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북방으로
『이게… 왜 이런 곳에?』
엘릭의 그림자가 조각상을 삼키기 직전.
메피스토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그에게는 조각상의 모양새가 아주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자젤.]
엘릭이 별안간 내뱉은 말에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봐야만 했다.
[맞죠?]
『…어떻게 그걸?』
[찾아봤죠, 당연히. ‘광기(狂氣)’의 아자젤. 아닙니까?]
엘릭은 오토 한이 남긴 첫 번째 안배에 한창 집중할 당시, 단순히 설산왕을 잡는 데에만 몰두했던 것이 아니었다.
안가에 남아있던 수많은 책자를 둘러보기도 했으니.
가문의 마법을 익히기도 할 겸, 부족한 지식도 채울 겸, 그리고 메피스토와 관련된 정보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엘릭은 어렴풋이 머리 한편에 남아 불완전했던 지식을 전부 온전히 복구할 수 있었다.
마신을 호종했다는 네 명의 가복.
‘대마왕’들에 대한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원죄의 메피스토펠레스.
종말의 샤이탄.
난교의 릴리스.
그리고 광기의 아자젤.
‘아자젤은 박쥐의 날개에 염소의 얼굴, 사자의 몸과 말의 발굽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폭정(暴政)도 장난이 아니었다고 하고.’
사실 이름만 겨우 거론되어 있던 다른 대마왕들과 다르게.
아자젤에 대한 기록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다른 셋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인간 세상에 가장 관심이 많고, 욕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아자젤 때문에 멸망한 나라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지? 본 가에서도 가장 치를 떠는 놈이었다고 했고.’
그러다 보니 아자젤에 대한 외양이나 특징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엘릭이 조각상을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을 기리는 토템치고 마기가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그저 흠숭(欽崇)을 위한 우상일 뿐이니까.』
[흠숭?]
『놈에 대한 단순한 경배… 뭐, 그런 거로 보면 된다.』
[응? 마족들은 반사회적 떨거지 집단이라면서요? 그렇게 사조직을 형성하기도 해요?]
『…그딴 식으로 표현한 적은 없을 텐데?』
[하여튼요.]
『하여간 능글맞긴 최고구나. 마족이 분명 개인적인 성향이 아주 강하긴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집단을 형성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강자존(强者尊)의 법칙에 입각해서 상위 서열에 더 강하게 종속되는 편이지.』
[각각의 마왕들이 이끌던 마왕군이 그런 거겠네요?]
『계보에 따라 놓인 상위 인장은 하위 인장을 종속시키는 성질이 있다. 아자젤은 이런 특성을 누구보다 잘 활용했던 놈이었고. 집단이 나중에는 일종의 사이비처럼 변질되었지.』
[그럼 토템은 그런 사이비의 흠숭을 위한 매개체였겠군요?]
『정확하게는 인신공양을 위한 것 같다만.』
순간, 엘릭의 눈이 깊게 착 가라앉았다.
메피스토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아자젤을 위한 제물이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자젤 놈이 살아있었나? 아니면 부활을 위한 의식? 하여간 놈과 관련된 것이겠지.』
[추종자들이 있단 뜻입니까?]
엘릭의 눈이 순간 빛났다.
이건 마족이 다시 기승을 부릴 준비를 시작했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더 덩치가 큰 놈들일지도 몰라.’
대마전쟁에 아자젤과 같은 대마왕이 끼어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당시 패잔병들이 아자젤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 절대 아니었다.
『인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날뛰던 게 바로 놈이었으니까. 시간이 이만큼 지나도 결사 같은 게 남아있을 수는 있겠지.』
메피스토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도, 조각상을 보는 내내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마신의 네 가복은 같은 주인을 모시면서도, 서로가 원수나 다름없는 경쟁자였다지?’
대마왕들 간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딱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메피스토가 아주 짜증나 보인다는 것.
『부숴버려라.』
[지금요?]
『그래. 너도 지금 탐탁지 않을 것 아니냐? 어차피 이건 부수지 않는 한 계속 지력(地力)과 함께 근방에 있는 인간들의 생명력을 갈취하기만 할 것이다. 그러니 부… 아, 아니다!』
메피스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 마기를 삼키는 방법 알지? 그렇다면 그걸 흡수해라. 그런다면 본 왕의 인장은 그만큼 발전할 것이니!』
메피스토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자젤의 조각상은 이미 토템으로써 마기를 깨나 품은 상태.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마기들은 전부 인장의 성질을 띠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런 것을 삼킬 수 있다?
메피스토로서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마족의 계급은 상대의 인장과 진명을 갈취하면서 성장한다. 메피스토로서는 같은 격의 대마왕을 조금이라도 갈취할 수 있다면 반드시 해야만 했다.
[선제시.]
『…응?』
[선제시 하라구요. 설마 맨입에 삼키려는 개수작은 아니죠?]
메피스토는 아주 좋아 죽겠다는 엘릭의 표정을 보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놈의 선제시, 선제시! 지긋지긋하지도 않느냐? 어차피 마기를 흡수하면 너도 좋은 일 아니냐!』
[그럼 그냥 냉혹의 인장에다 쓰죠, 뭐. 안 그래도 요즘 성장 팍팍 되던데.]
『역시! 너, 인장을 인위적으로 고르는 법을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환단을 먹고도 본 왕의 인장에 약효가 없던 거였어!』
[남자가 쩨쩨하게 왜 자꾸 옛날 일을 들춥니까? 그럼 여자들한테 인기 없어요. 하긴 그러니 설산왕한테 차였지.]
『그러니까 그게 아니래도…!』
[아, 됐고.]
『이놈이!』
[하여간 뭐 주실래요?]
『…뭘 원하느냐?』
[트리거. 어때요?]
『안 돼! 배 째!』
메피스토에게 있어 원죄의 인장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럼 말던가요.]
하지만 엘릭도 별 미련 없다는 투로 일관하니, 메피스토는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이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스, 스토옵! 알았다! 본 왕의 인장에 대한 힌트를 주마!』
[그딴 식이면 저도 필요 없는데요?]
『힌트가 그냥 힌트인 줄 아느냐! 어차피 지금 네놈의 실력으로 본 왕의 인장을 억지로 쓰려 했다간 그냥 뒈질 뿐이야! 그러니 그걸 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 아니냐!』
엘릭의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원하던 길이 열렸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메피스토에게 아자젤의 마기가 아주 중요하단 뜻일 테지.
[그 말, 거짓말 아니죠?]
『본 왕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그러니까 제발 좀 그만하고, 그 마기 삼켜!』
엘릭은 조금 더 밀고 당기기를 해볼까 싶었지만.
이글대는 메피스토의 눈을 보고 있노라니, 여기서 더 자극했다간 정말 폭발할 것처럼 보여 뒤로 한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원죄의 인장에 좀 더 가까워진 것만 해도 아주 큰 소득이지.’
[좋아요. 그렇게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시니 이 마음 넓은 제가 도와드리죠.]
『…왜 하필 이딴 놈에게 본 왕이 코가 꿰여서는. 으으!』
메피스토는 내심 울고 싶은 심정이면서도, 아자젤의 마기를 드디어 삼킬 수 있단 생각에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이것은 어쩌면 때에 따라서 독립 후에 그에게 아주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혹시 원죄의 인장이 갑자기 발동한다던가,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엘릭은 내심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마정석이 어련히 알아서 메피스토를 묶어두겠냐는 생각에 조각상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흡수하라는 언령을 발동하려는 순간.
꿈틀!
여태껏 엘릭의 심장 한복판에 자리매김하고도 잠자코 있던 ‘무언가’가 움직였다.
맛있어… 보이는군….
마치 피식 웃는 듯한 그런 소리가 났다.
그리고 손끝에서 그림자가 확 일어나더니 중간 지점이 확 갈라지면서 날카로운 톱니 이빨이 드러났다.
『무, 뭐야?』
메피스토가 문득 불안감에 비명을 질렀지만.
와그작!
그림자 이빨은 마치 메피스토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단번에 나무 조각상을 씹어 먹었다.
두 입.
조각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안 돼애애애앳!』
바로 눈앞에서 코가 베이고 만 메피스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그림자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임무를 완수한 그림자는 다시 쏙 하고 제자리로 들어가고 말았으니.
결국 메피스토는 허공에다 헛손질을 하고 말았고.
『으아아아! 휼, 이 미친 새끼가! 뱉어! 뱉으라고!』
엘릭의 손에 매달려 고함을 꽥꽥 질러댔지만, 그림자는 전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흉포의 인장도 잠잠하긴 마찬가지.
엘릭으로서도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뭐야, 이거? 눈 뜨고 코 베인 거여, 시방?’
인장 속에서 한낱 사념으로만 남아있는 놈에게 이렇게 당할 줄이야!
“제자야! 이게 무슨…?”
오거스틴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엘릭을 바라봤고.
“…휼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뭣이?”
엘릭의 대답에 오거스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러다 허탈하다는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허! 뭔, 이런…!”
조각상은 마족들이 재출현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중요한 증거였지만, 그게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내 마기이이이이!』
물론, 그런 당혹스러움은 좌절하는 메피스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 * *
“…음?”
“왜 그러시나이까, 제사장이시여?”
검은 면관과 검은 예복을 쓴 채로, 위대한 존재께 한창 치성을 드리던 대제사장이 도중에 동작을 멈췄다.
때문에 신도들 역시 갑자기 반강제로 의식을 멈춰야만 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의문을 던져도, 제사장은 가만히 천장을 노려보기만 할 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렁찬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신도들은 사색이 되어 몸을 떨어야만 했다.
“어느 불신자가 감히 위대한 존재의 의식을 방해하였다! 그로 인해 위대한 존재께서 화가 단단히 나시었다!”
“그, 그런…!”
“대체 어느 이교도가 있어서 그런 참혹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아! 위대한 존재시여! 부디 일을 예방치 못한 못난 저희를 용서하지 마옵시고, 당신의 위대한 의지를 방해하려는 저 간악한 자들에게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천벌을 내리소서!”
신도들은 혹여 위대한 존재, 아자젤의 분노가 자신들에게로 쏠릴까 싶어 전전긍긍했다.
‘재생의 의식’은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만약 그것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는 날에는, 종족을 부활시키려는 그들에게 재앙의 날이 도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칫 지난 30년 동안의 준비가 헛수고로 돌아갈 수도 있었으니까.
“유다! 유다를 어서 불러와라!”
대제사장의 거친 외침에 따라 신도들이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유다에게 서둘러 북방으로 갈 채비를 갖추라고 이르라!”
* * *
이튿날.
엘릭 일행은 화전민 마을의 환대를 받으면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요!”
당시에 그냥 하산하기에는 날도 늦었던 데다가, 조각상이 사라진 뒤 저수지에 물이 조금씩 차오르면서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든 모시고 싶다고 통사정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간만에 노숙이 아닌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던 일행들은 한결 피로가 가셔져 있었다.
물론, 메피스토만 빼고.
『휼, 이놈…! 살아있을 적에 본 왕이 네놈에게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해주었는데, 이딴 식으로 본 왕의 뒤통수를 때려? 절대!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아!』
메피스토의 절규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육체가 있었다면 피눈물이라도 흘릴 기세.
‘아귀라서 그런가?’
사실 엘릭으로서는 원통해하는 메피스토와 다르게 아쉽긴 해도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원죄의 인장과 관련된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게 아쉽긴 해도, 어차피 당장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별 쓸모가 없었으니까.
차라리 흉포의 인장의 성취도가 오른 게 나은 건지도 몰랐다.
‘그거 삼켰다고 벌써 4성이라?’
흉포의 인장이 발달할수록 아귀감이 예민해지고, 강체술과 마투술도 저절로 강화되니까.
‘그래도 내 의지 없이 인장이 멋대로 발동되는 건 좀 그렇단 말이지?’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힘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그게 엘릭이 가진 생각이었다.
언제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을지 모르니까.
‘역시 마투술을 빠르게 발전시키는 방법밖엔 없겠지?’
마투술은 흉포의 인장과 상생하면서도 상극이다. 녹야의 기원이 흉포의 인장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서둘러 고삐를 만들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일단 인근에 있는 지방 행정국에다 얘기는 해두었다. 아주 발칵 뒤집어놨지.”
오거스틴은 혀를 차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엘릭 등은 화전민 마을을 나온 이후, 북방으로 가던 길에서 옆으로 잠시 빠져 산자락을 따라 펼쳐진 주변 인근 마을을 전부 돌아다녔다.
혹시나 비슷한 토템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모두 9개나 되는 토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