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마왕 휼(獝)
문지기 하이바는 자신이 맡은 일에 누구보다 높은 만족도와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육망성, 네레스타 가의 문지기라!
사실 평민 출신이 이만하면 크게 출세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레스타 가는 마도 가문인 만큼, 문지기에서부터 하녀와 시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신이 반드시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마법을 익히고 있어야만 했다.
다른 가문에서 봤을 때는 어떻게 귀중한 마법사를 그런 식으로 소모하느냐, 인력 낭비라며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지만.
마도에 입문한 자라면 설사 청소부가 되어야 한다고 해도 네레스타 가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지원할 자들이 수두룩했다.
‘그 안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신분 상승은 물론, 밖에서는 전혀 기대도 할 수 없을 고위 마법들을 대거 접할 수 있으니까!’
하이바도 그런 뜻에서 네레스타 가에 들어왔고, 설사 문지기로 있다고 해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어차피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네레스타의 본가에 와서 깽판을 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있는 시험을 통과하면 다른 보직으로 옮길 수도 있다. 그러니 이 하이바 텐센트! 네레스타 가에 어떻게든 뼈를 묻고야 만다!’
네레스타 가가 육망성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문호가 항시 개방되어 있고, 능력만 증명한다면 얼마든지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소문만 무성하게 돌던 메르빙거의 가주가 원로원주 님의 제자가 된 게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기도 했다.
‘이제 마도명문과도 손을 잡았으니, 앞으로 네레스타 가는 얼마나 높이 날아오르게 될까? 그리고 난 거기서, 흐흐…!’
하이바가 부풀어 오르는 꿈에 군침을 질질 흘리던 그때.
또각!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하이바 앞으로 구두 소리를 내면서 한 여인이 멈춰 섰다.
하이바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씀하시라고 대답을 하려다 말고, 말문이 턱 막혔다.
말을 건 상대가 아주 아름다운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별이 쏟아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청발.
깊은 바다를 담은 것처럼 군청색으로 빛나는 눈.
가녀린 어깨와 차분한 말투까지.
존경하는 타샤 님이 도도하고 고고한 귀족 여인의 표본이라면, 눈앞에 있는 여인은 보호해주고픈 마음을 저절로 불러일으키는 가냘픈 인상이었다.
고양이와 강아지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여인의 인상과 달리 하이바는 마음을 도무지 놓을 수가 없었다.
‘드, 등 뒤에 달고 있는 저, 저건 뭐지…?’
여인은 가녀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등에 웬만한 장정보다도 훨씬 크고 두꺼운 대형 철제 해머(Sledge-hammer)를 매고 있었다.
2미터도 넘을 것 같은 길이. 망치 부분은 불길하게 붉은빛이 짙게 감돌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마른 침이 삼켜질 정도였다.
“예, 예…! 마, 말씀하십시오.”
하이바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대형 해머를 들고 있으면서도, 새삼 상냥한 말투를 하고 있으니. 그 기묘한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되고 만 것이다.
“혹시 이곳이 네레스타의 본가인 ‘안개의 언덕’일까요?”
“그, 그렇습니다만….”
“아, 다행이네요. 맞게 찾아온 것 같아서.”
여인은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호, 혹시 누, 누굴 찾아오셨는지요? 시, 신분증부터 제시해주십시오.”
“신분증, 말씀이신가요?”
“시, 신분증이 어, 없으시다면 내, 내, 내방이 되질 않…!”
“그렇다면 드려야죠.”
여인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등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거랍니다.”
“…!”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네레스타 가의 정문이 박살났다.
댕댕댕-!
침입자를 알리는 경고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 * *
“이, 이게 무슨 소리야?”
타샤는 션이 던진 말에 잠시 고민에 잠기다, 갑자기 집이 떠나가라 경고 알림이 울리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침입자가 들어왔다고?’
‘어느 정신 나간 작자가 들어온 거지?’
네레스타 본가에 설치된 마법은 학계는 물론, 황도의 귀족이며 일반인들에게까지도 아주 고약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함부로 들어갔다간 죽어서야 나올 수 있는… 아니, 그래서도 나올 수 없는 마굴(魔窟).
그래서 자신의 실력에 제법 자신이 있는 도둑들도 네레스타의 본가만은 건드리기를 꺼리는 편이었건만.
“서, 설마!”
그런데 갑자기 션이 사색이 되어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야! 어디 가!”
타샤가 크게 소리쳤지만, 션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타샤는 뒤늦게 션이 말했던 ‘메르빙거가 무서워하는 메르빙거’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엘릭의 누이가 직접 찾아왔다는 뜻일 텐데.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메르빙거답게 성격이 지랄 맞아서 본 가에 화풀이를 한다 치더라도… 경고 알람이 이렇게 쉽게 울리지는 않을 텐데?’
네레스타 가의 문지기는 단순히 정문을 지키기만 하는 가병(家兵)이 아니었다.
네레스타를 대표하는 얼굴.
즉, 뛰어난 마법사라는 뜻이었다.
최소 5써클에 달하는 실력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기에 웬만한 시비 다툼쯤은 콧방귀만 나올 뿐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설사 어떻게 문지기를 제친다고 해도, 상시 대기 중인 디펜더 팀이 즉각 투입된다.
그들 하나하나가 전장에서도 독보적인 활약을 선보였던 뛰어난 워 메이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침입자’라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알람이 울렸다?
마도사 급의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션은 분명히 엘릭의 누이가 평생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희생을 했다고 했다.
그 말은 뒤집었을 때, 정작 누이 본인은 마법에 이렇다 하게 뛰어난 재능이 없었단 뜻.
몰락한 마도명문의 저력으로는 한 사람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테니까.
그러니 당연히 엘릭의 누이는 평범한 사람일 가능성이 컸고, 지금 쳐들어온 침입자일 가능성은 더더욱 적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션은 왜 엘릭의 누이라고 생각한 거지?’
뭔가 이상했다.
‘왠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어쩐지 엘릭과 마찬가지로 그 누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타샤는 곧장 ‘공중 부양’을 사용해 정문 쪽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그리고.
“…오.”
가볍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탄내가 짙게 풀풀 날린다 싶더니, 완전히 박살나다시피 한 정문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문지기 하이바는 물론, 디펜더 팀의 워 메이지들까지 전부 치욕과 낭패가 가득한 얼굴로 쓰러져서 침입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침입자는 가녀린 체구를 지닌 청발의 미녀였다.
하지만 체구와 다르게 한 손에는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대형 해머를 들고 있었으니.
먼저 움직였던 션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런 침입자를 뭐라고 설득하는 중이었다.
침입자는 여전히 흉흉한 기세를 흘려대고 있었지만.
“아, 아가씨!”
“타샤 아가씨께서 나타나셨다!”
디펜더 팀의 멤버들은 타샤를 발견하자마자 화색이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드디어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온 셈이니.
한 명은 아예 기세등등하게 일어서서는 침입자에게 크게 호통을 쳤다.
“네 이년! 우리 아가씨께서 누구신지 아느냐! 이런 천인공노할 소동을 일으켰으니 이제 단매에 맞아 죽… 히이이익!”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바닥에 넙죽 엎드려야만 했다.
눈 깜짝할 새에 해머가 바로 코앞까지 날아왔으니까.
그대로 서 있다간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져나갈 판국이라, 메모라이즈 해뒀던 ‘민첩 강화’를 펼쳐서야 겨우겨우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어디서 자꾸 파리 우는 소리가 나는 것 같네요? 이를 어쩐담.”
촤르륵!
여인은 해머의 손잡이에 걸려 있던 쇠사슬을 잡아당겨 도로 회수하면서 히죽 웃었다.
말투는 그렇게 세상 상냥할 수가 없었지만, 반대로 기세는 또 그렇게 살벌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걸 보고 있던 션이며 디펜더 팀은 전부 질색하고 말았다.
‘무슨 사람이…!’
‘아니, 대체 저걸 어떻게 저리 쉽게 들 수 있는 거야?’
‘괴, 괴물인가?’
따로 오러를 일으키는 것 같지도 않은데도 불구하고, 저런 작은 체구로 족히 수십 킬로그램은 될 해머를 장난감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하지만 디펜더 팀을 더욱 두렵게 만드는 건, 웬만한 마도사도 쉽게 거꾸러뜨리는 자신들을 사망자 없이 그냥 ‘가볍게’ 제압해버렸다는 점이었다.
웬만한 실력자라면 생김새부터 특징까지 대부분 파악하고 있건만.
침입자의 정체는 도통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만 같았다.
“어머! 그쪽도 덤빌 생각인가요?”
침입자는 이제 타샤가 있는 하늘을 보면서도 차갑게 눈을 번뜩였다.
여차하면 해머를 들고 그쪽으로도 달려들 태세.
어떻게 하늘에 있는 타샤를 잡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침입자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이 기세가 사나웠다.
문제는 타샤도 만만치 않은 성격이란 점이었지만.
“그럴까?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화르륵!
타샤는 션을 협박했을 때와 비슷한 크기의 화구를 잔뜩 소환하고서는 앙칼지게 웃었다.
여차하면 두 여인이 부딪칠 태세라, 중간에 끼어있던 션이 다급하게 나서야만 했다.
“헤, 헤이즈 누님! 제발 멈춰 주십시오!”
헤이즈라 불린 침입자가 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가에는 여전히 초승달처럼 예쁘게 웃으면서.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저를 봐서라도, 제발…!”
“흠.”
“엘릭, 그놈은 제가 어떻게든 대령해드리겠습니다!”
션은 당장에 눈물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결국 헤이즈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껏 잡고 있던 자세를 풀었다.
“좋아요. 대신에 3시간 드리죠.”
“예! 그 안에 어떻게든, 멱살을 잡아서라도 바리바리 묶어서 대령하겠습니다!”
션은 행여 헤이즈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싶어 냉큼 디펜더 팀을 돌아봤다.
“다들 뭐하십니까? 냉큼 미궁으로 가서 엘릭 새끼 모가지 잡고 오지 않고!”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디펜더 팀은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안 가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션의 얼굴에 어린 절박함을 읽고 냉큼 오거스틴의 영지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여기 계속 서 있으실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셔서 엘릭 놈을 기다리시죠.”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헤이즈는 해머를 도로 등에 걸면서 산뜻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에 담긴 ‘쓸데없는 짓 하면 뚝배기부터 깨버린다’는 메시지를 모를 리가 없기에 션은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덕분에 타샤도 도중에 화구를 거둬들여야만 했으니.
대체 뭘 믿고 침입자를 안으로 데려가느냐며 션을 질책할까 싶기도 했지만.
타샤는 뒤늦게 해머의 정중앙에 박힌 표식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저건?’
최근 들어 용병계에서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용병단의 표식이었으니까!
‘블랙 스컬!’
블랙 스컬은 소수 정예로 이뤄진 용병단으로, 개개인이 전부 A급 이상의 랭크를 터득한 실력자들이라 알려져 있었다.
‘대체 저게 왜…? 설마 메르빙거의 영애가 용병?’
뛰어난 마법으로 천 년을 넘게 존경을 받던 마도명문의 여식이 해머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무투파라는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배운 것 없이 쌈박질만 일삼는다는 거친 용병계에서도 내로라한다는 상급 전사라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니. 그런 건 다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랑 원수질 것도 아니면 대체 이런 사고는 왜 친 거야?’
재능 삼킨 마법사