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마왕 휼(獝)
타샤가 지녔던 의문은 시종 하나비가 가져온 보고서를 보고 금세 풀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단순 ‘화풀이’였다고?”
그 이유가 조금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정작 하나비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타샤의 사나운 눈총이 자기를 질책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자라목이 되고 말았다.
“메, 메르빙거 가의 영애가 한 말에 따르면 그, 그렇다고 합니다…. 본 가 측에서 영식을 꼬드겨 이번 사달이 생긴 것이라고 여긴 것 같았습니다.”
“하!”
타샤로서는 황당하기만 했다.
이번 사건 사고에 자신들이 한쪽 발이라도 딛고 있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것을 조금이라도 덮어주고자 백방 뛰어다녔던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메르빙거 가의 영애께서 갖고 계신 오해가 풀릴 수 있도록 저희 측에서 충분히 설명해드리자, 뒤늦게 미안하다는 사과 인사를 하셨습니다.”
타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차라리 자존심을 세우고 버텼으면 압박하기라도 할 수 있지,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면 큰소리치기도 어렵지 않나.
보통 귀족들이 자신의 잘못이 있어도 쓸데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는 것에 비하면 참 허망하다 싶은 결과였다.
하물며 허울만 남았다고 해도, 메르빙거 가가 공작가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아니. 때로 굽힐 줄도 아는 이런 유연성도 가지고 있으니 천 년이 넘도록 마도명문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당금 마법계에서 최고의 가문은 네레스타 가라고 한다지만, 그들조차 메르빙거의 유구한 역사에 비하자면 조족지혈일 뿐이었다.
“하여간 블랙 스컬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가 중요한데….”
타샤는 헤이즈에 대해 심층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던 상태.
하지만 그에 대해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확인할 수 없음.
헤이즈와 블랙 스컬 간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따지자면 이게 당연한 것이었다.
블랙 스컬에 관한 건, 그만큼 온통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니까.
그들은 맡은 의뢰를 거의 완벽하게 수행한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그만큼 곳곳에 많은 원한을 샀기 때문에 단원 개개인이 위험에 처할 때가 많아, 되도록 단원들의 정체를 숨기려 했다.
의뢰를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해골이 그려진 복면을 쓰고 있으며, 개개인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닉네임이 붙어 본명 대신에 불린다던가?
그래서 세간에도 블랙 스컬의 수장이나 초창기 단원 몇 명에 대해서만 정체가 알려져 있을 뿐, 다른 단원들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만약 헤이즈가 블랙 스컬의 숨겨진 단원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마도명문의 영애가 용병이며 무투파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네레스타 가로서도 그만큼 메르빙거와 더 친밀하게 지낼 이유가 되니 말이다.
‘블랙 스컬은 정식으로 받은 의뢰 외에 사적인 친분은 잘 안 쌓으려 한다지? 끽해야 ‘회사자(灰獅子)’나 ‘북방상인연합’의 회장과 친분이 있는 게 고작이니까. 그런데 거기다 한 발 걸칠 수 있다면….’
타샤가 헤이즈에 대해 자세히 조사를 해보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탁!
타샤는 탁상에다 보고서를 던지면서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내가 원한 보고서가 이런 게 아니란 거, 잘 알고 있겠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옷 벗고 나서 해도 되는 거고. 하여간 하루 더 주겠어. 그 안에 어떻게든 내가 만족할 만한 것을 가져와야 할 거야.”
“아, 알겠습니다!”
하나비는 그것이 최후통첩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안 된다는 대답 따윈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무능력하다고 비친다면, 전임자들처럼 또 모가지가 잘려 나갈 테니.
‘그럴 수는 없어!’
그냥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바쁠 텐데 이만 가봐.”
타샤는 도망치듯이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하나비를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책자 하나 얻기가 참 어렵단 말이야.”
난이도가 높아진 만큼 더 재밌기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볍게 웃었다.
* * *
엘릭은 눈을 떴다.
번쩍!
에메랄드를 깎은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동공을 따라 광망(光芒)이 번뜩였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허! 또 깨달음을 얻었다고? 아니. 대체 마투술을 접한 지 뭐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허허! 당연하지 않나. 이 늙은이의 제자이니 저게 당연한 것을.”
“당연하긴 개뿔. 형님, 지금 형님도 움찔 놀라는 거 내가 못 본 줄 아슈?”
“…험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하여간 주기로 한 거 줘야지?”
“여기 있수. 가져가쇼! 아주 막!”
오거스틴은 ‘엘릭이 또 성장한다, 하지 않는다’를 두고 나눈 내기에서 이기게 되자 어깨가 한 층 올라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엘릭을 보는 길리티의 눈가에는 욕망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웃는 것도 얼마 안 남은 줄 아쇼! 내 어떻게든 저놈을 직전제자로 만들어버리고 말 테니까!’
길리티는 엘릭이 오거스틴에게서 흉포 인장의 사용법을 배우고 있는 동안, 숟가락을 하나 얹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수업 시간과 자습 시간까지 전부 끝난 뒤, 얼마 없는 자투리 시간 동안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가지고, 가르쳐봤자 뭐 얼마나 가르칠 수 있나 싶어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막상 엘릭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쑥쑥 빨아들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응용력까지 보이자 눈이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엘릭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능이 넘쳐났던 것이다!
여태 배움을 갈구하는 후배들을 수도 없이 만났고, 심지어 자유혁명군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 병사를 직접 기르기도 했지만… 정작 입문조차 못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건만.
‘흐흐흐. 순수 재미 면만 따진다면 본 학파에 미칠 정도는 아니니까. 하여간 두고 보쇼. 제자 얼굴 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엎드려 절을 하도록 만들어 줄라니까.’
그렇게 길리티의 음흉한(?) 계획이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엘릭은 입가에 만족에 찬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단 며칠 사이에 흉포의 인장을 3성까지 끌어올렸다. 아귀감도 완전히 자리 잡았고.’
하지만 엘릭을 가장 만족케 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흉포의 인장에서부터 마투술, 그리고 강체술까지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확실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가장 큰 성과야.’
흉포의 인장은 일종의 트리거였다.
단순히 인장을 발생시키기만 해도 마력 순환이 빠르게 이어지고, 육체가 저절로 강화된다.
이제 별도의 메모라이즈 같은 준비 작업 없이 완전한 ‘마법 무장’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다 뜻하지 않게 길리티 어르신에게서 ‘환안(幻眼)’까지 얻을 수 있었고.’
오거스틴은 익히고 있는 마법도 많은데 굳이 다른 학파의 마법까지 익혀야겠냐는 얼굴이었지만, 엘릭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알고 있는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만큼 배움에 대한 갈망은 엘릭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환안이 가진 잠재력이 그만큼 좋기도 하고.’
엘릭은 이곳을 나가면 가장 먼저 환안부터 시험해 볼 참이었다.
“이제 기초는 거의 다 가르친 듯하구나. 이후부터는 네가 직접 연구를 해보면서 깨달음을 얻는 게 더 빠를게다.”
오거스틴은 다 자란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온화한 스승의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입가는 아주 좋아 죽겠다는 듯, 연신 씰룩대는 걸 억지로 참느라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전부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스승님이 아니셨으면 여기까지 다다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허허! 이 늙은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다 네가 잘나서 그런 게지. 허허허허!”
오거스틴은 겸손한 척 말하면서도 절대 자신의 공을 잊지 말라는 듯 두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속 보이는 영감들이로군. 쯧쯧! 이렇게 두 눈이 돌아가서야. 이놈이 제 놈들 머리 꼭대기에 서서 등골에다 빨대 꽂고 있는지도 모르고.』
메피스토로서는 골수가 밑바닥까지 쪽쪽 빼 먹힐 두 노인이 불쌍하게만 보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에는 멍청하다며 비웃었지만, 언제부턴가 자신의 입장도 두 노인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동질감을 느껴 우울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요 며칠 동안 죽어라 굴러댔으니, 아귀감은 이제 네가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무의식에 녹아있어 만약 위험에 닥친다면 반사적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오거스틴은 아귀감에 대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짚어주고 있었다.
엘릭은 앞으로 마족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요긴하게 쓰이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근!
두근!
‘응?’
심장이 갑자기 가쁘게 뛰었다.
아귀감이 위험을 감지했단 뜻인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럼 이만 나가도록 하자. 밖에서 션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엘릭은 뭔가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뭐, 아무것도 아니겠지.’
오거스틴과 길리티가 있고, 네레스타 가의 영역이기도 한 이곳에서 일이 일어나면 무슨 일이 생기겠냐는 생각에 머리를 털었다.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히지 않은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하산할 준비를 했다.
* * *
그리고.
엘릭은 얼마 가지 않아 그런 멍청한 판단을 내린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고 말았다.
‘…젠장. 아귀감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거였어.’
“동생아, 안녕? 오랜만이네.”
청연의 미궁을 벗어나 션이 기다리고 있다던 객실에 도착한 순간.
누이, 헤이즈가 한쪽에서 차를 마시다 말고 이쪽을 보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엘릭의 얼굴이 꺼멓게 죽고 말았다.
“어머. 누나가 별로 반갑지 않은 눈치네?”
헤이즈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엘릭은 볼 수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한없이 따스해 보이는 눈웃음 속에 자리 잡은 한겨울처럼 차가운 동공을.
『하하하! 저기 있는 처자가 너의 천적인가 보지? 메르빙거의 향취가 느껴지긴 하지만, 그보다 오러의 향이 더 강렬하군.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는데?』
메피스토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릭이 이렇게 겁에 질려 있는 건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릭은 거기에 대해 따질 겨를 따윈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누이도 누이지만, 그녀의 등에 걸린 대형 해머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무서웠다.
“누, 누나가 여긴 어떻게…?”
“벌써 잊었니? 내가 조만간에 황도로 찾아오겠다고 말했었잖니. 바쁜 것도 좋지만, 너무 주변 일들을 잊고 살면 안 된다고.”
엘릭은 그제야 기억 한편에 던져뒀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확실히 헤이즈가 곧 그를 찾아 황도로 올 거라고 말하긴 했었다.
그래서 엘릭은 냉큼 헤이즈를 피해 북방으로 달아나려 했었지만….
‘이 영감님한테 갑자기 붙잡혀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버렸잖아!’
엘릭은 원망의 눈길을 담아 오거스틴을 홱 하고 노려봤다.
정작 오거스틴은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지만.
오히려 제자의 혈육을 만나게 되자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호오! 네가 엘릭의 누이인가 보구나. 확실히 남매가 얼굴이 서로 많이 닮았군. 만나게 되어 반갑네. 이 늙은이는 이번에 새로이 엘릭의 스승이 된 오거스틴 네레스타라고 한다네.”
“처음 뵙겠습니다. 헤이즈 메르빙거라고 합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제 동생이지만,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려요.”
헤이즈는 공손한 어투로 허리를 숙였다.
동작 하나하나에 기품과 교양이 담겨 있어, 그야말로 지체 높은 귀족가의 영애나 보일 법한 모습에 오거스틴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물론, 그 누이까지 이렇게 훤칠하게 잘 자란 걸 보니 선대인(돌아가신 상대 아버지를 높이 부르는 말)께서도 아주 흡족하게 생각하실 걸세. 메르빙거의 앞날은 걱정이 없겠군.”
“말씀 감사합니다.”
엘릭은 오거스틴과 헤이즈가 하하호호 분위기 좋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뒤로 슬금슬금 빠지려 했다.
하지만.
“어디 가니, 동생아?”
헤이즈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삐질!
엘릭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누나.”
“응?”
“손에 들고 있는 그 해머… 좀 옆으로 치워주고 말하면 안 될까?”
헤이즈는 어느새 대형 해머를 한 손으로 들어 어깨에 걸치면서 봄날 햇살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럴 수가 있겠니? 네 뚝배기 깨려고 모처럼 이렇게 손수 가져온 건데.”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