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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58화 (58/405)

58화

마왕 휼(獝)

콰앙!

엄청난 폭발 소리와 함께 접객실의 벽이 터졌다.

엘릭이 허겁지겁 바깥으로 도망치고, 헤이즈가 대형 해머를 든 채로 바짝 뒤쫓았다.

맹수를 만난 것처럼 겁에 잔뜩 질린 엘릭과 다르게 헤이즈는 여전히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동생, 유명해졌더니 제법 강해졌네? 이제는 마법도 쓸 줄 알고. 그래서 반항도 하고?”

헤이즈는 ‘반항’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면서 해머를 거세게 아래로 내리찍었다.

‘우, 우측!’

엘릭은 요란하게 울어대는 아귀감에 따라 바짝 몸을 황급히 옆으로 틀었다.

강체술과 마투술을 이제 몸에 완전히 익히다시피 단련한 덕분인지, 움직임이 웬만한 기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재빨랐다.

쾅!

그가 있던 자리로 아슬아슬하게 해머가 박혔다.

그러자 대리석을 깎아 만든 바닥이 내려앉으면서 파편이 위로 튀어 올랐다.

스치기만 해도 골로 갈 것 같은 위력.

‘여, 여기 있다간 정말 죽는다!’

엘릭은 사색이 된 채로 그냥 달아나는 게 낫겠다 싶어 언령을 재빨리 외우려 했다.

하지만.

쉭!

“도망치려고?”

“…!”

엘릭은 어느새 해머를 내다 버리고, 눈 깜짝할 새에 자신 앞까지 접근한 헤이즈를 보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이 누나의 손길에서 독립하기엔 한참 멀었단다.”

헤이즈가 왼 주먹을 날렸다.

퍼퍼펑!

다급하게 설치했던 실드가 모조리 수수깡처럼 박살나고.

퍽!

엘릭의 얼굴에 주먹이 틀어박혔다.

* * *

엘릭은 판다처럼 퍼렇게 멍든 한쪽 눈가를 달걀로 문지르면서 슬쩍슬쩍 옆쪽을 눈치 봤다.

헤이즈가 마침 마시던 찻잔을 고상하게 접시에다 내리면서 말했다.

“엘릭.”

“으, 으응?”

“찬성공작이 되어서 타인의 눈치를 보는 건, 그리 좋은 자세가 못 된다. 다른 사람들이 너를 우러러보고, 눈치를 살피게 만들어야지.”

“….”

엘릭은 한순간 ‘그게 다 누나 때문이잖아!’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억눌러야만 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자신의 누이는 항상 이상한 곳에서 가르침을 주곤 했다.

그야 가세는 기울었어도, 절대 자존심까지는 굽히지 말라는 고마운 충고이긴 한데… 정작 본인은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오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물론, 옆에서 두 남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션으로서는 기가 찰 따름이었지만.

‘엘릭의 안하무인인 성격… 여기서 나온 게 분명해.’

하루가 매일같이 저런 가르침을 받는다면 성격이 저렇게 비뚤어지는(?) 것도 당연한 것일 테지.

“우리로 인해 벌어진 피해는 어떻게든 변상할게. 계속 폐 끼쳐서 미안해.”

헤이즈가 공손한 어투로 사과를 해오자, 션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누님의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아버지께 말씀드려놨으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피해 본 건 엘릭 앞으로 청구하면 되는걸요.”

한순간 엘릭이 ‘야! 그걸 왜 내가 변상해!’라는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게 느껴졌지만, 션은 굳이 그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녀석이 뭐라고 해도 여기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건 헤이즈였으니까.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매번 우리 엘릭 때문에 고생이 많지?”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내가 나중에 어떻게든 신세 갚을게.”

“엘릭의 고삐를 잡아 주시는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네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너도 알다시피 엘릭이 많이 철이 없잖니. 앞으로 잘 부탁할게.”

“제가 이해해야죠. 누님이야말로 망아지 같은 동생 때문에 근심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속이 좀 더부룩하더라. 피부도 많이 거칠어졌지 뭐니.”

“이런! 하여간 저놈이 문제라니까요.”

“…본인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말들 해도 되는 거냐?”

엘릭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헤이즈와 션의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헤이즈 누님, 이참에 본 가까지 오셨으니 보약이라도 하나 받아가시는 게 어떠실까요?”

“보약?”

“예. 때마침 원로님 중에 약재에 능통하신 분이 계십니다. 저를 많이 아껴주시는 분이라… 따로 부탁드리면 흔쾌히 내어주실 겁니다.”

“어머. 그럼 부탁해도 될까?”

『너 아무리 봐도 여기서는 찬밥 신세로구나?』

메피스토는 엘릭 옆에서 낄낄 웃어대며 깐족대고 있었다.

반면에.

오거스틴은 엘릭 남매를 흥미로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

‘마도명문의 천재 마법사와 무투파 영애라. 어떻게 마법 대신에 무기를 쥐게 되었는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저만한 실력자가 있다면 앞으로 메르빙거가 비상하는 것도 문제없겠는걸? 흘흘! 정말이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제자야.’

헤이즈가 엘릭을 돌아보며 물었다.

“엘릭.”

“으, 응?”

“이제는 뭘 할 거니?”

엘릭은 헤이즈의 온화한 말투 속에서 자신을 고향 집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역시 날 데리러 온 거였어.’

누이로서는 동생이 죽었느니 살았느니 하는 근거 없는 소문이 자꾸 돌아다니고, 신문에서도 계속 여러 사건으로 얼굴을 비추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을 테지.

그러니 아마 웬만하면 엘릭을 그런 위험으로부터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것이다.

‘말을 잘해야 해. 누나는 절대 그냥 섣부르게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엘릭이 아카데미의 남은 과정을 수료하겠다고 말해도, 당장 뒷덜미를 내려쳐서 끌고 갈 게 분명했다.

그래서 엘릭은 자신의 비밀을 헤이즈에게만큼은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앞으로 계속 있을 여러 계획에 반대할 게 분명해.’

엘릭은 생각을 굳히며 입술을 달싹였다.

전음이었다.

[나, 가문의 안배를 찾았어.]

순간, 헤이즈는 귓가에서 엘릭의 목소리가 울리자 살짝 놀랐지만, 곧 표정을 굳히면서 엘릭을 빤히 바라봤다.

자세히 말하라는 뜻.

엘릭은 그때부터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용의 둥지에서 겪었던 일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하나뿐인 혈육에게까지 사실을 전부 숨길 필요는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녀의 굳은 마음을 돌릴 필요도 있었다.

다만, 메피스토가 자신의 옆을 배회하고 있단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 따로 걱정을 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에게 배움을 구하고 있다는 것도 딱히 말하고 싶지 않고.’

메르빙거는 태어났을 때부터 조기 교육으로 인외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관을 주입받는다.

헤이즈는 비록 마법에 재능이 없어 진즉에 여기서 손을 뗐다지만, 그래도 좋지 않은 인식을 가져와서 잔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단호했던 헤이즈의 동공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 북방으로 갈 거야. 거기에 선조들이 남기신 안배가 있어.]

“….”

헤이즈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엘릭은 듣지 않고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물론, 위험할 수도 있어. 아니, 위험할 거야. 우리 선조들이 좀 한 성깔들 하시더라고. 후손들이 편하게 떠먹여 주면 어디가 덧나는 건지… 에휴!]

“….”

[하지만 그래도 난 갈 거야. 그게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누나도 알잖아? 내가 그걸 얼마나 바라왔는지.]

헤이즈의 입술은 꾹 다물렸다.

[지금 우리가 하는 꼴을 봐. 우리가 어딜 봐서 마도명문의 후계자고, 공작가의 영령과 영애며, 별의 마도사가 남긴 혈육이라 할 수 있겠어?]

“….”

[난 그걸 전부 뒤집어버릴 거야. 조부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가문을 다시 ‘별’처럼 빛낼 거야. 그러니까 봐주라, 응?]

헤이즈는 속에 담긴 말들이 너무 많아 몇 번이나 꺼내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슬퍼질 뿐이었다.

동생은 저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자신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헤이즈, 너는…!

언젠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었고, 엘릭은 다섯 살도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었으니 기억도 나지 않겠지만.

그때 들었던 말은 지금까지 그녀의 가슴에 낙인처럼 짙게 남아있었다.

‘발목을 붙잡지 않으려면… 응원이라도 해줘야겠지.’

결국.

헤이즈는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엘릭은 그것이 누이의 대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 *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호호! 그건 제가 드려야 하는 말인걸요. 이쪽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편하게 다녀오세요. 학술 연구를 위한 목적이라고 하면 아카데미에서도 출석은 인정될 테니 걱정 마시구요.”

떠나려는 엘릭을 배웅하는 내내, 타샤의 기분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걸로 드디어 용의 회명서를 손에 넣을 수 있어!’

엘릭은 조금 전 그녀가 이끄는 ‘불새의 홰’와 협력 기관으로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워낙에 타샤의 제안이 괜찮았던 데다가, 향후 활동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다른 것을 떠나서라도, 연구를 위한 후원금을 가장 많이 책정하고 있었으니, 그로서는 절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타샤는 타샤 나름대로 드디어 용의 둥지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사실 둥지에서 ‘용의 회명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진실로 밝혀진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벌써부터 그것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처럼 들떠 있었다.

‘거기다 엘릭 메르빙거는 둥지가 발굴되는 것도 살피지 않고 바로 북방으로 간다고 했어. 그것만 해도 아주 큰 건수를 잡은 게 분명해.’

타샤는 북방에 대체 뭐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엘릭이 답해주지도 않으리란 걸 알고 있을뿐더러, 재미난 건 아끼고 아껴뒀다가 나중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열어보는 게 제맛이었으니까.

그렇게 엘릭은 타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더 나누다가, 대기 중이던 마차로 올라탔다.

그러다 인상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되도록 혼자서 조용히 가고 싶었는데….’

“그딴 표정 짓지 말지? 나도 네놈 뒤치다꺼리하는 거 싫거든?”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션이 짜증 섞인 투로 투덜거렸다.

그 역시 이번 북방행에 동행하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총장 선거 사건으로 인해 워낙에 엘릭에게 크게 데였던 터라, 이번에는 되도록 그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가거라.

가주이신 아버지, 가이 네레스타의 명령에 따라 그런 결심은 결국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메르빙거와 네레스타 간에 체결된 조약을 이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제자를 따라가겠다고 나선 원로원주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나?

“허허! 이거 얼마 만에 나가보는 나들이인 건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속이 답답하던 차였는데, 설원의 차가운 공기를 좀 맡고 나면 속이 좀 풀리겠지? 늘그막에 얻은 제자 덕분에 아주 건강해지겠구나.”

오거스틴이 재밌다는 듯이 껄껄 웃어댔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헤이즈가 어서 들어와 앉으라며 옆으로 자리를 내주었다.

헤이즈는 오랜 고민 끝에 동생을 혼자 계속 위험에 노출 시킬 수 없다면서 호위를 이유로 동행했다.

누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던 엘릭으로서는 잔소리 대마왕이 이동하는 내내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겠다는 생각에 저절로 우울해졌다.

거기다 어느새 집채만 한 호랑이를 끌고 와 마차 옆에 선 길리티와 마부를 자처한 카를까지.

엘릭까지 포함하면 파티원만 벌써 6명인 셈이었다.

‘아니. 일곱인가….’

『쓸데없이 시끄럽겠군. 정신 사나운 건 딱 질색인데.』

한쪽에서 귀찮다는 듯이 투덜대는 메피스토까지.

아무래도.

조용히 북쪽에 있다는 꽃의 신전으로 가기에는 그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이럇!”

카를의 힘찬 외침과 함께 북방행이 시작되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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