
오거스틴은 메피스토펠레스라는 고대의 대마왕이 엘릭 옆에 붙어서 일일이 가르쳐줬다고는 절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이 괘씸한 짓을 저지른 연놈들을 죄다 잡아다 모가지를 자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이 이상은 우리의 소관이 아닌 것 같구나.”
헤이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거스틴의 말마따나 이 뒤부터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조사가 제대로 이뤄져 범인들이 제대로 처벌받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빨리 북방으로 가야만 했으니까.
슬렛지 해머의 손잡이 끝을 매만지는 헤이즈의 손길에 힘이 몇 번씩이나 들어갔다가 풀렸다.
* * *
하지만 엘릭 일행은 다시 이동을 멈춰야만 했다.
뜻하지 않은 방문객이 있어서였다.
“‘감찰국(監察局)’? 그놈들이 여긴 왜?”
오거스틴은 마부 카를이 가져온 보고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네레스타 가문의 최고 어른으로서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그조차도 가까이하기가 부담스러운 곳이 ‘감찰국’이었으니까.
“이유는 직접 원주님을 뵙고 나서 말씀드리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원주님?”
“가짜일 가능성은?”
“호패는 확실했습니다.”
“하긴. 그런 거로 장난 칠 놈들은 없을 테니… 음!”
제아무리 배짱이 두둑한 도둑이라고 해도, 감히 감찰국 요원을 행사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자칫 황실을 적으로 돌려 평생 쫓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거스틴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엘릭을 돌아봤다.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일행 중에서 자신이 연장자라고 해도, 어쨌거나 일행을 이끄는 건 엘릭이었다.
“내가 직접 나가지.”
엘릭은 잠시 의자에 걸어뒀던 로브를 몸에 두르고, 마차 문을 열었다.
그도 설마 이런 곳에서 여태껏 악명으로만 듣던 감찰국을 직접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사실 이유가 전혀 짐작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마족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하니 발등에 불똥 떨어진 거겠지.’
감찰국은 오로지 황제와 황실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는 절대적인 추종자들로 이뤄진 첩보 기관이었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납치, 회유, 협박, 살인교사 등은 기본으로 일삼는다는 괴물들.
보유한 전력만 따져도, 마탑이나 사자공가와 견줄만하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돌 정도이니.
그런 곳이 황실과 제국의 안녕에 위협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마족의 준동을 여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크게 들썩일 수밖에.
‘그만큼 황실에서 이 일을 단순히 지방에서 벌어진 소동으로 보지 않고 있단 뜻이겠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가?’
대마전쟁은 제국을 이루는 큰 기둥이었던 마도명문을 통째로 도려낼 정도로 여파가 큰 전쟁이었다.
그게 불과 한 세대 전의 일이니 몸을 바짝 세우는 수밖에.
『그 감찰국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만나면 똑똑히 말해라! 아자젤, 그놈이 남긴 잔당들을 이참에 확 뿌리까지 뽑아버리라고! 원한다면 그놈들이 잘 숨어 있을 만한 후보지들까지 말해주마!』
길길이 날뛰는 메피스토의 말 속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같은 동족이잖아요?]
『흥! 동족은 무슨. 우리네에게 그런 개념 따윈 없다. 그저 먹히거나 먹는 관계만 있을 뿐.』
[그러니 인간에게 망한 겁니다.]
『그래서? 아자젤의 놈들을 놔둘 생각이더냐?』
[그럴 리가요. 넙죽 받아먹어야죠.]
엘릭은 사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번 일을 꾸민 아자젤의 추종자들을 내버려 둘 생각 따윈 절대 없었다.
‘늦더라도 꽃의 신전을 찾아서 ‘겨울’을 완성하고 나면, 그놈들을 쫓아서 전부 부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불쑥 나서서 놈들을 들쑤시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또 편하기도 하고.
“그대가 엘릭 메르빙거인가?”
마차 밖에는 다섯 명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양복에 새카만 가면을 쓴 자들.
그들은 스스로를 ‘황제의 그림자’라고 자칭할 만큼,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절대 얼굴과 신분을 노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 새끼는 뭐야?’
수장으로 보이는 자의 말투는 다분히 위압적이었다.
황제의 수족으로서 웬만한 귀족들 따위는 눈 아래로 여기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는 태도였고, 최근 들어 기세가 등등하다는 엘릭의 기를 꺾을 생각도 있는 듯 보였다.
물론, 엘릭에게 통할 리 만무했지만.
“그렇다만?”
“그렇다… 만?”
명백한 하대.
까만 가면 아래, 수장의 한쪽 눈썹이 꿈틀대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 저절로 폭압적인 기세가 흘러나왔지만.
그럴수록 엘릭은 더더욱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아무리 감찰국이라고 해도 직접 현장을 뛰어다닌다면 직급이 제아무리 높아 봐야 조장 정도일 테고, 그렇다면 끽해야 자작 급에 불과할진대.”
고오오-
엘릭은 조금씩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를 압박하려던 수장의 기세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가면 너머의 눈동자가 살짝 경직되는 게 보였다.
“그런 한낱 관료 따위가 언제부터 공작에게 하대를 하였는지 모르겠군. 아니, 그런가?”
화아악!
그리고 마력이 완전히 개방되었을 때, 수장의 기세는 완전히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크르르릉!
거기다 그 속에는 마왕 휼의 기세도 어느 정도 담겨 있었으니.
마투술과 강체술까지 뒤섞인 엘릭의 마력 기질은 마치 흉포한 짐승의 그것처럼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에 흐르는 대기가 잔잔하게 떨렸다.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저절로 떨리고,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짙은 살의(殺意).
‘이, 이게 무슨!’
‘전장을 수도 없이 구른 노전사의 힘이 어찌 이런 젊은이에게서 느껴지는 거지?’
‘라센트의 영웅, 라센트의 영웅이라더니…!’
때문에 고압적인 자세로 엘릭을 찍어 누르려던 수하들만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사실 그들 중 상당수는 엘릭에게 시기심을 갖고 있었다.
언제나 음지에서만 활동했던 그들이니만큼, 양지에서 갑자기 영웅으로 급부상하고 나이대도 비슷한 엘릭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한때 마도명문의 수치라고 불리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심 무시하던 것도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겪고 보니 라센트의 영웅이라는 별칭이 오히려 부족해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거의 마도사에 육박하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엘릭이 개방한 마력이 수장의 기세를 완전히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의 수장도 어쨌거나 현장에서 손꼽히는 베테랑이었으며, 실력만 따진다면 웬만한 마도사의 머리쯤은 열매 따듯이 쉽게 딸 수 있는 실력자였으니까.
문제는 엘릭이 신분으로 그들을 찍어 눌러버렸다는 점이었다.
마탑과 사자공가의 시대가 열리면서 지금은 기억하는 이들도 드물지만, 공작 위는 제국 내에서도 단 4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리.
그 권위를 내세운다면 그들로서는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신상이나 작위를 떠나서 ‘황제의 그림자’에게 공식적인 신분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실수를 하였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결국 수장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다른 네 명도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뻣뻣한 태도였지만, 그래도 처음처럼 위압감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할 경우, 특별히 상원(the Senate)을 직접 찾아가 건의를 하겠소.”
양원제로 운영되는 현 정부에서 상원은 달리 ‘귀족원’으로 불릴 만큼 귀족들의 입김이 아주 세다.
마도명문에 주어진 찬성공작 위를 사용한다면 그들로서도 불호령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만 고개를 드시오.”
엘릭은 저들의 완전한 항복 선언을 받고 난 뒤에야 사과를 받아주었다.
『역시 기 싸움에서는 절대 지지 않는군?』
[제게 남은 게 깡밖에 더 있습니까?]
『큭! 그런데 이놈들 눈빛이 더 살벌해졌는데 말이야. 괜찮은가? 보아하니 이것들은 전부 암살에 특화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자는 동안에 뒤통수라도 치면 어쩌려고?』
[괜찮습니다. 그럼 더더욱 괴롭힐 수 있잖습니까?]
『미친놈.』
[그리고 꼬리 마는 척하는 것이라고 해도 일단 기선 제압이 중요하잖습니까? 거기다 겁을 주는 건 저만 하는 게 아닐 겁니다.]
『음?』
메피스토는 순간 엘릭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마차 안에서 이쪽을 웃는 얼굴로 보고 있는 오거스틴을 발견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저 살벌한 노인네가 나서면 다리가 떨릴 수밖에 없겠지.』
엘릭과 메피스토의 예상대로, 오거스틴은 감찰국 요원들만 들을 수 있도록 메시지 마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운이 좋았는 줄 알게. 이 늙은이의 제자를 함부로 대하였었다면, 그 모가지부터 바닥에 떨어뜨렸을 테니 말일세. 흘흘흘!]
순간, 모든 요원들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정도가 아니었다.
격동하고 있었다.
‘하, ‘하얀 밤’의 제자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찰국은 제국을 구성하는 4대 기둥 중 하나이며, 그런 만큼 다른 기둥인 마탑에 대해서도 동향을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마탑의 손꼽히는 절대자, ‘하얀 밤’ 오거스틴 네레스타에게 제자가 있다고?
그것도 메르빙거의 적자라고?
세상에 알려진다면 대파란을 일으킬 만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이건 상부에도 반드시 보고해야 할 사안이다!’
그렇지 않아도 백야가 이 일행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있어 그 상세 내막을 알아보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기도 했었는데…!
수장은 한순간 어깨가 무겁게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가뜩이나 마족의 잔당이 다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중인데, 그보다 더 큰 폭탄을 알게 된 셈이니.
그러다.
“…?”
그는 오거스틴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 헤이즈를 우연히 발견하고 인상을 딱딱하게 굳혀야만 했다.
헤이즈를 알아본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무심하게 이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 놓인 거대 해머가 문제였다.
해머 끝에 붉은 핏자국이 남아있고, 손잡이 부분에 검은 해골 인장이 박혀 있는 해머가 무엇인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전장에서 흉흉한 소식만 잔뜩 풍긴다는 블랙 스컬의 홍일점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젠장! 대체 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여긴 아수라장이 분명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